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산책자 - 작가와 도시: 파리
에드먼드 화이트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5월
품절


파리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마흔세 살이었지만 청년처럼 기운이 넘쳤다. 그러나 파리를 떠날 때에는 어느덧 백발로 변하고 아래턱이 축 처진 환갑의 나이였다. 처음에 나는 오스테를리츠 역 근처의 센 강변을 따라, 외팔보를 강변까지 쭉 내민 건물 아래를 거닐었다. 때로는 내가 살던 생루이 섬 끝자락에 있는 아담한 공원의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수풀을 헤치며 걷거나, 침목하는 선박의 하갑판처럼 섬의 끝자락을 둘러싸고 있는 둑까지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하얀 담을 타고 치렁치렁 휘늘어진 담쟁이 덩굴을 볼 때 마다, 나는 에즈라 파운드Pound의 두 번째 <<칸토스>>에 실린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스 선박이 바다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붙들려 산으로 변해간다는 시구였다.

뱃전이 있던 곳을 이제 포도나무 줄기가 덮었구나,
밧줄은 덩굴손으로 변했고
노걸이는 포도나무 잎새가
노의 손잡이는 굵은 포도나무가 되었구나,
어디에서도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내 발목에,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유리에 갇힌 그림자 같은 야수들, 무의미한 것을 향해
털투성이 꼬리를 들썩이는 야수들.

나는 커다란 녹슨 고리들을 타고 부두까지 올라갔다. 그곳에 배가 정박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배들을 묶어두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무대의 조명만큼이나 밝은 아크등을 번쩍이며 유람선 무슈 호가 다가오면, 어둑한 부두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던 우리는 포옹을 풀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러나 나는 열정적인 근육질의 청년에게 다시 한 번 달려들고픈 욕망을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몇 번이나 그의 집에 데려갔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내게 알려준 것은 마레 지구의 한 저택에서 독일인 사업가의 애인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무척이나 닮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럼 나는 그의 불장난거리였던 것일까?-190-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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