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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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흔해빠진 스토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선영 작가의 장편소설 <지문>에 등장하는 범죄의 큰 줄기는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그리고 권력형 성폭력이다. 흔해빠졌다는 것은 그만큼 뉴스에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고, 그런만큼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안전사고라고 부르는 가정 내 사고들이 있다. 물을 끓이다가, 무거운 것을 들다가 생기는 생활사고들.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가정 내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사고들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믿어야 할 가정이라는 곳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학대는 피해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피해자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피해의 상처는 길고 오래간다. 그런 범죄들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외면한다면 우리는 방관자가 되는 것이고, 방관은 피해자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함께 지켜봐주고 폭력을 행사한 이들이 합당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감 진급을 앞두고 파트너로 일하던 팀장의 비리로 유원지 근처의 경찰소로 좌천을 당하게 된 규민은 발령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사자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을 하고, 바위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실종신고자들과 접촉하게 된다. 변사자의 대략적인 연령대와 성별 등을 고려했을 때 신고자는 변사자의 언니인 윤의현, 그리고 변사자는 오기현인 것으로 파악됐다. 성이 다른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러 온 의현의 모습에 규민은 알 수 없이 끌리게 되고, 그것과 별개로 바위에서 실족사 했다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은 여러가지 정황 때문에 자살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해가기 시작한다. 수사를 진행하면서 윤의현과 오기현의 부모가 이혼한 후 윤의현은 아버지와 함께 친가에 남고 오기현은 어머니를 따라 오기현의 계부인 오창기와 함께 살았다는 것, 내내 윤의현과 오기현은 왕래가 없다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모친에 의해 중학교 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오기현은 자신의 계부인 오창기를 끔찍이도 싫어했다는 것등을 파악하게 된다.

오창기는 마을 전체를 경제적으로 쥐고 흔들만큼 큰 화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마을 사람 그 누구도 감히 오창기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규민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결국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답은 의현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현은 무언가 감추는 기색이 완연했다. 의현은 동생의 죽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건 규민의 몫이 아니냐고 하면서도 은근히 기현의 죽음에 오창기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내색을 비쳤다. 오창기의 화원에는 눈이 먼 채 노예처럼 부려지는 사내 신명호가 있었고, 그런 그와 오창기의 관계를 폭로하려던 방송국PD도 있었다. 신명호를 찾아간 규민은 그가 기현을 사랑했었다는 걸 알았고, 기현을 바라보던 신명호의 눈빛을 질투한 오창기가 신명호의 눈을 멀게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기현의 죽음이 의문스러웠던 규민은 그녀의 부검을 권했고 부검결과에 따르면 그녀는 바위에서 투신한 것이 아니라 둔기에 의해 머리를 가격당해 죽임을 당했다. 이제 규민은 기현을 죽인 것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지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상처는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차마 다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깊다.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계부와 함께 살게 된 기현, 동네 사람들조차 오창기에게 기현은 딸이 아니라 여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의현이 출강하고 있는 대학교에서는 교수가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약도 먹고 정신과 치료도 받으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있는데 학교는 쉬쉬하며 사건을 축소하거나 자기들끼리 덮어버릴 생각만 하고 있다. 오창기는 어려서 혼자 된 어린 신명호를 거두어주었다는 명목으로 노예부리듯이 부리고,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사하며 그를 컨트롤해왔다. 사건을 수사하는 규민조차도 재혼한 아버지와 계모, 이복형제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얻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곁에는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을 상처 입힌 사람들 중에는 악질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상처를 낸 사람도 있고, 그저 모른 척 눈 감은 사람도 있다. 내가 상처를 낸 것이 아니니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상처받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결국 방관자도 상처 입힌 사람 중 하나다.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다. 간혹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나를 지키려고 한 행위가 오히려 범법 행위가 되어 자신을 가두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과연 법이라는 것이 약자를 지킬 수 있는 것인가 의심을 가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 분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분노하지 않는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만큼 추악한 범죄들이 나열되고 있지만 그 사건을 자세히 되짚어 독자들을 분노하게 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한 일이 있었다, 고 알려줄 뿐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집행관들>이라는 소설이 좀더 집단적이고도 국가적인 차원의 집행이었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집행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훨씬 더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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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 끊임없이 흔들리고 불안한 내 마음을 다스리는 삶의 기술
홀리 B. 로저스 지음, 신솔잎 옮김 / 빌리버튼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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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일 줄 미처 몰랐다.

<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中 12p

끊임없이 변화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얼마나 사람들이 평온해하고 싶어하는지는 '멍 때리기 대회' 같은게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들 바삐 살아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한 마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청소년들에게까지 꿈이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 10년 뒤 혹은 20년 뒤의 자신의 모습을 청사진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살아보니 어떻던가. 목표가 없어도 열심히 살 수 있고, 열심히 살다보니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도 없는게 인생 아니던가 말이다. 천연자원에 기댈만큼 땅덩이가 넓은 것도 아닌데 분단까지 된 우리나라에 자원이란 오로지 인적자원 뿐이고 그렇다보니 경쟁은 가속화되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달려서 뒤쫓는 사람들보다 앞서기 위해 날아가려고 애쓰고, 나는 사람들을 앞지르려다 보니 자기 능력치보다 더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되고, 그러다보니 스트레스는 점점 더 쌓여가고 나라 전체가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불행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사실 하나는 한번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후회하게 되는 것들은 대부분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했다거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거나, 아파트를 더 넓은 평수로 옮기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시 못했다거나 자신의 현재를 더 많이 즐기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결국 죽음 앞에 가서야 후회하게 될 그러한 것들을 하루에 10분씩, 그러다 조금씩 더 늘려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챙기면서 다스리다 보면 사는 동안 찾게 될까?

우리의 삶은 대단한 기적과도 같지만 각성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유한한 시간 동안만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여정 대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이것만 끝나면......'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면 삶에 온전히 몰입할 기회를 불확실한 먼 미래로 미루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中 26p

나는 자기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를 딴 사람 또는 사업을 잘해서 크게 성공한 사람, 혹은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쓴 책들에서 짚어주는 이야기들, 어떻게 해서 내가 학위를 땄는지, 사업에 성공했는지,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는지를 읽고 있자면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보다 못난 이유가 이거라는 건가?' 하는 불퉁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다. 그러면서 책들은 또 하나같이 노력하라고, 열심으로 포기하지 않고 달리다보면 나처럼 될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 그런 책들 앞에서 나는 항상 부족한 사람이고, 노력이 모자란 사람이고, 포기하는 사람이 된다.

'어떻게 하면 더욱 나아질까'만 생각하면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든 늘 부족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中 150p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애쓰는 마음이 욕심을 부르고, 욕심을 좇다 보면 오늘은 잊고 내일만 향하게 되고, 어찌해도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발버둥치다보면 현재를 즐기는 것은 요원해지고 만다. 그렇기에 이 책은 하루 단 10분만이라도 그저 생각이라는 것을 멈추고 긴 호흡을 하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어쩌면 아직까지도) 젊은 사람들에게서 불었던 YOLO (You Only Live Once) 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기보다는 자신을 중시하고 현재를 즐기라는 뜻에서 어쩌면 이 책의 모토와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를 너무 전투적으로 즐기다보면 그것 자체가 또 강박이 되는 수도 있다. 더 열심히, 더 신나게 현재를 즐겨야 한다는 강박 말이다. 행복은 좇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고, 평온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상을 즐기다보면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일테다.

행복을 미래에서 찾아선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서 찾아야 한다. 아침에 따뜻한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지극한 행복이다. 낯선 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미소가 더없는 행복이다. 행복은 드물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행복은 항상 이 순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발견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 되는 것이다.

<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中 226p

내 마음이 여유롭고 평온할 때서야 비로소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도 따뜻한 마음가짐을 할 수 있을 터~!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말이 들려올 수 있게 하는 '선한 영향력'이란 꼭 유명한 사람, 잘나고 돈이 많은 사람만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건넨 따뜻한 한마디가 내 아이를, 가족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간 그들이 그들의 친구에게 혹은 직장동료에게 건넨 따뜻함이 다른 가정으로, 회사로, 학교로 전달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당신의 수행이 모든 이에게 이롭기를'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어주었던 동화책에는 암탉이 슬퍼하는 돼지에게 자신이 낳은 알을 선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암탉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은 돼지는 도움이 필요한 다른 친구에게 달걀을 선물하고, 이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선물하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에는 달걀이 다시 원래 주인이었던 암탉에게 돌아왔다. 자신이 시작했던 관대한 마음과 친절함이 돌고 돌아 암탉은 결국 알에서 태어난 예쁜 병아리를 선물받았다. 작은 선물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끝없이 전달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려 깊은 행동과 관대한 마음이 긍정적인 변화를 연쇄적으로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루 10분 마음챙김으로 나를 바꾸는 법> 中 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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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조각 (겨울 한정 스페셜 에디션) - 불완전해서 소중한 것들을 위한 기록, 개정 증보판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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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말랑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요를 들으면 가사가 다 내 이야기 같고,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날에는 희뿌연 하늘에 떠있던 달을 보다 눈물이 나기도 했던 그런 시절.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카톡 대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동전을 넣고 전화를 하고, 더 넣을 동전이 없으면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다 말하던 중간에 뚜뚜뚜뚜 하고 전화가 끊기던 시절. 삐삐에 숫자로 된 암호를 남기고 크리스마스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방학이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손편지를 쓰던 그런 시절. 누구나 젊은 시절은 다이내믹하다.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라 그렇고 완성을 향해서 달리는 시기라 그렇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 인생의 목표는 이제 크게 없고 '우리' 혹은 '우리 가족'의 목표를 두고 살고 있달까. 아이가 입시를 치르기 전까지는 입시를 잘 마치는게 목표였고, 지금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 남편의 합격도 우리 가족의 목표 중 하나이다. 결국 오롯이 나 혼자만의 인생목표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내 인생이 젊은 시절처럼 다이나믹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하는 일상의 작고 희미한 것들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무뎌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드라마를 고를 때도 연애하는 드라마는 패스한다. 연애세포를 살려서 쓸데도 없고, 내 감정을 너무 많이 소모해야 하는 '연애'라는 것이 이제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달의 조각>이라는 이 에세이는 딱 내가 스무살부터 서른살까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책이었다. 지금도 본가에 있는 내 오래된 상자를 열면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이 하나 가득이고(심지어 그 안엔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이 복사본으로 들어 있다. 나중에 내가 무슨 말을 써서 보냈는지 확인하려고 복사해서 보관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무섭다) 구닥다리 PC에 넣는 플로피 디스크에는 시집을 내겠다며 써놓은 얼굴 화끈거리는 시들이 몇 백편쯤 들어 있다. 혼자이긴 싫지만 그렇다고 무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건 더 싫었던 시절의 나를 오글거리는 말들로 포장해두고 '시'라고 불렀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 중 가장 바빴고, 부지런했고, 치열했고, 열심이었고, 아팠고, 많이 웃었고 또 많이 울었던 10년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는 공유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에 관한 부분들은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아, 난 이제 이런 생각을 하기엔 너무 나이 들었나봐 하고 웃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내 앞의 그가 어른이기보다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혹은 겨울보단 여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사람이 되고 보니 내 앞의 그는 철든 어른이었으면 좋겠고, 불쾌지수를 올리지 않는 겨울인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생일 선물로 비싼 게이밍용 의자를 사달라고 조르고, 학자금 대출이라는 걸 받지 않아도 되고,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캐나다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가겠다고 해도 '오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이런 말랑한 에세이를 읽기엔 너무 늙은건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잠깐 내 청춘을 추억해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교복 입은 내 모습이 가물가물해진 지금, 나는 이제 어떤 무리에 속하려 애쓰지 않는다. ‘이상한 애‘가 되는 일이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어떤 무리가 아닌 나에게 소속되고 싶다. - P27

때로 사랑은 그 대상을 해치기도 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에 바짝 다가가 좁혀진 거리가 숨을 턱 막히게 하기도 하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전한 뜨거운 관심은 연약한 마음에 화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온도의 애정을 주어야 한다고, 어린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열대어는 말했습니다. - P35

친근함의 표현이 때로는 무례함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상대를 위한 배려가 떄로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음은 언제나 알다가도 모르겠고, 인연은 실보다도 가늘어서 잠깐 방심한 사이 뚝 끊어지고 만다. - P38

정말 반가운 것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포근함이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마음 한 조각 떠내는 일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계절. 한동안 쓰지 않았던 손편지를 쓰게 되는 계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절. 수많은 시작과 끝, 그 설렘과 아련함이 공존하는 계절. - P52

적어도 내 앞에서는 어른보단 아이였으면 좋겠고, 겨울보단 여름이었으면 좋겠어요 - P97

학원비가 올랐다는 소식을 아무렇지 않게 집에 전할 수 있는 친구, 비싼 노트북을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친구,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한 절차를 모르는 친구, 아르바이트 대신 배낭여행으로 방학을 보낼 수 있는 친구, 나에게는 부러운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 P106

세상의 수많은 취향과 가치관 앞에서도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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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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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전쟁이 없었다면 그 많은 소설들과 영화와 같은 창작물들은 무엇으로 대체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종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욕심'이라는 걸 부리는 종이고 그러한 결과물이 전쟁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비극적인 사태들과 결론들을 인간 특유의 감성으로 승화시키는 종이라는 생각도 든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전쟁은 그야말로 세계사를 거론할 때 끊임없이 회자될 부분이고 그들이 벌인 만행들은 아무리 많은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보고 들어도 그 끔찍하고 잔혹함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들의 고통을 주로 다뤘다면 이 <여행자>라는 작품은 특이하게도 이제 막 시작된 유대인들의 박해로부터 자신의 몸을 움직여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고문하는 나치도 가스실로 들어가는 유대인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급변하기 직전 몸을 피하기 시작한 질버만이라는 남자가 시작한 불안한 여행과 세상과 함께 변하기 시작하는 질버만의 의식의 흐름이 얼마나 불안정해지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규모있는 사업을 하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질버만은 유대인이지만 누가 봐도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이고, 자신 스스로도 '독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아내는 아리아인이고 하나뿐인 아들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프랑스로 떠나 있었다. 1938년,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이 유대인 상점을 깨부수고 약탈한 '수정의 밤' 이후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한 세상은 질버만의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 감지되기 시작한다. 집을 사겠다고 찾아 온 핀들러라는 독일인은 헐값에 집을 넘겨받으려고 수를 쓰기 시작하고 질버만은 아직 자신이 유대인, 이라기보다는 독일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화를 내지만 갑작스럽게 유대인을 잡아들이기 위해 들이닥친 젊은이들에게 쫓겨 도주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생각이라는 걸 이제 더는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습관을 버렸어요. 모든 것을 견디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행자> 중 20 p

전쟁을 시작한 위정자는 스스로의 신념이라는 걸 가졌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타당한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맹목적인 추종으로 시작된 과잉충성이 있었는가 하면 핀들러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시소의 양쪽끝처럼 그저 누군가가 이익을 얻는 동안 반대쪽의 누군가는 이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유대인에 대한 불합리한 폭력을 그냥 눈감아 버린 사람들이 대다수가 아닐까? 혹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전에 없던 이익이 생기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린 건 아닐까?

나는 아내와 딸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사업상 거래를 하고요. 그게 다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관심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능한 사업가라는 점에는 감탄하지요. 그들이 뭔가 부당한 일을 겪는다면 유감이긴 하지만 놀라지는 않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래요. 한쪽이 파산하면 다른 쪽은 성공하는 법입니다.

<여행자> 중 30 p

자네가 주어진 상황을 이용했듯, 나 역시 지금 상황에서 나의 장점을 이용하는 것뿐일세. 그게 다야.

<여행자> 중 111 p

저쪽은 모두 예전 친구인데, 당신은 홀로 앉아 있다고 생곡해보세요. 당신과 뭔가 함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그들 중 한 명을 만나면, 그가 모른 척하는 모습을 안 보려고 당신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고 말이지요. 저는 어디로고 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또 속을 끓일 거라고 늘 생각했지요. 저 아이와는 함께 학교에 다녔고, 또 다른 사람과는 직업교육을 받았거나 단골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지금은 당신이 형체도 없는 공기가 된 겁니다. 나쁜 공기요!

<여행자> 중 170 p

기차에 유대인이 너무 많군.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이러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텐데. 당신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을 때문에 내가 불행 공동체에 빠져버렸잖아! 나는 보통 독일 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지만, 당신들은 정말 다를지도 몰라.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그래,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쫓기지고 않을 거야. 평범한 시민으로 살 수 있을 텐데. 당신들 존재 때문에 나는 뿌리 뽑힐 거야. 우리는 서루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지!

<여행자> 중 251 p

그냥 계속 움직일 겁니다. 그 이상은 나도 몰라요. 공격 당하기 전까지. 돌격대가 나를 멈춰 세울 때까지 그저 여행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으니, 멈춰 세우기도 할 겁니다.

<여행자> 중 268 p

난 이제 불평하면 안 돼. 방금 나는 베커와 핀들러, 홀베르크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어. 이제 나는 도덕적으로 분노할 자격조차 없어. 그럴 권리를 경솔한 짓으로 잃어버렸지. 어서 달려가 저 노인을 잡아야 하는데.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사악한 내 말이 어쩌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용기를 빼앗았는지도 몰라. 나 자신도 예민하면서 또 이렇게 잔인하구나. 이렇게 앉아서 그가 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를 떼어낸 걸 기뻐하고 있다니.

여행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안한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던 질버만은 자신의 전재산이 담긴 돈가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더이상 희망적인 상황을 꿈꿀 수 없게 되자 그는 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잃어버린 것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결국 질버만은 애초에 자신의 여행을 시작하게 한 것이 국가였다면 자신을 멈추게 할 것도 국가 뿐이라는 생각에 파출소로 가려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자신에게 네덜란드로 가자고 제안했던 이를 찾아가지만 그와 함께 파출소로 연행되고 그렇게 그의 여행은 끝이 난다.

여행이 설레고 즐거운 것은 결국 여행이 끝난 후 돌아갈 곳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끝이 없는 여행이란 마냥 지치는 일이다. 인간이란 삶이라는 여정 속에서 어딘가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정착하기를 소원한다. 그런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질버만이라는 남자가 시작한 여행이란 얼마나 슬프고도 고된 것인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언제 만나게 될 수 있을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집이라는 곳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들킬까 두려워 아는 사람을 만나고도 마음 놓고 반가워할 수도 없다.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유대인이 자기 가까이에 머무는 것이 불안하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저 수많은 유대인들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할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역겨우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독일을 떠나보기 위해 국경까지 넘어갔다가 결국은 다시 독일로 돌아온 뒤 하염없이 독일 내 기차를 타고 배회하던 질버만은 결국 그렇게 독일 내에서 강제로 여행을 끝마쳐야 했고 그 여행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돈가방과 함께 이성까지도 함께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27세의 젊은 유대인 작가가 '수정의 밤' 사건을 경험한 뒤 도망 다니는 와중에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극중 질버만이 경험한 독일 내 유대인의 불안감과 공포의 공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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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 사랑하면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에 지친 너에게
정민지 지음 / 빌리버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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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혼자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결국 아주 혼자서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된 남자가 한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주고 윌슨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자신이 만든 뗏목에서 윌슨을 잃어버렸을 때 마치 자기의 피붙이라도 잃어버린 양 울부짖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살아내고자 하는 그의 생존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아마도 그 긴 시간동안 그에게 윌슨이라는 상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 무인도를 무사히 탈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의 삶에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윌슨과의 관계가 그토록 절절하고 애틋할 수 있었던데는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건 바로 윌슨이 배구공이라는 사실이다. 배구공은 대답을 하지 않고 먼저 위로의 말을 걸어주지도 않는 대신 그의 말에 반대도 하지 않으며 비아냥 거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는 늘 필요하다.


우리는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고 싶어 한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21


결혼을 하고 늘 해외로 떠도는 직업을 가진 배우자와 살면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시댁이 있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내가 아들과 함께 해외로 떠나게 되면서 물리적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감정적으로는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 때는 전화도 자주 하길 바라시고 주말이면 손자를 데리고 와주길 바라시고 그 바람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김없이 목소리 톤이 달라지곤 하셨는데 태평양을 건너가 있으니 한두달이 넘도록 전화가 없다가도 전화를 하면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고마워하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목소리가 달라지시니 기브 앤 테이크라고 좋은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이 내 결혼기간 중에 가장 시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던 때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부모님과 차로 장장 네 시간 반 거리에 떨어져 산다.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24


우리 말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난 어려서부터 이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싱어게인>에서 우승한 30호 가수가 자신을 가리켜 '배 아픈 가수'라고 했을 때 어, 난데? 하고 생각했었다. 비슷비슷한 능력치도 아닌데 무척이나 잘난 사람을 보면 배가 아팠고,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너무 잘되거나 하면 더 배가 아팠다. 그래서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의 SNS는 아예 끊어버리고 안 본 적도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업의 면접까지 통과한 친구가 형식에 불과하다던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날, 아주 가까운 친구라는 이가 그 직업을 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난 뒤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기란 저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라고 절실하게 깨달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혼자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결국 아주 혼자서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혼자 남게 된 남자가 한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주고 윌슨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자신이 만든 뗏목에서 윌슨을 잃어버렸을 때 마치 자기의 피붙이라도 잃어버린 양 울부짖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살아내고자 하는 그의 생존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아마도 그 긴 시간동안 그에게 윌슨이라는 상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 무인도를 무사히 탈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의 삶에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윌슨과의 관계가 그토록 절절하고 애틋할 수 있었던데는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건 바로 윌슨이 배구공이라는 사실이다. 배구공은 대답을 하지 않고 먼저 위로의 말을 걸어주지도 않는 대신 그의 말에 반대도 하지 않으며 비아냥 거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는 늘 필요하다.



우리는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고 싶어 한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21


결혼을 하고 늘 해외로 떠도는 직업을 가진 배우자와 살면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시댁이 있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내가 아들과 함께 해외로 떠나게 되면서 물리적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감정적으로는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 때는 전화도 자주 하길 바라시고 주말이면 손자를 데리고 와주길 바라시고 그 바람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김없이 목소리 톤이 달라지곤 하셨는데 태평양을 건너가 있으니 한두달이 넘도록 전화가 없다가도 전화를 하면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고마워하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목소리가 달라지시니 기브 앤 테이크라고 좋은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이 내 결혼기간 중에 가장 시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던 때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부모님과 차로 장장 네 시간 반 거리에 떨어져 산다.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24


우리 말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난 어려서부터 이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싱어게인>에서 우승한 30호 가수가 자신을 가리켜 '배 아픈 가수'라고 했을 때 어, 난데? 하고 생각했었다. 비슷비슷한 능력치도 아닌데 무척이나 잘난 사람을 보면 배가 아팠고,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너무 잘되거나 하면 더 배가 아팠다. 그래서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의 SNS는 아예 끊어버리고 안 본 적도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기업의 면접까지 통과한 친구가 형식에 불과하다던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날, 아주 가까운 친구라는 이가 그 직업을 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난 뒤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기란 저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라고 절실하게 깨달았다.


결정적일 때 우리는 언제나 혼자다. 친구는 위기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지 않았다고 진짜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때는 그저 혼자서 견뎌야 하는 순간일 뿐이다.

진짜 친구는 이래야 한다, 는 식의 이상적인 정의를 느슨하게 내려놓고 기대치를 낮춰보자. 친구는 낯익은 타인이다.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보험같은 존재가 아니다. 각가의 삶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첫 단추다. 나 이외의 것중에서 바꿀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환경도 그렇고,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틈을 만들어내야 한다. 너그러움이라는 숨쉴 틈을.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71~72


역시 남자든 여자든 우정 앞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남의 슬픔에는 공감하고 도와주려고 하지만, 좋은 일에 정말 마음속 깉이 기뻐해주기는 쉽지 않다. 특히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일이거나 한 분야에 같이 몸담고 있는데 친구가 잘 되는 걸 보는 건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질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86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오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어쩌면 기억의 오류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와 그의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가 기억하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 토니는 토니만을 위한 기억을 가졌고 그 기억은 토니 자신을 위해 윤색되었다. 아마 베로니카가 가진 기억도 역시 베로니카 자신을 위해 무언가 더해지고 덜어졌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에게 함부로 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내가 보고 듣지 않은 이야기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말자라고 늘 다짐하게 된다. 비록 내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어떤 사실을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 그 상황은 내 감정과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늘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아니 애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옳을테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둘이서 똑같은 경험을 해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다. 둘이서 느끼는 방식과 강도 역시 같을 수 없다. 그저 각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97


'정상적'이라는 기준을 세우고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스스로가 정의내린 기준에서 빗겨 있는 타인에 대해 쉽게 공격적일 수 있다. (중략)내가 기준선을 좁게 긋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 일로 다시 한번 느꼈다. 낯선 타인에 대해서 판단의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이 되자. 우야든동 깨달음의 원천이 되는 타인에 대하여.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 142


나 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수도 나쁜 사람일수도 있는 면을 가졌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 다른 얼굴을 하고 흔들리는 가치관에 놀랄 수도 있다. 저자가 초반에 밝혔듯이 '낯선' 타인이 아니라 '낯익은' 타인들에 대한 이야기, 나 자신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는 타인일 뿐이라는 고백이라는 이 책에는 내가 평소 생각했던 인간관계, 그리고 관계와 관계 사이의 거리에 대한 수많은 공감대들이 있었다. 흔히 '오지랖'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들이 가끔은(혹은 자주) 가까운 사이 특히 가족이나 친구라는 이름의 관계들을 해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참 많다.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모두 타인이며, 타인이되 가까운 낯익은 타인들이 주는 상처는 낯선 타인이 주는 상처보다 훨씬 더 깊고 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배려가 부족했던 내 가족들에게 오늘 '배려'를 선물로 줘야겠다.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전부 아니면 전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 사람이 선과 악 중에서 오로지 하나의 모습일 뿐이라는 건 나만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일 뿐. 안 좋은 타이밍과 판단 착오와 고정관념이 뒤엉켜서 나온 감정일 수 있다. 조직 안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나 역시 정의롭다가도 비굴하고, 냉장하다는 말을 듣고 인정에 약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낯익은 타인을 대하는 법> 中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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