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조각 (겨울 한정 스페셜 에디션) - 불완전해서 소중한 것들을 위한 기록, 개정 증보판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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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말랑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요를 들으면 가사가 다 내 이야기 같고, 술이라도 한 잔 걸친 날에는 희뿌연 하늘에 떠있던 달을 보다 눈물이 나기도 했던 그런 시절.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카톡 대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동전을 넣고 전화를 하고, 더 넣을 동전이 없으면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다 말하던 중간에 뚜뚜뚜뚜 하고 전화가 끊기던 시절. 삐삐에 숫자로 된 암호를 남기고 크리스마스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방학이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손편지를 쓰던 그런 시절. 누구나 젊은 시절은 다이내믹하다.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라 그렇고 완성을 향해서 달리는 시기라 그렇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 인생의 목표는 이제 크게 없고 '우리' 혹은 '우리 가족'의 목표를 두고 살고 있달까. 아이가 입시를 치르기 전까지는 입시를 잘 마치는게 목표였고, 지금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 남편의 합격도 우리 가족의 목표 중 하나이다. 결국 오롯이 나 혼자만의 인생목표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내 인생이 젊은 시절처럼 다이나믹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하는 일상의 작고 희미한 것들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무뎌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드라마를 고를 때도 연애하는 드라마는 패스한다. 연애세포를 살려서 쓸데도 없고, 내 감정을 너무 많이 소모해야 하는 '연애'라는 것이 이제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달의 조각>이라는 이 에세이는 딱 내가 스무살부터 서른살까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책이었다. 지금도 본가에 있는 내 오래된 상자를 열면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이 하나 가득이고(심지어 그 안엔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이 복사본으로 들어 있다. 나중에 내가 무슨 말을 써서 보냈는지 확인하려고 복사해서 보관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무섭다) 구닥다리 PC에 넣는 플로피 디스크에는 시집을 내겠다며 써놓은 얼굴 화끈거리는 시들이 몇 백편쯤 들어 있다. 혼자이긴 싫지만 그렇다고 무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건 더 싫었던 시절의 나를 오글거리는 말들로 포장해두고 '시'라고 불렀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인생 중 가장 바빴고, 부지런했고, 치열했고, 열심이었고, 아팠고, 많이 웃었고 또 많이 울었던 10년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는 공유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에 관한 부분들은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아, 난 이제 이런 생각을 하기엔 너무 나이 들었나봐 하고 웃기도 했다. 젊은 시절엔 내 앞의 그가 어른이기보다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혹은 겨울보단 여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사람이 되고 보니 내 앞의 그는 철든 어른이었으면 좋겠고, 불쾌지수를 올리지 않는 겨울인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생일 선물로 비싼 게이밍용 의자를 사달라고 조르고, 학자금 대출이라는 걸 받지 않아도 되고,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캐나다에 있는 친구를 보러 가겠다고 해도 '오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제 이런 말랑한 에세이를 읽기엔 너무 늙은건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잠깐 내 청춘을 추억해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교복 입은 내 모습이 가물가물해진 지금, 나는 이제 어떤 무리에 속하려 애쓰지 않는다. ‘이상한 애‘가 되는 일이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어떤 무리가 아닌 나에게 소속되고 싶다. - P27

때로 사랑은 그 대상을 해치기도 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에 바짝 다가가 좁혀진 거리가 숨을 턱 막히게 하기도 하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전한 뜨거운 관심은 연약한 마음에 화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온도의 애정을 주어야 한다고, 어린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열대어는 말했습니다. - P35

친근함의 표현이 때로는 무례함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상대를 위한 배려가 떄로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음은 언제나 알다가도 모르겠고, 인연은 실보다도 가늘어서 잠깐 방심한 사이 뚝 끊어지고 만다. - P38

정말 반가운 것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포근함이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저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마음 한 조각 떠내는 일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계절. 한동안 쓰지 않았던 손편지를 쓰게 되는 계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절. 수많은 시작과 끝, 그 설렘과 아련함이 공존하는 계절. - P52

적어도 내 앞에서는 어른보단 아이였으면 좋겠고, 겨울보단 여름이었으면 좋겠어요 - P97

학원비가 올랐다는 소식을 아무렇지 않게 집에 전할 수 있는 친구, 비싼 노트북을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친구,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한 절차를 모르는 친구, 아르바이트 대신 배낭여행으로 방학을 보낼 수 있는 친구, 나에게는 부러운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 P106

세상의 수많은 취향과 가치관 앞에서도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고 싶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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