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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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도 같은 표지에는 초록색 눈을 가진 이국적인 매력의 영매 조즈카 히스이가 그려져 있다. 인형같은 외모에 순진하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살인이 일어난 장소에 가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정보를 분석해 과학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소설가인 고게쓰 시로의 일이었다. 고게쓰의 여자 후배였던 유이카의 부탁으로 처음 히스이를 만나게 되었고, 영매니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낸다는 것이니 하는 것은 하나도 믿지 않았지만 히스이의 신비로운 느낌과 고게쓰와 유이카의 직업 등을 어떠한 정보도 없이 알아맞추는 것을 보고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불안한 꿈에 시달리던 유이카가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낌 히스이가 유이카를 죽인 살인범을 찾는데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고 고게쓰를 설득하면서 둘은 하나의 팀 비슷한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렇게 경찰을 도와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두 사람이 팀이 되어 해결한 세 건의 살인사건이 단편추리소설의 형태로 들어 있다. 히스이가 영혼을 불러내어 알게 된 정보들은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법적인 효력도 없기에 그녀가 지목한 범인을 고게쓰가 논리와 근거에 맞게 짜맞추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셜록 홈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짜릿함을 주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던 두 사람이 마지막에는 최근 몇 년간 간토 지방을 뒤흔든 연쇄살인마를 잡겠다고 나선다. 히스이가 스스로에 대해 예언한대로 그녀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독자들은 그녀가 결국은 연쇄살인마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긴장하게 되는데, 정작 그 긴장감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긴장감은 놀람으로 변한다.


미스터리 추리물들의 특성상 반전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가들에게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흔해빠진 반전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고 반전없이도 촘촘한 사건의 구성과 해결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큰 만족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반전이 꼭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매탐정 조즈카>를 읽다가 마지막에 만난 이 반전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놀람이었다. 잘 짜여진 미스터리와 반전에 재미까지 세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이 작품이 미스터리 차트 5관왕이 되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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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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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요일이고 야구 낮경기가 있는 날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현재 연패중이고 그 연패까지 오는 동안 경기의 질이 좋지 않았고(지는 경기에 질이 좋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흔히 말하는 '졌잘싸'와 같은 경기는 졌지만 질이 좋은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선수들의 분위기는 영 엉망인 듯 보였다. 심지어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야구를 보고 있는 내 컨디션까지 바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만큼은 지지 말아야지, 지면 안되는 거지, 하고 나왔겠지만 경기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1회부터 어이없는 실수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경기의 흐름은 급격하게 상대팀으로 넘어가고 우리팀의 사기는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3회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나는 아, 오늘도 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화도 나고 실망도 되고 아무튼 여러가지 기분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요일인데, 이처럼 여유로운 한낮인데 야구 때문에 기분이 최악으로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차라리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머리의 한 부분은 어차피 야구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는 소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읽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한 티셔츠들을 모아, 그 티셔츠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엮은 책 <무라카미 T>는 지금의 내 상태에 어쩌면 딱 알맞는 책이었다.

Keep calm 으로 시작하는 문구들의 뒤는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게 여러가지로 변형되어 적용되고 있는데 원래는 'Keel calm and Carry on'이라는 문구가 그 시작으로 영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개월 전인 1939년에 대규모 공중 폭격이 예고되자 영국 정보부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패닉 발생을 막기 위해 만든 포스터의 문장이었다고 한다. '평정을 유지하고 일상생활을 계속하자'라는 뜻인데 하루키의 책을 홍보하려고 출판사에서 그 문장을 패러디하여 'Keep calm and read Murakami'라고 적힌 티셔츠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오늘의 나이다. 야구경기를 보고 평정심을 잃은 나.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Keep calm 하고 그리고 '무라카미 T'를 읽는 일~!

내 티셔츠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고양이 그림이 너무 귀엽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입을 수는 없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세상이 술렁거리고 어수선할 때 차분하게 앉아 독서에 정진하라는 뜻이 아주 좋다. 부디 꼭 그래 주십시오.

<무라카미 T> 中 42p

여태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에세이들과는 다르게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나 줄거리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저 어느 샌가 상당히 많아진,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쌓인 하루키의 티셔츠들에 대한 이야기들일 뿐이다. 하루키 본인이 가장 즐겨입는 옷이 티셔츠이기 때문에 많이 사기도 했고 달리기를 하는 동안 혹은 강연을 하거나 재직한 대학에서 구매했거나 기념품으로 받은 티셔츠들이 많기도 했다는 것. 티셔츠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T모양의 심플한 옷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이미 특별할 것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색깔과 느낌의 티셔츠가 있다. 같은 무지 티셔츠라 할지라도 무채색의 티셔츠가 있는가 하면 네온색의 티셔츠도 있다. 프린팅 된 그림도 귀여운 그림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의 시선을 확 끄는 강렬한 느낌의 그림도 있다. 새겨진 문자열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있고 명언에 가까운 좋은 글귀가 있는가 하면 '욕'이 씌여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똑같이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그 티셔츠를 고르는 사람의 취향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예일이라는 글자가 프린팅 된 학교 티셔츠를 가지고 있지만 입지는 못한다는 하루키.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의 티셔츠는 입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그 학교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봐 조심스럽다는 하루키. 상당히 귀여운 동물이 그려진 티셔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나 귀여운 것과 나와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어서 입지는 못한다는 글들을 보면서 이전의 에세이에서 받았던 '하루키'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어지간하면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사람!

입을 수 있는 티셔츠와 입지 못하는 티셔츠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결국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거죠. 되도록 숨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걸어 다닐 대도, 서점에 잘 때도, 디스크 유니온에 갈 대도 누구 눈에 띄는 게 거북해요. 티셔츠를 입는 건 괜찮은데 시선을 끌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제한적이에요. 티셔츠 자체는 멋진데 개인적으로는 입지 못하는 게 꽤 있습니다. 우선 메세지가 있는 티셔츠를 못 입어요.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읽으니까(웃음). 읽고 있으면 정말 민망하죠.

<무라카미 T> 中 180p

나도 오늘 티셔츠를 입고 있다. 집에서든 어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곳으로 나갈 때든 가장 편안한 옷이 티셔츠니까. 내 티셔츠에는 'I'd rather be outside'라고 씌여져 있다. 어제 이 티셔츠를 입은 나를 보고 아들이 그랬다.

"너무 엄마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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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쏘다 반니산문선 4
조지 오웰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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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와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를 읽기 전에 장강명 산문집 <책, 이게 뭐라고>를 읽은 건 어떤 전조였을까? 세상을 향해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임무를 자신에게 지운 2000년대 한국의 장강명이라는 작가와 1900년대 영국의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는 시대도 다르고 태어난 나라와 환경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엔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생각을 품었었기에 사회를 비판하고 전체주의의 종말을 묘사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에세이였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립예비학교에 들어 갔지만 그곳에서 상류층 아이들과의 차별을 겪으며 우울한 시절을 보냈고, 19살의 나이에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미얀마에서 대영제국의 경찰로 5년간 근무했지만 영국제국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을 뿐이었다.

삶이란 본디 층층이 위계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옳은 일이었다. 강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이길 자격이 있었고, 그래서 늘 이겼다. 또 약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져도 쌌고, 그래서 늘, 끊임없이 지기만 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17p

어린 나이에 자신의 위치가 정해져버린 오웰에게 진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혹은 무언가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늘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오웰은 자신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믿었다.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불쾌한 사람에게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자신에게도 냄새가 나겠거니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그를 상당히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서른 살 무렵까지도 늘 나는 큰일을 도모해봤자 망할 게 뻔하고, 앞으로 몇년이나 더 살지 모른다는 가정 하에 앞날을 계획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24p

"규칙을 깨라. 아니면 죽는다."

나는 그런 경우 약자에게 자신을 위한 새로운 법칙을 만들 권리가 주어진다는 거을 알지 못했다. 설사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그것을 사실로 확인해줄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코끼리를 쏘다> 中 130p

1911년에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간 조지 오웰의 학교 생활이 기술된 부분을 보면서 벌써 100년도 더 전의 일인데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일처럼 보인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있는 아이들은 선생들로부터 특혜를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수입을 묻고, 차종을 묻고, 집의 크기를 묻는다. 더 좋은 학교에 진급시키기 위해서 상류층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인가, 아니면 아직도 인간이라는 종이 여전히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오웰은 자신이 8살 어린 나이에 상류층의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었을지언정 관리의 아들이었으니 일반 학교에 다녔다면 특별히 모자라게 자라지는 않았을 테고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겪어야 했던 패배감으로 자존감이 낮아지지도 않았을터다. 그곳에서 느꼈던 분노와 증오, 그리고 패배감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까지 얼마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엇이든 쉽게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남들의 농간으로 열등감에 쉽게 빠지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에 쉽게 물든다.

<코끼리를 쏘다> 中 152p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누거나 글 쓰기를 좋아했던 소년 오웰은 결국 작가로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말하는 산문을 쓰는 동기는 네가지이다. 똑똑해보이고 싶고, 세간에 회자되고 싶고, 사후에도 기억되고 싶은 더없는 자기중심주의가 그 첫번째이다. 두번째는 미학적 열정, 세번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상을 발굴해서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내 글쓰기의 시작점은 늘 당파 의식, 불의에 대한 공분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쓸 때 나 자신에게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목해주길 바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이다.

<코끼리를 쏘다> 中 202p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은 상당히 날카롭고 지적이어서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 표시를 하다보니 한장 걸러 한장씩 표시를 하게 될 지경이었다. 산문집의 표제로 쓰인 <코끼리를 쏘다>는 한편의 긴장감 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식민통치를 하는 영국인들을 은근하면서도 대놓고 미워하는 버마인들. 백인의 동양지배라는 상황을 코끼리 사건을 통해 통렬히 비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더이상 아무런 해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코끼리를 쏴야만 했을 때의 오웰의 심정은 그야말로 절박해보였다.

벡인 통치의 전제조건이 늘 이른바 '원주민'에게 감명을 주는 것이고, 따라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게 변한다.(중략) 내가 그때 코끼리를 쏜 건 그저 바보처럼 보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이 있을까.

<코끼리를 쏘다> 中 183p

이 외에도 오웰이 책방에서 일하던 시절에 느꼈던 일들과 평론가로의 삶을 살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단편으로 담겨져 있는데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글쓰기에 대한 의무감과 애정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자라온 환경과 지난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두고 보니 그의 작품이 훨씬 더 잘 이해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이 엉망진창이라고, 너무나 많이 망가져서 말세라고들 하는데 오웰이 살았던 시절은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있었고 온갖 사상들이 급작스럽게 나타나 사람이 사람을 파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펼치고 세상을 고발하는데 온힘을 다하려 했던 오웰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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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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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식을 가지고 책을 쓰는 사람들은 그 책 안에 자신이 구축한 세상에 대한 정의를 표현하려 애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책들을 참 많이도 찾아 읽었고, 세상의 누군가는 사회를 고발해야 하고, 칼보다 강하다는 펜으로 글을 써서 그것을 세상에 내어 놓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글을 읽고 늘 경계하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도 나이가 들고, 그런 책들을 쓰는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먹고 사는 일에 바빠지다 보니 나도 그들도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나 있었다. 세상에 물들어 버린 경우도 있었고, 나이 들었다는 핑계로 물러진 것도 있었고, 옛말로 '변절'해버린 탓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을 뜨고 세상을 다르게 보려고 애쓰며 글 안에 주제의식을 담고자 하는 사람들은 또 줄줄이 생겨났고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다.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쓴 에세이는 어떠한지 궁금했다.

<책, 이게 뭐라고>에는 장강명 작가가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이 주로 담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책 안에서 작가가 자주 하는 말에 '읽고 쓰는' 장강명과 '말하고 듣는' 장강명이라는 표현들이 있다. 책을 써서 내는 사람들은 주로 혼자서 작업하고 그 지난한 작업들을 끝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독자들을 만난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직업은 아닌 셈이다. 그런 그가 팟캐스트를 하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야기하고 답변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로의 경험인 셈이니 그런 과정을 '꽤나 분열적인 작업'이었다고 고백할만 하다.

"나의 친구여, 그대는 1년에 책을 150권 가량 읽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둗겠는데, 그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암기하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가? 혹시 내용의 절반을 외우는 책은 있나? 반의 반은? 아니, 단 한 장이라도 정확히 암송할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되는가? 읽은 뒤에 대략적인 개요만 떠올릴 수 있다면 애초에 그 책을 정독할 필요는 무엇이었나?

친애하는 동료들인 공자, 석가모니, 예수와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제자들을 말로만 가르친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우리는 글을 남기면 그것이 죽은 경전, 헛된 신학이 되어 펄펄 살아 움직여야 할 깨달음의 순간들을 방해할 것임을 알았다네."

<책, 이게 뭐라고> 中 254p

언어를 기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인간에게 비언어적인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은 시간을 결디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다가 흩어지고 만다. 10년, 20년의 세월을 견디고 남는 것은 기록된 글자뿐이다.

<책, 이게 뭐라고> 中 56p

말은 상황에 좌우된다. 그래서 말하는 인간은 쓰는 인간보다 맥락과 교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사람은 읽고 쓰기를 통해서도, 말하고 듣기를 통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성실히 읽고 쓰는 사람은 이중 잣대를 버리면서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약간 무겁고, 얼마간 쌀쌀맞은, 진지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사이에 충실히 말하고 듣는 사람은 셀린과 제시처럼 다정하고, 비언어적으로 매력적인 인간이 된다.

<책, 이게 뭐라고> 中 57p

아들이 입시를 준비할 때 SAT를 준비하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할 영어책 리스트가 있었고, 한국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또 꼭 읽어야 할 명작리스트가 있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시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고전소설들이었거나 혹은 제목만 들어도 잠이 올 것만 같은 어려운 책들이었다. 그런 책들은 누가 리스트에 넣었는지, 그 리스트를 만든 사람들은 그 책을 다 읽었는지 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는데 장강명 작가도 그랬던 모양이다. 특히 제법 이름있는 작가로 청소년에게 추천할만한 책을 골라달라거나 올해 가장 좋은 책을 추려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는 거절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세상에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 책을 전부 다 본게 아닌 다음에야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을 골라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말이다. 연말에는 각 인터넷서점마다 올해의 책 투표를 하곤 하는데 그 투표를 하면 책 살 때 쓸 수 있는 할인쿠폰을 주기 때문에 나도 꼭 한다. 하지만 결국 내게 올해의 책이란, 리스트에 올라있는 책 중에 내가 읽은 책, 그 중에서 제일 나았던 책일 뿐이다. 그렇게 골라진 책이 올해의 책이 될 자격이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책'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 가치관의 영역이다. 아마 세상에는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와인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책은 더 그러하다. 소설의 영역으로만 좁혀도 그렇다. (중략) 나는 질리도록 오락 소설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양식화된 전형에 물려 변형을 찾아나갈 때 아이의 내부에 개성과 깊이가 조금씩 생겨서 굳어진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책, 이게 뭐라고> 中 424p

좋은 책을 쓰고 싶은 작가 장강명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장강명이 훨씬 더 와닿았던 산문집이었다.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려 들지 않는 신중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스스로 늘 뒤돌아보고 노력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으니 그런 사람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역시나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손끝에 닿는 책장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호들갑스럽게 과시한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과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분 나빴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나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는 그 순수한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상스럽게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은근히 지하철을 탈 때는 밀리의 서재를 두고도 종이책을 싸가지고 다니는 그 행위가 어느 정도는 그가 의심하는 행위가 맞는 것 같아서 조금 찔리기도 했다. 또한 같은 책을 리커버 에디션으로 다시 내면서 가격을 올린다거나 굿즈를 샀더니 책이 왔다는 식으로 물성을 강조하는 요즘의 트렌드는 나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이 책 안에도 나와있지만 1850년 러시아에는 완전 문맹 비율이 90퍼센트였다고 했고, 그때가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가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이 끝났다고, 문학이 죽었다고 엄살떨지 말라고 일본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가 말했단다. 어려서는 제법 양질의 책들도 많이 읽던 스무살 아들이 청소년기에 라이트 노벨을 거쳐 지금은 웹소설에만 한달이면 10만원 정도씩 결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말리지 않는다. 어떤 책이라고 꾸준히 읽는 한 어느 순간 스스로의 독서에 대한 성찰은 찾아오게 마련이고 독서의 성향도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 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은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 번 건설하면 땅덩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책, 이게 뭐라고> 中 1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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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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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 어머니의 빈자리를 어린 시절엔 거짓말로 채워간 적도 있었지만 로즈는 열네살이 되던 해 더 이상 어떤 조각 하나도 없는 어머니를 창조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 속에서 죽이기로 결심했다. 서른 다섯이 되도록 안정된 직업을 가지지도 못했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 조와도 같이 살고는 있지만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다. 로즈의 아버지는 늘 로즈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직업을, 삶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런 표현조차도 로즈에겐 상처가 되고 만다. 그토록 어머니의 존재를 그리워 할 때는 한마디 말도 없었으면서 갑작스럽게 아버지는 로즈에게 소설책 한권을 내밀며 로즈의 어머니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은둔한 소설가, 콘스턴스 홀든이라는 이름을 받아들고 로즈는 어머니의 존재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관이 커튼 뒤로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가 너무 슬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는 것을 보았다. 내게 어머니의 상실이란 느낄 수는 있지만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잠가놓아 열 수 없는 상자였고, 열쇠 없는 집이었으며, 이름을 발음할 수 없는 지도 위 장소였다. 어느 날 정체를 알게 된다면 당연히 압도당하겠지만 그럴까 봐 두렵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없었고 어머니를 가진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잃은 적 없는 대상을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을까? 그리움에 대해서도, 궁금증에 대해서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뿐이다. 가진 적 없는 건 그리워할 수도 없어!

<컨페션> 中 32p


콘스턴스 홀든에 대해 아버지가 한 불길한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았고, 외국어나 기술을 배워보라던 설득을 생각했다. 지금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너는 큰일을 할 사람이었어!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사실 내게 일어난 중대한 일은 단 하나였다. 나는 어머니가 곁에 있어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컨페션> 中 89p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로즈의 어머니인 앨리스가 코니(콘스턴스 홀든)을 만나 어떻게 사랑에 빠졌으며 그 둘의 삶이 어떻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2017년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어린 소녀가 서른 다섯의 성인이 되고 어머니의 부재라는 결핍이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래서 갑작스럽게 손에 쥔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따라 나서는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여주고 있다.


앨리스는 겨우 스무살이었다. 앨리스는 코니의 당당하고 힘있는 우아함에 이끌려 그녀와 함께 하게 되지만 코니와 함께 누리는 모든 것들이 자신이 이루어 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힘겨웠고, 그녀와 함께 그 모든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럴수록 코니를 붙잡고 싶었지만 코니에겐 코니만의 삶이 있었다. 성공한 작가로 헐리우드에서 유명 배우와 감독들과 함께 하는 코니에게 어린 아이처럼 매달려 징징대는 앨리스가 귀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둘 사이엔 오해가 쌓여가기 시작했고 결국 앨리스는 코니의 절친이자 자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 준 샤라의 남편 맷과 훌쩍 현실로부터 도망쳐 버린다. 비록 샤라와 맷의 관계가 이미 위태로운 관계였다 해도 맷와 앨리스의 행동은 옳지 않았다. 그럼에도 맷은 앨리스와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앨리스는 코니를 잊지 못해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고, 걱정이 된 맷의 연락으로 코니를 만났지만 그들은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을 준 채 헤어졌다. 그것이 코니에게도, 맷에게도 그리고 앨리스의 딸인 로즈에게도 마지막이었다.


"코니는 당신, 당신의 파트너, 그리고 관계 자체가 있다고 해. 사랑 말이야. 자신을 돌보듯이 사랑도 돌봐야 해. 사랑이 혼자서 유지되며 자라기를 바랄 순 없어. 우린 사랑을 돌보지 않았어, 조.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러길 원하지 않았고. 그리고 가끔 그런 사실을 아무도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같아."

"사랑은 화분에 심은 식물이 아니야, 로즈."

"살아있는 생물이야." 내가 말했다.

<컨페션> 中 324p


코니와 앨리스, 샤라와 맷, 맷과 앨리스 그리고 로즈와 조

모두는 한때 서로 사랑했지만 그들의 사랑을 돌보지 않았다. 사랑이 저절로 유지되고 자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저 버려두었다가 사랑이 깨지고 금이 가고 그 깨진 사랑에 자신들의 마음을 베었다. 로즈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겠다고 코니를 찾아가지만 그것은 어머니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기 보다 결국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로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조차 자기를 버렸는데 어떻게 자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거나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늘 의심했던 것이다. 사업이랍시고 벌여 놓고 통 진전이 없으면서도 로즈에게 미안한 마음조차 없는 조에게 따끔하게 사실을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조의 가족들에게 명절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가면서도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조와 헤어진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마저 가지고 있다. 자신이 가진 '관계'라는 끈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머니가 버린 자식'이라는 스스로의 정의로부터 비롯한 것이리라.


그래서, 로즈의 엄마 앨리스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 하는 궁금함에 제법 묵직한 책의 페이지를 하염없이 넘겼다. 하지만 애초에 작가의 목적은 앨리스가 어디 있는지보다도 로즈가 자신의 인생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로즈가 잡아야 할 삶의 목적은 35년 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헤매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바닥으로 내모는 것도 아니었다. 관계를 갖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고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나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그리고 그 사랑을 돌볼 수도 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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