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꼭 읽어보길 바라는 책입니다.

비록 거식증과 관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믿더라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중독되어 있지 않다 느끼더래도, 생활 방식과 사고관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계기로 충분한 이 책은 어디에 있건, 어느 시점에 살아있건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의 응어리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을 깨달으며, 오랫동안 독후감을 적었습니다. 아주 사적이고 창피한 고백이니, 읽어주시는 분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큰 따옴표 속 문장들은 모두 인용 구절 입니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 대한 감상은 자기 고백 혹은 회고록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나와 독서 모임을 같이 한 친구들은 모두 "내가 선택하는지도 모르면서 선택한 내 인생의 몇몇 결정들과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유들을 알게 되었고,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었던 상처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알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던 사실들도 재확인했다”.

그야말로 난도질이다. 한 쪽씩 넘길때마다 그동안 숨기고만 싶었던 욕망과 비밀스레 정해놨던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였다.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라 분명 첫 몇 장 읽을 적에는 인덱스를 하나씩 떼어 붙이던 것이, 정신 차리고 보니 아예 형광펜을 들고 줄을 죽죽 긋고 있었다. 그마저도 페이지마다 뒤덮인 노란 색깔에 이럴거면 불필요한 부분(조사나 어미같은)을 지우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추리고 추렸음에도 원고지 몇십 페이지는 훌쩍 넘길 것 같은 이 독후감은 왜 이전에는 그것들이 당연하단 걸 몰랐었는지, 동시에 왜 그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몰랐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대답들로 가득하다.

 

[서론]

책의 서론에서는 욕구란 것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진득하게 붙어있는가에 대해 얘기하며 총괄적인 주제에 대해 포문을 연다. 대표적으로 음식, 섹스, 쇼핑 같은 게 있다. 우리는, 그러니까 여자들은 갈망하는 대상을 위해 대가와 노력을 지불하는데도 그것을 희생으로 여기는 풍조와 자기 혐오에 부딪힌다.

한 예로 저자는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중략)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며 여성이 스스로에게 세운 잣대에 대해 비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1장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불안들에 ‘억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2장에서는 그 이유로 자라온 환경을 들고, 3장에서는 여성 혐오의 뿌리를, 4장에서는 소비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5장에서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하는 이유에 대해 토로하며, 6장에서는 마침내,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내린다.

 


 

[1장] 케이크 더하기, 자존감 빼기

첫번째 장에서는 여성으로서 선택할 자유와 그것에 대한 부담감 및 좌절에 대해 다룬다.

무한한 선택지에서 따라오는 차기의 부담과 미래, 혹은 커리어 비전 등에 대한 얘길 읽고 있자니 재작년 쯤 같은 팀 동료였던 N이 퇴사할 때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비록 바로 옆자리로 나란히 앉은 사이였지만 이전까지 딱히 이렇다 할 친분 관계가 없었는데, 비로소 마지막 티타임 때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때에 나는 예의상, 그러니까 지나가는 말처럼 퇴사 결심 계기를 물었다. 이직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놓는 변명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지금 이 회사 돌아가는 꼴이 거지 같아서, 사람들이 싫어서, 직무가 안 맞아서. 그런 닳고 흔해 빠진 구실들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 들은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N은 이 회사에서의 끝이 보였다고 했다. 본인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건 단지 팀장이 되고, 실장이 되고, 딱 거기까지겠구나 하는. 자기계발적인 면에서 이미 어떤 주기를 봤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 범위의 선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은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가고싶댔다.

고개를 주억이면서 얘기를 듣고 있긴 했지만, 실은 그때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딴 세상 얘기 같기도, 아니, 좀 충격이기도 했다. 그때에 갓 입사한 나에게 팀장이나 실장, 대표 이사직은 너무 먼 얘기였다. 미래의 내 얘기가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어느 곳에서도 간부급이 되고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책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정리한다.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내가 앞서 ‘한계선을 낱낱이 해부당하고 가감없이 뜯겨보인다’라고 서두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한평생 본능적인 욕구를, 눈에 보이는 몸의 부피를, 심지어는 자신의 미래까지도 제한하고 있다.

요 근래 한창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던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갓 들어간 직장에서 막 1년차가 된 페니는 연봉협상을 앞두고 동기 모태일의 원대한 계획을 듣는다. 비슷하게 입사한 처지지만, 페니가 단지 첫 연봉협상에 대한 설렘과 긴장을 안고 있을 때, 모태일은 본인이 담당하는 층의 장長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페니는 모태일의 얘기에 살짝 충격을 받았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칭찬으로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동갑내기인 모태일이 저만치 앞서 나가려는 모습이 페니에게는 불안한 자극제가 된 게 틀림없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페니는 막연히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신입사원이라는 무적의 방패 뒤에 숨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던 일들도 더는 기대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모태일처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직원과는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게 뻔했다.

아름다운 꿈 동산 저편의 세계를 다룬 소설에서조차 한없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는 여성이고, 원대한 포부를 가진 자는 남성이다. 우연일지 모를 이분화된 성별로 마찬가지로 이분화된 얘기를 하고싶진 않지만, 그렇다.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내가 속해있는 사회 환경을 ‘우리’로 치환해도 되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나, 또는 페니와 같은 충격을 받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몇이나 될까?

나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처럼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성적이 잘 나왔고, 특출나게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웬만큼 못하는 것도 없었다. 부모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온 주변의 인프라, 교육 제반 등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 별 굴곡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히 보통의 평범한 인생을 살다보면 무언가를 잘 한다는 건 어떤 재능을 타고나야 진정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수영을 십 몇년을 했다하여도, 5살때부터 17살까지 개인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해도, 이건 나의 재능이 아니었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다시 수영장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땐 잦은 이사 탓에 센터와 회관 여러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언제나 적당한 반, 그러니까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알맞은 수준의 반에 들었다.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되는 걸 선택한 셈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들을 앞지를 수 있지만, 여유로운 게 좋아서 여기 있는거야. 그렇게 관망하는 태도로 수영장엘 나갔다. 어쩌다 운동을 하기 싫은 날이면 남들 다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쥐어짜낼 때 꼭 한바퀴씩 빠져먹곤 했다. 진짜 힘든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 숨이 차는 그 찰나의 시간을 버티기 싫어서 그랬다. 이런 태도는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곧잘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졸리지도 않으면서 피곤한 척 했고,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배고픈 척을 했다. 그러면 당장 거길 벗어나서 쉬어갈 수 있으니까. 연기 천재. 장래 유망.


그런데 어느날, 어김없이 멀뚱히 서서 선생님과 수다떠는 나를 본 같은 반 수강생 분이 ‘뒤에서 쉬니까 민망하지?’하고 한마디 하셨다. 속으로는 ‘쉬는 거 아닌데요? 제가 선택한 거거든요? 힘든 게 아니라 체력 배분하는건데요?’ 우다다 핑계를 쏟아내며 화가 뻗쳤다. 그런데 어쩐지 집에 갈 때까지도 그 말을 곱씹었다. 실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괜히 용 썼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민망하니까 욕심조차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이런 나의 욕구를 억제하게 됐을까?

 


 

[2장] 어머니와의 관계

2장에서는 여성들이 본인의 욕구를 억누르는 이유로 자신들이 겪고 자라온 환경을 든다. 특히나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며 우리의 근본적인 욕구는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즉 이러한 논점을 개인(후천적)에서 환경(선천적)으로 옮기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인 구조와 문화적인 가치관이 우리의 욕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욕망의 원초를 파헤치다 보면 어렸을 적 가정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진부한 분석일 수 있으나 저자는 다른 차원으로 속셈을 펼쳐간다. 즉 식욕과 관련된 문제 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 측면에서도 어머니를 관찰하고 따라하는 학습된 행동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단 관점이다.

책에 언급된 어느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 즉, “하루 종일 일하고 난 뒤에도 말 그대로 손발을 모두 바닥에 대고 리놀륨 바닥을 문질러 닦고, 오븐을 문질러 닦고, 판벽을 문질러 닦던 엄마의 모습”은 나의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 엄마가 당신의 엄마, 즉 나의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양상과 더 닮아있다.

엄마가 말하길 할머니는 한평생을 부엌에서 지내시며 삼남매와 지아비를 그 두손으로 먹여 살리셨다. 그게 엄마는 불만이었다. 하루종일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는 할머니. 누구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마음 먹는 것처럼, 엄마도 그런 반항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진짜로 요리라거나 청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본가에서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무렵까지도 우리집은 소위 말하는 ‘집밥’ 보다는 외식이나 배달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했다. 나홀로 상경한 후에도 엄마는 당신이 직접 만든 반찬을 보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정식과 백반이 어떤 건지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잘 몰랐다. 국은 급식에만 나오는 건 줄 알았다. 같이 지방에서 상경한 친구들이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립다고 했을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메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활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도 없었다. 불만을 가져야 한단 것조차 몰랐다. 여전히 단 한끼를 먹기 위해 웨이팅을 1시간 넘게 하는 건 이해도 못하고 질색하며,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거식증’이고, MD가 소개하는 한마디마저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으로 고통받던 시절을 회고하며 쓴 생애 마지막 에세이’일만큼 거창하지만, 이정도까지 했으면 솔직히 내가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단 걸 눈치챘을 것이다. 이래봬도 어떤 음식을 먹고난 뒤 눈물이 날만큼 감격한 적도 없고, 자의로 맛집을 찾아가는 법도 없어서 지도 어플을 다운받은 지 1년 조금 넘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처음에 독서 모임 책으로 이 책이 언급됐을 땐 굳이 내가 얻어갈 게 있을까 의문이었다. 거식증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얘기 아닌가. '먹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일 뿐이고, 식사란 건 허기짐을 채울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욕구들』에 따르면 나는 그동안 음식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 오래전부터. 기원을 거슬러, 다름아닌 우리 엄마 때문에.

이 책에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하면서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여자들의 경험담이 나온다. “헬스장에 다녀온 날에만 디저트를 먹거나 저녁을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는” 여자들. “식사 때마다 예외 없이 최소한 한 입은 남기는 걸 규칙으로 삼고”, “작은 케이크 조각 하나, 크림은 빼고”의 규칙을 고수하는 여자들. 어쩜. 딱 내 얘기였다. 알고보니 내가 바로 섭식장애 당사자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달성했다. 남들 다 책상 앞에서 공부하느라 움직임이 없어 살이 붙을 때 이상하게 나는 살이 좀 빠졌다. 이유는 당연했다. 급식이 맛없단 핑계로 밥은 겨우 두 주묵정도 푸고 반찬은 대부분 남긴다던가, 석식을 취소한 뒤 근처 떡볶이집에 가 치즈스틱 두개를 먹는다던가 그런 식이었으니까. 입시라는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애들보다 체중이 덜 나간다는 생각에 남몰래 우월감을 느끼고 그걸 하나의 장점처럼 여겼다. 나는 이상하게 살이 안 쪄, 같은 재수없는 소리와 함께.

그 무렵 내 손목은 한뼘 안에 잡히고도 남았지만 그건 타고난 뼈의 두께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163cm에 46kg~49kg를 왔다갔다 했지만 그 키에는 평균 몸무게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마른 체형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단 사실이 한몫했다. ‘오히려 체격이 있는 편이 아닌가?’라고 판단한 적이 더러 있었던 건 성장통을 앓기 전까지 양 뺨은 다람쥐처럼 통통했고, 의자에 앉을때마다 접히는 뱃살에 싫증 내며 피부가 뻘개질때까지 일부러 꼬집은 기억만 수십번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끔찍이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탓에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란 걸 누구보다 체감했다.

특히 매일밤마다 라면 한그릇을 끓이고 폭식하는 엄마를 혐오했다. 당시 엄마는 묵은 가정 불화와 사춘기에 들어선 자식들의 반항 때문에 남몰래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60kg 대를 넘어 70kg에 다다랐을 때, 나와 동생은 엄마가 돼지띠란 이유로 '돼지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밤늦게 야식을 먹고 드러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엄마들처럼 요리와 청소도 안 하는 주제에 게으르다고 비아냥대거나 손가락질했고, '그러니까 살이 찌지' 따위의 폭언을 거리낌없이 해댔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자기 절제를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몸이니까 유전과 닮은꼴이 나를 잠식할까봐 무서웠다. 스스로를 돌본다는 뜻이었겠지만, 현실은 자기 부정에 씌여있었다. ‘간헐적 단식’이란 키워드를 몰랐을 때에도 저녁 6시가 넘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배가 고프면 예민해진다’란 말을 들은 후로는 그 심리 상태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별로 먹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던 내가, 남들이 으레 짜증낼만한 이유를 이미지화하고 내재화한 것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건 배가 고파서야. 엄마가 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엄마를 싫어하는거야.

사실 이 모든 악순환을 부채질한 건 다름아닌 나였단 사실은 돌이켜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교육과 훈육 방식에 있어서는 아주 자유롭고 방목적인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항상 유언有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그 명령들은 대부분 복장에 관한 규제였다. 레깅스 위에 짧은 상의는 입지 못했고 (심지어 어두컴컴한 공기를 틈타 몰래 입고 나온 모습을 들켰을 땐 다시 귀가하여 갈아입어야만 했다), 공공장소에서는 치마를 입으나 바지를 입으나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했으며, 옷을 갈아입을 때면 창문 앞에 딱 붙은 건물이 없음에도 (심지어 저층이 아닌데도!) 꼭 커튼을 치고 시야가 가로막힌 상태여야 했다. 노브라로 나온 걸 당신이 알아챘을 때 받은 멸시의 시선은 독립하고 난 후로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 망령은 더운 날씨면 거리낌없이 홀가분한 차림을 입었다가도 영 찝찝한 마음에 급하게 속옷을 챙겨입는 이유가 됐다.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해’ 같은 형태 있는 이유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사정이 분명한 명령들은 “신랄한 힐난의 메아리”가 되어 평생을 쫓아다닐 셈이었다.

크고 투박한 옷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유니섹스uni-sex 태그가 붙어 있는 옷들조차 엄마는 그거 남자옷 아니냐며 핀잔을 주고는 결국 사지 못하게 했다. '여자'다운 옷도 안 되고, '남자'다운 옷도 불허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반발심으로 남들은 평소에 어떻게 입고 다니건 상관 않았으나, 나의 노출은 허용하지 않았다. 가슴을 드러내서도 안 되었고, 허벅지를 보여서도 안 되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 아니라 “약탈적인 남자아이들의 욕망”이었고, 이에 관한 “위협조의 잔소리 조각들”이 무의식중에 잔뜩 박혀있었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밤길을 걸을 땐 이어폰을 꽂으면 안 됐고, 항상 주변을 살펴야 했다. 아무리 통 큰 옷차림과 껄렁한 태도를 가졌더라도, 끊임없이 뒤를 돌아봐야하는 자기 검열이란 덫에 걸리면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캐럴라인 냅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엄마는 내가 옷 매무새를 정돈하지 않는다고 혼만 내었지,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남자들과 어떻게 유대와 연애 감정을 쌓아야 할 지, 혼자 상경한 서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밥을 얼만큼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고, 엇나가거나 스스로 자격을 박탈하거나, 위험 속에 몸을 던졌다.

지금은 술을 이전만큼 자주 마시지 않지만, 술에 취한 섹스가 잦았던 그날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20대 초, 동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J는 당시 대학가가 유일한 번화가였던 그 골목 토박이였다. 자유롭고 어린 치기에 들끓었던 나는 금방 매력적인 속삭임에 넘어갔고, J랑 만날 때면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소주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맛도 잘 모르면서 따라주는대로 마셨다.

만나는 시간은 매일같이 야밤이었다. J는 일부러 술잔을 채웠고 나도 딱히 마다하진 않았다. 정신없는 키스와 섹스가 난탕하게 이어지던, 비 오는 여름날에 습하게도 달라붙던 끈적한 기억은 맨정신이 아니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띄엄띄엄하다. 상대방 들으라고 내는 신음은 목이 졸리자 숨이 막혔고, 입을 통해 강제된 애무는 비릿한 정액을 삼길 통로였다.

어느 파티에서는 이런 적도 있다. 친구가 ‘여기까지 왔는데 잘생긴 남자랑 키스 한 번은 해야지’라고 말하자마자 긴장감이 풀려 그때까지 잘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적 말이다. 주변의 수많은 남자들을 붙잡고, 안기고, 키스하고, 매달리고, 결국 어느 남자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던 기억.

나는 남자들과 술을 마실 때면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는데 , 내숭이라기보단 혹시 섹스를 하게 되면 옷을 벗을때 배가 나와보일까봐서였다. 속옷 색을 위아래로 맞추고, 갈비뼈를 드러내보이고, 남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홀쭉한 몸매를 보이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도 내가 당신들이 원하는 몸에 부합하지 않아 부끄러울까봐.

일찍이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셔서 성적 얘기가 자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는 남자애들이랑 침대에 같이 들어갈때마다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몰랐다. 내가 만족하고 싶은건지, 남자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그 우선순위를 잘 못 정했다. 종지에는 대부분의 연애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작가도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는데, 고등학생 시절 단절된 상태에서의 애무에 이어 대학생 때의 단절된 상태에서의 성행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더 현명해지고 더 자신감이 생기고 성적으로 더 능숙해졌어야 할 (그래야 한다고 내가 느꼈던) 나이가 될수록 사실은 나를 더욱더 괴롭혔다”. “공허하고 하나같이 알코올의 힘에 이끌린 일들이었고, 대체로 수동성과 확인 욕구는 높았지만 행위 주체성이나 쾌락은 저조했다.”

결국 불가피한 욕구는 술, 담배,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회피형 애착 유형으로서, 곤란한 상황이 오면 습관적인 거짓말로 주변을 둘둘 싸맨 다음 그 뽁뽁이 같은 게 꽉 눌려지고 연쇄반응으로 터지자마자 다 들통나버리기 전에 큰 걸로 덮으려고 했다. 아무나 만나고, 소리소문없이 발을 빼버렸다. 서투름으로 치부할 때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던 가정환경이 그 배경의 기원이라며 탓했다. 그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자기 경멸에 절어 있었고, 그게 거의 본능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정보 공백”과 “솔직한 논의의 부재”는 미숙함을 낳았다.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택할 자유는 바꿔 말하면 실수할 자유, 더듬거리다 실패할 자유, 자신의 결점과 한계와 두려움과 비밀과 정면으로 대면할 자유, 자아의 파괴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끔찍한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갈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와 만나기로 선택하는 자유는 나의 권력과 입지를 찾을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자인 데버라 톨먼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몸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이해하거나 의문을 던질 때 쓸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섹슈얼리티는 수수께끼가 되고 자신의 성적 흥분은 신비이자 금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비난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나 미디어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일”일테지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여자들의 허기, 감춰진 허기, 갈등하는 허기, 금지된 허기"가 끊임없 새어나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해, "사랑과 인정에 대한 끝없는 허기였고, 섹스와 만족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기, 보이고자, 알려지고자, 먹여지고자 하는 허기, 취하고 또 취하고자 하는 허기였다. 나는 그 허기를 정복했고, 그것을 지배했으며, 밧줄로 수소를 잡아매듯 꽁꽁 잡아맸다.”

 


 

[3장] 내 배가 싫어, 내 허벅지가 싫어 & [4장] 브라 태우기에서 폭풍 쇼핑으로

3장에서는 비로소 여성혐오의 뿌리를 파고든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다룬다.

‘이런 얘기’를 할 때면 빠질 수 없는 얘기도 나온다. 바로 사회에 짙게 퍼져있는 여성들의 소비문화이다. 여성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어떻게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며, 이런 문화가 어떻게 여성들의 자유와 평등을 방해하는지 강조한다.

4장에서는 유달리 '만약 무언가가 된다면',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식의 as-if 가정이 반복된다. "소비주의의 음흉함" 곧, ‘만약 저 최신 명품 옷을 입는다면 난 누구보다 인기 스타가 될 거야'란 보상 심리가 선사될 때 욕구는 희석되고 잊혀진단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한 옷이나 메이크업을 향한 강한 끌림을 느껴본 적 없음'이란 경험은 행운일까 축복일까.

학창시절 나는 또래들에 비해 외모 콤플렉스가 없는 편이었다. 며칠동안 감지 않아 부푼 곱슬머리도 자유롭게 방치했고, 색조 화장품은 종류도 잘 몰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만약에 ~한다면’ 구절이 나왔을 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화장기 없고 검소하던 우리 엄마는 “친구들의 어머니에게서는 보이지만 내 어머니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탐닉하는 능력을” 반증했다. 그런 집안에서 컸기 때문에 네일 아트, 좋은 옷, 헤어스타일, 외모에 관한 개념이 전무했다.

남들처럼 만약을 전제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던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 내가 동경하는 워너비wannabe 처럼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단 걸 이미 인정한 터였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카루스의 날갯짓처럼 끝도 없는 수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몸은 말라갔지만 어깨와 골반이 넓어 몸집을 더 커보이게 하는 원피스 같은 류의 옷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예 실루엣을 가릴 수 있는 박시한 옷들에 더 집착했다. 프로아나(찬성하다의 'pro-'와 거식증의 'anorexia'가 합쳐진 합성어의 준말)의 이미지를 동경하면서, 그 현상에 부합하지 못한 몸매가 미웠다.

언제 한 번 환절기를 맞이 옷을 사기 위해 편집샵에 들러 유행하는 아이템 이것저것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죄다 유아용 같아 보일 정도로 짧고 딱 달라붙는 상의들과 지독히도 허리를 졸라매는 하의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걸 누가 입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이 입을 수나 있단 말인가? 같은 경악과 동시에 그 옷들을 입을 수 없는 내 몸뚱아리가 싫었다. 옷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평균에 부합하지 못하는 거라고 질책했다.

저자가 말한대로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내가야 한다"는 것도 페미니즘 공부와 사회 운동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소비로 포커스를 옮기면, 그런 결심과 고찰은 쉽지 않다.

단순히 “뚱뚱해지면 자기를 혐오하게 될까 봐, 태만함 내지 게으름이나 통제력 결여를 연상시켜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봐”, “아니면 단순히 더 날씬하고 튼튼할 때 더 기분이 좋기 때문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시대에도 여자아이들은 그 작은 옷에 몸을 우겨넣고 있다. 교육된 것일지, 문화적 예속일지,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쉽겠지만, 이런 현상은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5장] 목소리가 된 몸

5장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함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다룬다. 침묵은 여성들의 욕구와 목소리를 굳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과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지난 202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에서는 토크와 강연, 공연 세션이 포함된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진행되었다. 주최측인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인스타그램 @rabbitsubmarinecol)에서 내건 슬로건은 ‘우리가 우리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병보다 더 지독하게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였고, 참여 대상은 ‘거식증과 폭식증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과 친구, 치료자, 먹는 것과 자신의 몸에 불화하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섭식장애에 관해 ‘납작하게’ 이야기한 것들을 걷어내고 새롭게 해부하고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다. 이전에도 섭식장애 가시화를 위한 움직임은 이어져왔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단 점에서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내가 이 1년짜리 묵은 독후감을 다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걸 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었냐면, 책을 막 다 읽고나서 떠오른 단상들을 모아놓고보니 이건 뭐 소수의 공감 내지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외에는 그 어떤 보상도 없을 한낱 독후감 속에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경향은 배제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세라면 몇 페이지고 더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틈틈이 손질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허나 앞서 얘기했듯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자기 고백의 길로밖에 이어질 수 없고, 그 주장에 힘을 실어볼까 한다. 어느 책 소개에 쓰인 것처럼 ‘일기에도 쓰지 못했고 보는 사람조차 감당하기 힘든 솔직한 고백들을 무서운 기세로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점이 아닐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수치스럽더라도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활동을 통해 뼈아프게 사력을 다하기. 그럼으로써 염오와 절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6장] 희망을 향해 헤엄치기

낯부끄럽고 수치스러우며 이제껏 숨겨야만 했던 역사를 전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해방감일 것이다. 그만큼 『욕구들』은 조심스럽게만 쓰이지도, 단 한 명만의 해소를 위해 집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책을 덮고난 뒤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일종의 안도감과 감사함이었다. 불쾌감과 불미스러움, 불안함과 불온함에서 우러나온 나의 (과거의) 어리석음은 스스로 정한 규제 때문이 아니라 사실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읽는동안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단 것이다. 어떤 챕터에서는 여태껏 나조차도 잊고 있던 기억들을 자동으로 반추하였고, 나의 길고도 짧은 생의 역사가, 그러니까 나의 부모, 나의 남자친구들, 나의 습관이 오로지 나만의 것임이 아님에 괄목했다. 굳이 들킨 것도 아니지만 심장이 들쑤셔졌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오해로부터 기인했단 인사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나의 뱃속을 들끓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밤중에 피어오르는 폭식에 대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걸까? ‘지금 당장 야식을 먹게 된다면 내일 아침에 얼굴이 부을 게 분명하고, 또 살도 뒤룩뒤룩 찔거야’란 긴장감을 하루아침에 떨쳐내고 본능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비록 허리춤 양 옆으로 살이 튀어나와도 길이가 확연히 짧은 티셔츠와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해도 되는걸까?

꽤 오래전에 책 속의 명언들을 소화시켰으나, 나는 여전히 수영장 탈의실에서 발가벗고 사방에 있는 거울을 지나칠 때마다 배에 힘을 주어 최대한 살가죽을 갈비뼈에 붙여 보인다. 길을 지나가다 쇼윈도에 비친 모습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정리한다. “슬쩍 보기만 해도 자기 점검이라는 현상이 호흡만큼 반사적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을. 뿌리깊은 자기혐오와 “행위 주체성, 즉 권리 의식과 힘이 결합되는 감정”은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남모르게, 나도 모르게 못되게 굴어 엉망이 된 내 몸에게, 우리 엄마와 과거의 여성들과 미래의 여자 아이들에게. 왜냐하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어쨌든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변화”니까.

“’나는 충족될 자격이 있다’가 ‘나는 충족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나이 때 내 어머니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모든 자유는 복되고 멋진 것이었지만 내게는 또 그만큼 무섭고 억압적이고 심지어 (물론 당시에는 입 밖에 내어 표현할 수 없었지만) 약간은 부당한 것으로도 느껴졌다. 그런 자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내가 품고 있던 불분명하지만 뿌리 깊은 일련의 감정들과 모순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 - P25

거대하고 모호하고 압도적인 대상(일이나 사랑) 대신 작고 구체적이며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대상(팝콘 한 알)에 초점을 맞추게 한 것이다. - P29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 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 p.32)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 P31

대개 파편화된 렌즈를 통해서만 한 번에 한 가지 병폐만 따로 떼어 검토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34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매일매일 운동량을 기준으로 먹는 양을 엄격하게 조절한다. (…) 그 기준이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매일 그 규칙을 엄수하며 살아온 탓에 이제 다르게 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여긴다. - P36

먹는 양과 칼로리와 지방의 문제로만 파악하면 여성의 갈망이 야기하는 더 폭넓고 다양한 감정들이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 P44

욕구는 기본적 생명 유지 문제에서 분리되고 법적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후 주로 내면과 관련된 현상이 되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역량은 물리적 틀이나 정치적 틀보다는 감정적 틀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그 결과 한 여성이 갈망과 만족에 대해 갖는 관계는 마치 거울처럼 그의 자아 의식과 더 넓은 세상에서 그가 자리한 위치를 비춰 보인다. (...) 이런 일들은 많은 여성에게 생사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기쁨과 괴로움의 표지임은 분명하며, (…) - P46

우리가 행위 주체성과 주도권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나, 자신의 욕구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켜도 될 타당성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이 부재한다는 이야기다. - P48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낮은 자존감’처럼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 P49

여자들 여럿이 모여 레스토랑에 갈 때면 섭취량과 자제력의 정도를 드러내고 비교하고 지적하는 그리 은밀하지도 않은 집단적 감시 활동 - P60

대부분 그 허용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야earn 하며, 그러려면 감시하고monitor 통제해야control 한다. 그리하여 e=mc². - P63

다이어트하는 여자의 사적인 나스닥, 개인의 자기 고문 지수. - P65

신체 사이즈를 줄이는 것과 자아 자체의 소형화에 대한 강조가 여자들이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 성취를 이뤄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열기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은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 P70

선택할 자유도 실질적인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의 중량이 어떤 식으로든 밑받침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깨뜨리는 느낌,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얄팍하고 힘없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P77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의 열정을 따르면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어요." - P84

소비자는 너무 많은 선택에 직면할 때 압도당하는 느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느낌, 우유부단함으로 마비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 "여자들은 선택할 것이 무한하다. (…) 그리고 이는 매우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당신이 자기라는 존재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경력을 추구할지, 머리카락을 어떻게 자를지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당신이 의지할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 P95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가 ‘나는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할 때 사실 그는 무엇이든 다른 특성을 갖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날씬함으로 대표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지는 않는 가치 의식, 소속감, 사랑받는 존재라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 P103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구체적인 불안들로 대체된다. - P105

나는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 P128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 P131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 관찰하고 따라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 P133

오늘날의 어머니에게 허기를 느낄 자유는 있을지 몰라도, 그 허기를 채울 자원까지 항상 있는 건 아니다. - P146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 P147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 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 P150

쾌락 추구와 자기 욕망의 충족은 어쩐지 부당하고 자격 없는 일이라는 느낌으로 나타났다. - P153

심리적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법으로 집 안에 비참함을 불러들여 청구서에 납부 완료 도장을 받는 일 - P157

무. 식욕 없음. 내 몫은 아님. (…) 이런 일이 일종의 쾌거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 P168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독백은 너무나도 흔하고, 너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혹독한 말인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 P170

피부는 (…) 하이드레이팅하고, 스무딩하고, 토닝하고, (…) 컨투어링하고, (…) 안티에이징하고, (…) 학위 취득만 빼고 다 해야 한다. - P187

내가 이런 생각의 오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아주 깊은 수준에서 작동하여, 내가 여성 혐오의 뿌리를 이해하고 문화와 자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성인 여성으로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리고 아직 한참 미숙한 존재로서 처음 경험했던 감정들을 촉발한다. - P189

육체는 가장 중요한 재화였지만, 어느 순간이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재화였다. - P204

내게 이 모든 걸 `거부할 힘`과 `의지력`이 있다는 식의, 일종의 자만심 같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시기했어. - P215

그들에게 음식과 체중에 관한 여성의 몰두가 자기혐오나 수치심이나 내면화된 여성 혐오 혹은 무엇이든 사회 정치적 성격을 띤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의 눈빛은 이내 따분하다는 듯 흐리멍덩해진다. - P217

가치관을 재편해야 하고, 가치들 뒤에 자리한 뿌리 깊은 가정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가야 한다. - P225

마치 그게 실제로는 자기 체중이 아닌 것처럼. - P226

지적인 신념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 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 P244

그들의 갈망에 굴복하면 우리에게는 헤픈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너무 많이 억제하면 내숭쟁이가 됐다. - P253

"아마 실제로 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의 몸을 인정해주지 않는 문화에 직면해 자신의 성적 욕망의 딜레마를 그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써 해결할 것이다." - P254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 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 P262

`괴로운 일은 상품으로 해결하세요, 자아의 바깥을 바라보세요.` - P274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다소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성공 자체도 운동의 절박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 P281

슬픔은 주기적으로 뚜렷한 원인도 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상태가 나쁜 아침 잠에서 깬 첫 순간,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공허함과 갈망의 습격으로 제 존재를 알린다. - P319

프로이트는 인간의 ‘죽음의 본능’에 관해 썼다. 이 말은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초기의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 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하는 갈망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 P322

욕망에 이름을 붙여야 하고, 무엇이 그 욕망의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개의치 않은 채 억제를 부수고 나갈 힘과 용기와 자기 수용을 이끌어내야 한다. - P359

감정의 모든 뉘앙스와 근원을 이해하려는 본능을 억누르세요, (…)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 P3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의 제왕 일러스트 특별판 - 반지 원정대 + 두 개의 탑 + 왕의 귀환 톨킨 문학선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보원 외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추가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남김. 뜯어보딘 않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행복한 이유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말하면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대로 자세 잡고 읽은 건 몇 권 안 되지만, 이따금 친구들에게 확언한다.


SF란 아주 번거로운 장르이다. 수학/과학/이공계 지식이 전무하다면 본문에 지나가듯 거론되는 용어조차 무슨 뜻인지 몰라 갈피를 잡기에 쉽지 않다. 물론 상식이 특출나거나, 전공 분야를 공부했거나, 일말의 야트막한 지식이 있다면 그보다는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을 완전히 깨닫고 몰입하기 위해선 더한 노력이 필요하다. 플랏의 흐름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찝찝한 이 기분을 해소해주는 건 자료 조사일 테지만, 5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순식간에 읽고 나면 그만한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완전한 독서가 불가능해지며, 그래서 이 장르가 싫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갈래를 펼치며 서술할 수 있는 건 철학적 시각뿐이다. 가정을 여러 개 세우고, 비틀고 꼬며 what-if 형식의 변증법 형식으로 독서를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모임도 작가의 주장과 가치관이 어떤가 해석하기보단 각자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고유의 개성을 앞세워보았다.


특히 표제작인 「내가 행복한 이유」는 4,000명의 취향 샘플이 단 한 명의 인간 개체에 모두 담겼을 때 찾아오는 선호의 딜레마를 다루는데, 우리는 이를 어떤 한 등장인물의 것으로 판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확장된 범위에서 가름하고 유추하는 과정을 거쳤다.


  • 개인
    •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단순히) 좋은가? 싫은가?
    •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감정의 고저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 다수 대 소수
    • 나를 제외한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제어 패널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때 따라오는 소외감은 얼마나 클까?
    • 인간을 이루는 건 고민과 결정(choice)인가?
    • 함께 언급한 작품들: 같은 책 「내가 되는 법 배우기」, 『SFnal 2022 vol. 2』 中 「알약」
  • 사회 윤리
    • 살인 충동이 해소되었을 때만 쾌감을 느끼는 어느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에게 두라니의 치료법을 거행하는 일은 독립된 개인 혹은 사회적 측면에서 옳은가? 그 까닭은?


이런 단계는 상완을 다채롭게 하지만, 본 책에 대한 감상을 찾아보면 간혹 철학적 질문을 배제하고 SF의 장르적 재미를 고조했으면 더 좋았으리란 평도 존재한다. 총 11편에 거쳐 인간의 자유의지, 정체성, 진리 등을 아우르는 이데올로기는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충격적이고 어떤 사유의 시발점이 될지라도, 이제 그 수준을 벗어났거나 무뎌진 독자들에겐 질릴만한 소재이다. 예를 들어 「루미너스」에서 시사한 현 인류의 수학 공리를 전복하는 존재의 가능성은 한평생 '진실'로 체화한 개념이 뿌리부터 틀린 것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이런 반기를 제기할 수도 있다. '굳이 SF가 그 기폭제가 될 필요는 없다'. 밀란 쿤데라가 『농담』에서 절대 신념과 획일주의를 경고했던 것처럼, 여타 고전 문학 작품에서도 이미 충분히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SF는 장르 소설로 묶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주제의 유사성 탓에 메들리처럼 반복되는 회화는 낡아서 매력이 닳은 고전적 피상으로 보인다. 상이한 키워드 안에 숨어있는 패턴을 읽기에 별로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특히 이 전에 읽었던 SF 소설이 『SFnal』 시리즈, 즉 최신의 그것들을 묶은 출간물이라 더 그렇다. 해당 책의 독후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든 많이, 또 오래 보면 그 패턴이 보이고 연출된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 하나의 단편을 읽는 동안에도 자연스레 여타 SF 소설, 드라마, 영화와 같은 작품들이 두세 편, 많으면 5편 이상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SF는 자꾸 무언가를 상기시키고 연결되어있다고 보면 되는 것일까?


처음에는 수많은 작품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며 집약적이고 또 그물망 같은 인식 체계를 구성하는 게 새롭고 뿌듯했으나, 이제는 달갑지 않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같은 반응이 따라오는 기발함이 번뜩일 때도 있으나, 평균 수준의 스토리텔링과 흐지부지한 마무리는 아쉬움을 낳는다. 종교 원리주의자의 비도덕성을 고발한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를 두고 누가 '『데스노트』가 연상될 정도로 조잡하기 그지없다'고 한 말에 손뼉을 쳤을 정도니까. 종교로 입혀진 인체의 신비, 우매한 추종이 흔들릴 때 오는 인지부조화는 겨우 어떤 논점을 표방한 정도로만 포장되고, 우스워지기도 한다. 이에 더해, 작가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보일까 봐 중반부에 대뜸 정리된 내용을 짚고 넘어가는 행위는 친절에 대한 감사보다 '진즉에 좀….' 하고 짜증이 난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두 가지였다. 종래의 수론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고, 자연수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모순일 가능성. 또는 앨리슨이 옳았고, 몇십 억 년 전에 '계산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일부를 일종의 대체 수론이 지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 p.354 「루미너스」 中


「100광년 일기」도 살펴보자. 자칫 결정론·운명론을 논하는 듯 보여서 '인생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면 만족감보다는 지루함이 더 클 것이다'라는 얘기를 나누겠지만, 작품을 해체하는 과정 중에 이것의 핵심은 '계획'이 아닌 '자유'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 그렇다. (진부하게도…) 이러한 시간 구속과 자유의지는 전혀 새롭지 않은 주제이다.


「무한한 암살자」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타임 패러독스 안에서 '절대자' 혹은 '비켜 나가는 자'를 파괴하기 위해 뒤쫓는 설정은 이미 도처에 깔려있어 걷는 거리마다 발에 챌 지경이다. 앞서 언급했듯 사상적 근원을 파헤치고 역사와 정치 상황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는 작가의 입장에선 퍽 유혹적이어서, 하드 SF의 옷을 입고 탈이념의 시대 정신을 굳이 또 한 번 구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옮긴이의 말에 도달했을 때, 수록된 단편들 대부분이 90년대에 집필되었단 점은 위에서 구구절절이도 써놓은 평들을 놀랄 만큼 뒤집는다.


  1. 「적절한 사랑」 (1991)
  2. 「100광년의 일기」 (1992)
  3. 「내가 행복한 이유」 (1997)
  4. 「무한한 암살자」 (1991)
  5.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1990)
  6. 「행동 공리」 (1990)
  7. 「내가 되는 법 배우기」 (1990)
  8. 「바람에 날리는 겨」 (1993)
  9. 「루미너스」 (1995)
  10. 「실버파이어」 (1995)
  11. 「체르노빌의 성모」 (1994)


자고로 SF란 신기술과 가능 세계, 최근의 인간 군상이 상상에 합쳐지며 먼 미래의 내러티브, 아니 말 그대로 '공상'으로 구성되는 법 아니었나. SF는 자연스레 미래 시제를 띄기 마련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과학이기에 과거에서 이미 정해진 부동의 유산은 모름지기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유명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777>에서 기리보이가 프로듀싱한 곡 '공상과학기술'을 노래한 래퍼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나의 동공 안엔 가상현실 / 타임머신 티켓 2장 있어 / 알약 몇 개만 삼키고선 암 퇴치 ♪


그래. 분명 SF는 달을 넘고, 공기 위로 걷고, 영생을 얻는 삶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이뤄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다. 이는 문자도 없던 선사시대 분위기에는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먼 미래의 얘기만은 아니란 건 안다. 아주 근거리에서도 충분한 상상력이 곁들여지는 모습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여태 칭송받는 <블레이드 러너>(1982)나 <백 투 더 퓨쳐>(1985) 같은 걸 떠올려보면 쉽다. 번화가의 냄새는 향수를 자극하고, 어딜 가도 아이들은 유행을 좇고 있다.


VR 게임장의 앞 유리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본 게임의 초현실적 영상들로 반짝였고, 게임장 안에 모인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의 텍사스 풍의 꼴사나운 패션을 두르고 있었다. 공기에서조차도 토요일 밤의 밀라노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감자튀김, 팝콘, 리복 운동화와 코카콜라. / p.476 「체르노빌의 성모」 中


굳건한 믿음은 읽는 내내 시의적절하다고 여겼던 글들이 (특히 「실버파이어」의 감염 사태는 코로나19로 팬데믹 시대가 열리며 오늘날 SF에서 꾸준히 활용되고야 만다) 실은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에 집필되었단 사실에 철저히 깨부수어진다. 고백하건대 내내 시대적 배경이 나오지 않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도 어떤 장치로써 작용했을 수 있음은 의견을 나눠봄 직하다. '어라, 이거 언제 써진 글이지?' 하고 의문 가득 고개를 든 건 책의 절반쯤 다다랐을 때야 겨우 발견한 인명 덕이었다. 역서가 2022년 처음 소개되었으니 당연히 최신 글인 줄 알았다.


미국 대통령41대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은 손에 계란 타이머를 수평으로, 그러나 언제나 기울일 수 있는 자세로 쥐고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전임자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석방을 지연시킨 비쩍 마른 이란 대사관 인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 p. 280 「바람에 날리는 겨」 中


고의로 제거되었더라도,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대목이다. 존 버거가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2012)에서 말했듯 오래된 예술 작품이 아직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가 그맘때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SF도 유화와 같다. 뚱딴지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란 소리다.


'SF 작가들의 작가'라는 호칭은 그래서 붙은 모양이다(아니, 일단 이 사람 61년생이다….). 선구적인 주자로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잇달아 수상하며 명성을 확립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서두에 나는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썼다. 혹자는 섣불리 속단하지 말라 조언할 것이다. 단편집의 파편들을 주워 담고 엮기에 급급하다는 평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그럼 다시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쩌면, 장편 하나를 진득하게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이 똬리를 틀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단 두 가지였다. 종래의 수론에는 본질적인 결함이 있고, 자연수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모순일 가능성. 또는 앨리슨이 옳았고, 몇십 억 년 전에 ‘계산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일부를 일종의 대체 수론이 지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다. - P354

VR 게임장의 앞 유리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본 게임의 초현실적 영상들로 반짝였고, 게임장 안에 모인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의 텍사스 풍의 꼴사나운 패션을 두르고 있었다. 공기에서조차도 토요일 밤의 밀라노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감자튀김, 팝콘, 리복 운동화와 코카콜라. - P476

미국 대통령은 손에 계란 타이머를 수평으로, 그러나 언제나 기울일 수 있는 자세로 쥐고 있었고, 그 안에는 그가 전임자의 대선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석방을 지연시킨 비쩍 마른 이란 대사관 인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 P2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에 써넣으며 본인의 입지를 밝히고, 장을 번갈아 가며 관련 담론을 펼친다.


그렇다면 동양인/여성/시스젠더/○○섹슈얼/비장애인 신체/중산층인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비록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정상인'이라 부르는 규범으로부터는 조금 어긋나있을진 몰라도 나는 내가 속한 이 땅에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비록 소수자성을 향한 타자의 혐오를 느껴본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PTSD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또한 어떤 순간적 '힘듦'으로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행하려 노력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앞서 말한 '정상인' 템플릿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처음 알았다. 활자로 썼을 땐 사소할지 모를 이 정체성의 간극이 근본적인 대역을 태초부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소수자성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하거나 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보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여자라고 임금을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도 동반자 법 아래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비수도권 자들에 대한 처우가 수도권과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이런 단순한 입장들은 어떻게 보면 '장애인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조를 요청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남들'만큼의 제 기능은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니 전복될 가치관조차 없어 얼떨떨했다는 감상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고개를 수도 없이 끄덕였으나, 이입한 횟수는 그와 비례하지 않았다. 감히 공감해도 되는지조차 어렴풋했다.


분명 성 소수성을 주제로 꺼낼 때도 비슷할 테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에이즈와 예수님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반동성애 연대협회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지리멸렬하고도 지긋지긋하게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의 주인공 자레드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만, 그가 주체적으로 결론 내린 본인의 정체성은 교회 사회 안에서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져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 제목 그대로 주변인들로부터 본연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험은 불쾌하고 비자주적이다. 그런데 장애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생애 얼마 동안 생각하고 걱정하고 분노할까?


-

현 시각 대한민국 서울은 전쟁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권리 확보 선전을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등 '시민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발표했다한국일보, “못 만날 이유 없다”던 오세훈, 전장연과 단독 면담 불발” 2023.01.19. 혹자는 이를 두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시민은 어엿한 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단 입장만 굳혔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 평소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던 나는 회사 동료들의 불평으로 아침을 맞았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 지각했다느니,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시위하냐느니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얘기들은 듣지 않아도 됐다. 귀결되는 논점은 단 하나. "괜한 불똥에 멀쩡한 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단 것".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거나,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거나, STS 같은 학문은 이 책에 소개된 것을 넘어 더 깊이 알아볼 시도를 하거나 연구로 이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기엔 아주 의아하다. 내가 이전에 썼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독후감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에 관해 의심한 적 있듯, 그것들을 알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연이은 투쟁과 끊이지 않는 논란에 기사 전문 대신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중, 문득 한창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 영어권 국가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볼 수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저상버스가 아닌 차량이 오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는 타지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김원영 작가는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와 같은 의문을 던진다. 흔히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 권리인 이동권은 투쟁해야만 겨우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잘 감동 받곤 하는 마케팅에서도 이런 시선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적인 신기술'의 뛰어난 업적으로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농인, 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된 청각장애인, 로봇 다리를 장착하고 다시 뛸 수 있게 된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비장애인은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앞서 언급한 성소수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곧 도래할 최신 과학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란 믿음은 기후 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교화 대상으로 여기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자면 학창 시절에 공모했던 '전국 학생 설계 경진대회'가 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여타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꽤 큰 행사였다. 대주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따뜻한 기술의 개발'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힘이 미치도록 기획되었다. 그맘때쯤 공대로 입시의 방향을 정했기때문에 단순히 외부 활동 스펙이 필요해 참여했던 대회였다. 운좋게 입상까지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역시권 출생/명문 학군/전문직종 자제인 나와 친구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단순히 미디어와 고정 관념이 그리는 이미지들을 캐치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이름 아래 설계한 ○○ ○○○의 도면은 스케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설계 취지와 내용도 부실했다. 기억에 본인이나 주변인의 장애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를 한 팀은 전무했다(이점은 특히 대학부보다 고등부에 특출나게 드러났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였을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무능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얼마 전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곳에는 조명과 난방을 포함한 모든 기본 설비들을 하나의 터치패드로 중앙 제어할 수 있다. 스위치가 없고 매끄러운 공간은 '심리스seamless'하고 유연한 현대적 공간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시력이 감퇴했거나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는데 서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가 집들이 선물로 드린 가습기는 전원 버튼이 감춰져 있고, 리모컨이나 LED로만 상태를 조작하고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선 호수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가볍게 입력해야 한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의 진입마저 어떤 난관이나 관문처럼 느껴지니 지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는 이사 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계시는데, 혼자서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고택에서는 벨을 누르면 수화기를 들어 문 열림 버튼을 눌러야 했고, 방을 데우기 위해선 장작불을 피워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사용자의 의식적 개입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 이음새는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그 손녀가 공모하고 설계했던 ○○ ○○○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에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인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진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궁극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이 희미해지기 위해선 관계를 장애/비장애의 구분에 묶지 않아야 한단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리처드 사이토윅이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쓰고, 이 책의 9장에서 인용한 아래 문장으로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우리는 움벨트 안에서 나오려고 투쟁해야 한다. 움벨트는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을 각색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해당 독후감을 통해 전장연 활동에 관심이 생기신 분은 하기 정보로 일시/정기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일시 후원 입금 계좌

국민은행 009901-04-017158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기 후원 등은 사이트 통해 가능 https://sadd.or.kr/donate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 P33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 P38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 P57

그러나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identif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 P60

즉 장애라는 인간의 경험이 병리학의 대상에서 존재론의 문제로 이동한 것이다. - P61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 P63

그런데 이 흔한 ‘위로‘ 속에서 우리 사회가 기술과 장애, 의학과 장애의 관계를 어떻게보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 P65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다. - P67

미디어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이제는 기술의 보조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 P71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한다. - P72

그러한 기술은 필연적으로 교정과 향상을 요구한다. - P75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Autism Speaks‘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 P82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기술과 의학으로 교정하려는 정상성 규범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어 장애인의 현실을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발 붙일 곳이 없다. - P84

언젠가 나타날 기적의 과학기술에 이른 찬사를 보내는 대신, 이미 현실에서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 P88

21세기 휴머니스트들은 교육에 걸었던 기대를 과학기술에 건다. - P94

장애가 부정적인 낙인의 총체로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에서 장애인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잇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장애는 완전한 무능 혹은 그 여부를 증명해야 하는 의심의 대상으로 이원화된다. - P123

장애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장애 당사자가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장애에 대한 낙인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장애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특성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애는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 P125

이러한 고민 역시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 P160

장애인들은 삶을 개선하고 환경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고안해내고, 지식을 공유하고, 비장애중심주의적 사회에 균열과 마찰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은 희미해지고, 아예 흐트러진다. - P189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비장애인들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점자 블록을 가시성이 낮은 회색으로 만들거나, ‘비장애인 시청권‘이 보장되기 어렵다며 공영 방송 뉴스에서 수어통역 제공을 거부하곤 한다. 장애인만을 위한 설계가 여전히 가치 절하되어 있다는 증거다. - P204

그러나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매끄럽지 않은‘ 기술이라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기술에 대한 열광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 P237

하대청은 인공지능의 ‘자율성‘ 밑바닥에 놓인 인간 노동자의 구체적인 돌봄 노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이런 이음새 없는 기술 환경 밑에는 이음새를 끊임없이 관리하고 수선하고 보수하는 인간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 P243

장애인은 심리스-스타일의 세계 안에 끊임없이 ‘이음새‘를 만드는 존재다. 많은 것이 자동화되고 인간 행위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늘 거기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주는 존재가 장애인이다. - P248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 P256

오늘날 SF는 소외를 논하는 최적의 장르로 변화해가고 있다. - P261

‘우주선 설계하기‘는 장애가 환경과 상호 작용하여 구성되는 상황에 대한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 이 사고 실험은 접근 가능한 세계를 단지 ‘상상하는‘ 일조차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완전한 상상의 영역에서도 보편은 거기 속하지 못한 이들을 밀어낸다. - P264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 P281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떄,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 P299

그런 세상은 늘 ‘안전‘하겠지만 차이를 존중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차이가 만들어내는 어떤 이음새도 없을 것이다.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작은따옴표 안의 문장들은 모두 인용구입니다.



ⓘⓝⓣⓡⓞ

‘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표준국어대사전)’이다. 더 쉽게 생각하면 흔히 ‘미술’로 환유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에게 ‘예술’이 꼭 필요한가?

이는 창작인, 관람자, 수집가 등의 입장을 편가르거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다. 자연에서 파생되지 않고 인간이 특별하게 마련해야 가치가 생기는 이 ‘예술’이 때론 너무 거대하거나 우습게 느껴지곤 한다는 게 문제다. 유행을 좇아 전시회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보이곤 한다. 해외 여행 계획을 짤 때 너나 할 것 없이 유명 미술관 방문 일정을 2시간 정도 넣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사전에 정의된 ‘아름다움’을 온전히 흡수하기에 충분치 않단 걸 공감할 것이다. 거대한 유화 작품 앞에, 혹은 의미 불명의 행위 예술가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스스로의 지식 혼은 존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기존과 다른 영역에서 분석하며 새롭게 (비록 1972년에 소개 되었지만) 주장한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작가의 관점은 '미술의 영역과 그 여타의 다른 삶의 영역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검토하려는 것'으로, 이것은 이른바 신미술사학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이다. 이에 따라 본 서적은 정체를 알 수 없고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예술’을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총 7 챕터에 걸쳐 설명한다.


1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을 ‘보는 행위’에 대해 역설하며 그 의미를 읽는 방식이 얼마나 주관적인가에 대해 ‘동시성’이란 키워드 아래에서 설명한다. 하나의 작품에, 혹은 여러가지 작품들의 배열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담겨 있는 동시성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살펴보며 기존에 미술을 간주하던 시각을 깨뜨린다.

예를 들어 어떤 미술관에 유화 작품 A가 걸려있다고 가정할 때, 인간 P와 Q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본인의 관심을 끄는 것에 우선 초점을 맞춘다. P가 전체적인 색감에 감탄할 때, Q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구도를 생각하는 식이다. 즉, 감상 체계는 보는 이의 의식이 지대하게 포함된 채 이루어지며, 따라서 예술을 감상하는 관점은 여러가지로 분화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림의 모든 요소들은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져서 저마다 ‘결론을 다시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유화 작품 B와 C가 A를 사이에 두고 걸려있다면 동시성은 다른 종류의 것이 된다.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이는 내가 도서나 영화는 좋아하지만, 정적인 미술 작품이나 공연 혹은 연극 따위의 장르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대신 피력해준다. 잘 편집된 순서에 따라 특정 장면을 연속해서 따라가도록 설계된 작품보다 정보가 많음에도 한 눈에 이해해야 하는 작품들의 피로감이 더 큰 것이다.

존 버거는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변화가 미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서도 논한다.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되는 것이었다. 예술의 권위가 ‘역사 내내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술’로 인식하는 작품들은 대게 아주 오래된 것인 까닭은 우리가 당시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적인 교육도 대부분 검증되었다 할 수 있는 고전 작품들로 이루어지기 일쑤이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어 우리는 시점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짝수번의 챕터에서는 오로지 이미지의 나열만으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2장에서는 3장에서 소개될 벌거벗음(nakedness)과 누드(nudity)에 대한 예고로 가득한 이미지들이 산재해있다. 헐벗고 꾸며진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들과 관객의 시선. 정물과 여성을 대조 시키며 상품 혹은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식을 미리 본다.


3장을 읽는 순간 어찌 (G)I-DLE (이하 아이들)의 신곡 Nxd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존 버거는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라며 둘 사이의 명백한 차이에 선을 긋는다.

한 K-POP 여자 아이돌 그룹의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자 쓰인 이 곡의 주요 가사도 다음과 같다.


♬ Why you think that 'bout nude? / 'Cause your view's so rude / Think outside the box / Then you'll like it (… ) 아리따운 나의 누드 / 아름다운 나의 누드 / I'm born nude / 변태는 너야

♬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 Oh, I'm sorry 그딴 건 없어요, 환불은 저쪽 / 대중은 흥미 없는 정보 (… ) 행복과 반비례 평점 but my 정점 / 멋대로 낸 편견은 토할 거 같지


왜 미술관에는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걸려 있을까? 그것도 발가벗겨진 채로? 남자 관객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감상하고 받아들이는 지 알 겨를이 없지만, 내가 각종 유럽 미술관에 방문할 때마다 항상 들었던 의구심이었다. 페미니즘이 2010년 초반에 한국 여성들을 말 그대로 강타했고, 여자라고 해서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가 없단 걸 자각했음에도 각종 누드화가 불편한 이유를 정확히는 몰랐다. 보다 깨어있을 서구권 공기관에 누드화들이 주렁주렁 걸려있으니 잘못된 것들은 아닐텐데, 같은 생각만 했다.

이전의, 어쩌면 지금까지도 동일하게 표현되는 누드화들은 ‘성적인 것을 감추지 않고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표지(標識)로 읽을 수’ 있으며, ‘. 여자는 그림 바깥에 있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여자의 진짜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관객(소유자)을 쳐다본다’. 특히 누드화 속 여자들은 유독 다른 방식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관객과 소유자를 위한 시선 처리 때문이었다.

Nxde를 작사·작곡한 아이들의 리더 전소연이 이 책을 읽었는 지는 미지수지만(오히려 마릴린 먼로의 일화에서 따온 게 명백한 오마주들이 가사와 뮤직비디오에 점칠되어 있으나), ‘누드가 언제나 관습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K-POP의 현주소에서 깨부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크게 칭찬할 일이다.


4장에는 유사한 구도와 주제로 표현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성녀, 죽음, 정물, 누드, 큐피드와 사랑, 초상화. 그것들이 이제껏 어떻게 그려져 왔는지,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는지, 각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의미는 뭐가 있을지 짚어보았다.


5장에서는 유화의 기본적인 상식들을 언급하며 부와 미술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 파헤친다.

전통적으로 ‘그림은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탐나는 물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그림은 ‘소유자의 재력과 일상의 생활방식이 실제로 어떠한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풍경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이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해도 ‘유화와 소유 재산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유지된다. 한 예로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덕분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 ‘액자 안에 든 유화’는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기 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이와 반대로 때론 서민의 삶을 그린 민화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림 속에서 떠들고 웃고 즐기는 ‘가난뱅이들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잘살 수 있다는 기대가 희망의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규범을 타파하기 위해서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은 기존의 것과 ‘정반대되는 작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화가가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이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가로 칭송’된 이유는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흥미롭고도 슬픈 이 비화는 ‘위대한 예술가’를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으로 정의내린다.

일전에 정세랑 작가의 신작과 관련한 낭독회에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의 주관이나 가치관이 작품에 뚜렷하고 또 빠듯하게 차고 있다. 이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고 있으신지.”

이에 대한 작가의 답변으로 이 챕터를 갈무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들을 보면 항상 작가의 주장이 강한 편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작품들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럼에 나는 굽히지 않고 계속할 것이다.”


부와 가난을 비교하는 작품들. 생활 양식, 옷, 생활 방식, 인종, 동물, 배경이 되는 자연.


마지막 장에서는 근·현세대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예술 양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지침을 제시한다. 가장 크게 비트는 부분은 바로 ‘우리는 정적(靜的)이고 광고는 동적(動的)’이란 것이다. 우리가 광고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것. ‘광고는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하며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에서도 밝혔듯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관념은 주로 마케팅에 이용하는 작품들과 기법들에서 발견해낼 수 있는데, 이 책에서 권장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사진, 화보잡지를 들추어 보거나, 거리로 나가 상가의 진영창들을 구경한 다음 도판이 실린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를 들추어 보고 이같은 두 종류의 매체를 통해 얼마나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지 주목’해보는 것. 작가는 '충격적일 정도로 유사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 것이라 자신하며, '이같은 상호 연관성’은 ‘사용된 기호체계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느낌은 5장에 걸쳐 얘기한 유화의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 문장을 살펴보자.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 부분은 캐널라인 냅의 <욕구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만약에 내가 ~했다면'이란 생각으로 거식증을 앓거나, 더 많은 화장품을 사거나 하는 등 동경하는 모델을 따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인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1장에서 논의한 한 공간에 있는 여러 작품의 ‘동시성’에 대한 인식도 광고에 대입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콘트라스트’라는 말로 ‘광고의 본질에 대해’ 드러내보인다.

‘광고에서는 본질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고는 그것 이외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을 때만 효력이 있다. 광고에서 모든 진짜 사건들은 예외적인 일이고 남들에게나 생기는 일이다. 방글라데시의 사진을 볼 때 그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건들이 데리(Derry)나 버밍엄(Birmingham)과 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면, 그 콘트라스트는 그에 못지않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콘트라스트는 반드시 그 사건이 비극적이라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건이 비극적이라면, 그 비극은 그러한 콘트라스트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또한 만일 그 사건이 기쁜 일이었고, 직접적이고 상투적이 아닌 방식으로 찍혔다면 그 콘트라스트 역시 상당한 것이 될 것이다’.

아무리 내 나이의 학생들에게 벌어진 세월호 사건을 실시간으로 보며 충격을 받았고, 얼마전의 열차 탈선 사고가 당장 친한 친구에게 일어난 사고라 해도, 이태원에서 직접 겪었던 참사는 큰 트라우마가 되어 나에게 덮쳤던 걸 생각하면 집단 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게 콘트라스트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

이상 짧은 개인사 공유를 끝으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대한 독후감을 마무리할까 한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부터는 곧잘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가는 편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꼬드겨셔였을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모름지기 상경한 자의 특권은 문화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는지, 그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해외 여행을 가면 인근 유명 미술관엔 꼭 방문했기에 아마 후자가 그 목적에 더 가까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미술을 잘 모른다. 작품을 어떻게 보면 되는지 ,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게 회화 작품이 됐건, 설치 작품이 됐건, 영상물이 됐건 잘 몰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고집은 세서 오디오 가이드나 도슨트는 거르기 일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진정한 예술이란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알게된 건 개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는 정확하다. 과거의 내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단 것. 예술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 P9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 P11

있는 그대로의 실제 세계란 단순히 객관적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 P14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 P14

결국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 P15

아직은 할스가 살았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19

조금만 달리 보면 너무나 명백한 것을 쓸데없는 엉뚱한 설명으로 핵심을 흐려 놓는 데서 신비화는 비롯한다. - P20

인상파 화가들에게 가시적인 것은 (...) 끊임없는 유동 속에서 도망쳐 사라지는 것 (...) 입체파 화가들에게 (...) 그들이 묘사하는 (...) 주위의 여러 다른 각도에서 본 광경들을 한데 모은 전체를 가리켰다. - P2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예술은 상업보다는 더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기 떄문에― 시장 가격은 정신적인 가치의 반영으로 간주된다.
- P27

그림의 모든 요소들은 동시에 보이도록 그려졌다. (p.33)

그림 전체의 동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뒤바꾸거나 결론을 다시 내릴 수 있다.
- P33

한 이미지의 의미는 바로 그 옆에, 또는 바로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서 변하게 된다.
- P35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 P38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 P39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 P54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그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주는 일종의 표지(標識)로 읽을 수 있다. - P55

왕은 이를 여인의 복종의 증거로서 자랑하고, 그 그림을 보는 손님들은 왕을 부러워하게 된다. - P62

누드가 언제나 관슴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 P63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 P64

하지만 여자의 관심은 좀처럼 상대 남자를 향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림 바깥에 있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여자의 진짜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관객(소유자)을 쳐다본다.
- P66

성적 행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자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 P67

성적인 것을 감추지 않고 평범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 P74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P76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 P103

그림은 금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탐나는 물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했다.
- P106

그림 소유자의 재력과 일상의 생활방식이 실제로 어떠한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 P116

먼저 가난뱅이들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잘살 수 있다는 기대가 희망의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 P122

자연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 그럼에도 유화와 소유 재산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 - P123

앤드루스 부부가 자신들의 땅을 보며 느꼈던 즐거움 중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 즐거움은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때문에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 P127

우리는 액자 안에 든 유화가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 다시 생각해 보면, (...)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 P128

몇몇 예외적인 예술가들은 전통의 규범을 깨고 전통적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작품들을 생산해냈는데, 그러한 예술가들이 오히려 이 전통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가로 칭송되었다. 그러한 주장이 가능했던 것은,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 P129

위대한 예술가란 평생 투쟁을 해 온 사람이다.
- P129

화가는 장인으로서 그가 존중해야 한다고 배워 온 전통적 회화기법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싸움에 나서게 마련이다. - P129

우리는 정적(靜的)이고 광고는 동적(動的)이다.
- P151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전보다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 P152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54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 P155

사진, 화보잡지를 들추어 보거나, 거리로 나가 상가의 진영창들을 구경한 다음 도판이 실린 미술관의 전시 카탈로그를 들추어 보고 이같은 두 종류의 매체를 통해 얼마나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지 주목해보라. - P160

이 느낌이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P163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 P165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그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적인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 P168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 P172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 P173

콘트라스트가 광고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 주는가 (...) 광고에서는 본질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고는 그것 이외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을 때만 효력이 있다. 광고에서 모든 진짜 사건들은 예외적인 일이고 남들에게나 생기는 일이다. 방글라데시의 사진을 볼 때 그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건들이 데리(Derry)나 버밍엄(Birmingham)과 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면, 그 콘트라스트는 그에 못지않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콘트라스트는 반드시 그 사건이 비극적이라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건이 비극적이라면, 그 비극은 그러한 콘트라스트에 대해 우리의 도덕적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또한 만일 그 사건이 기쁜 일이었고, 직접적이고 상투적이 아닌 방식으로 찍혔다면 그 콘트라스트 역시 상당한 것이 될 것이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