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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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전쟁이 없었다면 그 많은 소설들과 영화와 같은 창작물들은 무엇으로 대체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종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욕심'이라는 걸 부리는 종이고 그러한 결과물이 전쟁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비극적인 사태들과 결론들을 인간 특유의 감성으로 승화시키는 종이라는 생각도 든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전쟁은 그야말로 세계사를 거론할 때 끊임없이 회자될 부분이고 그들이 벌인 만행들은 아무리 많은 영화와 소설,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보고 들어도 그 끔찍하고 잔혹함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들의 고통을 주로 다뤘다면 이 <여행자>라는 작품은 특이하게도 이제 막 시작된 유대인들의 박해로부터 자신의 몸을 움직여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고문하는 나치도 가스실로 들어가는 유대인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급변하기 직전 몸을 피하기 시작한 질버만이라는 남자가 시작한 불안한 여행과 세상과 함께 변하기 시작하는 질버만의 의식의 흐름이 얼마나 불안정해지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규모있는 사업을 하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질버만은 유대인이지만 누가 봐도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이고, 자신 스스로도 '독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남자였다. 아내는 아리아인이고 하나뿐인 아들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프랑스로 떠나 있었다. 1938년,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이 유대인 상점을 깨부수고 약탈한 '수정의 밤' 이후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한 세상은 질버만의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 감지되기 시작한다. 집을 사겠다고 찾아 온 핀들러라는 독일인은 헐값에 집을 넘겨받으려고 수를 쓰기 시작하고 질버만은 아직 자신이 유대인, 이라기보다는 독일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화를 내지만 갑작스럽게 유대인을 잡아들이기 위해 들이닥친 젊은이들에게 쫓겨 도주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생각이라는 걸 이제 더는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습관을 버렸어요. 모든 것을 견디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행자> 중 20 p

전쟁을 시작한 위정자는 스스로의 신념이라는 걸 가졌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타당한 신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맹목적인 추종으로 시작된 과잉충성이 있었는가 하면 핀들러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시소의 양쪽끝처럼 그저 누군가가 이익을 얻는 동안 반대쪽의 누군가는 이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유대인에 대한 불합리한 폭력을 그냥 눈감아 버린 사람들이 대다수가 아닐까? 혹은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전에 없던 이익이 생기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린 건 아닐까?

나는 아내와 딸을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사업상 거래를 하고요. 그게 다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관심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능한 사업가라는 점에는 감탄하지요. 그들이 뭔가 부당한 일을 겪는다면 유감이긴 하지만 놀라지는 않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래요. 한쪽이 파산하면 다른 쪽은 성공하는 법입니다.

<여행자> 중 30 p

자네가 주어진 상황을 이용했듯, 나 역시 지금 상황에서 나의 장점을 이용하는 것뿐일세. 그게 다야.

<여행자> 중 111 p

저쪽은 모두 예전 친구인데, 당신은 홀로 앉아 있다고 생곡해보세요. 당신과 뭔가 함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신이 그들 중 한 명을 만나면, 그가 모른 척하는 모습을 안 보려고 당신이 먼저 고개를 돌린다고 말이지요. 저는 어디로고 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또 속을 끓일 거라고 늘 생각했지요. 저 아이와는 함께 학교에 다녔고, 또 다른 사람과는 직업교육을 받았거나 단골 술집에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지금은? 지금은 당신이 형체도 없는 공기가 된 겁니다. 나쁜 공기요!

<여행자> 중 170 p

기차에 유대인이 너무 많군.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이러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텐데. 당신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거라고. 당신을 때문에 내가 불행 공동체에 빠져버렸잖아! 나는 보통 독일 사람과 다른 점이 전혀 없지만, 당신들은 정말 다를지도 몰라.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그래,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쫓기지고 않을 거야. 평범한 시민으로 살 수 있을 텐데. 당신들 존재 때문에 나는 뿌리 뽑힐 거야. 우리는 서루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지!

<여행자> 중 251 p

그냥 계속 움직일 겁니다. 그 이상은 나도 몰라요. 공격 당하기 전까지. 돌격대가 나를 멈춰 세울 때까지 그저 여행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으니, 멈춰 세우기도 할 겁니다.

<여행자> 중 268 p

난 이제 불평하면 안 돼. 방금 나는 베커와 핀들러, 홀베르크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어. 이제 나는 도덕적으로 분노할 자격조차 없어. 그럴 권리를 경솔한 짓으로 잃어버렸지. 어서 달려가 저 노인을 잡아야 하는데. 함께 있어야 할 텐데. 사악한 내 말이 어쩌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용기를 빼앗았는지도 몰라. 나 자신도 예민하면서 또 이렇게 잔인하구나. 이렇게 앉아서 그가 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를 떼어낸 걸 기뻐하고 있다니.

여행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안한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던 질버만은 자신의 전재산이 담긴 돈가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더이상 희망적인 상황을 꿈꿀 수 없게 되자 그는 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잃어버린 것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결국 질버만은 애초에 자신의 여행을 시작하게 한 것이 국가였다면 자신을 멈추게 할 것도 국가 뿐이라는 생각에 파출소로 가려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 자신에게 네덜란드로 가자고 제안했던 이를 찾아가지만 그와 함께 파출소로 연행되고 그렇게 그의 여행은 끝이 난다.

여행이 설레고 즐거운 것은 결국 여행이 끝난 후 돌아갈 곳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끝이 없는 여행이란 마냥 지치는 일이다. 인간이란 삶이라는 여정 속에서 어딘가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정착하기를 소원한다. 그런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질버만이라는 남자가 시작한 여행이란 얼마나 슬프고도 고된 것인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언제 만나게 될 수 있을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게다가 집이라는 곳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고,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들킬까 두려워 아는 사람을 만나고도 마음 놓고 반가워할 수도 없다.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유대인이 자기 가까이에 머무는 것이 불안하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저 수많은 유대인들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할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역겨우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독일을 떠나보기 위해 국경까지 넘어갔다가 결국은 다시 독일로 돌아온 뒤 하염없이 독일 내 기차를 타고 배회하던 질버만은 결국 그렇게 독일 내에서 강제로 여행을 끝마쳐야 했고 그 여행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돈가방과 함께 이성까지도 함께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27세의 젊은 유대인 작가가 '수정의 밤' 사건을 경험한 뒤 도망 다니는 와중에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극중 질버만이 경험한 독일 내 유대인의 불안감과 공포의 공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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