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의식을 가지고 책을 쓰는 사람들은 그 책 안에 자신이 구축한 세상에 대한 정의를 표현하려 애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책들을 참 많이도 찾아 읽었고, 세상의 누군가는 사회를 고발해야 하고, 칼보다 강하다는 펜으로 글을 써서 그것을 세상에 내어 놓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글을 읽고 늘 경계하고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도 나이가 들고, 그런 책들을 쓰는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먹고 사는 일에 바빠지다 보니 나도 그들도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나 있었다. 세상에 물들어 버린 경우도 있었고, 나이 들었다는 핑계로 물러진 것도 있었고, 옛말로 '변절'해버린 탓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눈을 뜨고 세상을 다르게 보려고 애쓰며 글 안에 주제의식을 담고자 하는 사람들은 또 줄줄이 생겨났고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다.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쓴 에세이는 어떠한지 궁금했다.

<책, 이게 뭐라고>에는 장강명 작가가 팟캐스트를 운영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이 주로 담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책 안에서 작가가 자주 하는 말에 '읽고 쓰는' 장강명과 '말하고 듣는' 장강명이라는 표현들이 있다. 책을 써서 내는 사람들은 주로 혼자서 작업하고 그 지난한 작업들을 끝내고 난 후에야 비로소 독자들을 만난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직업은 아닌 셈이다. 그런 그가 팟캐스트를 하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이야기하고 답변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로의 경험인 셈이니 그런 과정을 '꽤나 분열적인 작업'이었다고 고백할만 하다.

"나의 친구여, 그대는 1년에 책을 150권 가량 읽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둗겠는데, 그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암기하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가? 혹시 내용의 절반을 외우는 책은 있나? 반의 반은? 아니, 단 한 장이라도 정확히 암송할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되는가? 읽은 뒤에 대략적인 개요만 떠올릴 수 있다면 애초에 그 책을 정독할 필요는 무엇이었나?

친애하는 동료들인 공자, 석가모니, 예수와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제자들을 말로만 가르친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우리는 글을 남기면 그것이 죽은 경전, 헛된 신학이 되어 펄펄 살아 움직여야 할 깨달음의 순간들을 방해할 것임을 알았다네."

<책, 이게 뭐라고> 中 254p

언어를 기록하는 일에 매달리는 인간에게 비언어적인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들은 시간을 결디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다가 흩어지고 만다. 10년, 20년의 세월을 견디고 남는 것은 기록된 글자뿐이다.

<책, 이게 뭐라고> 中 56p

말은 상황에 좌우된다. 그래서 말하는 인간은 쓰는 인간보다 맥락과 교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사람은 읽고 쓰기를 통해서도, 말하고 듣기를 통해서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성실히 읽고 쓰는 사람은 이중 잣대를 버리면서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약간 무겁고, 얼마간 쌀쌀맞은, 진지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사이에 충실히 말하고 듣는 사람은 셀린과 제시처럼 다정하고, 비언어적으로 매력적인 인간이 된다.

<책, 이게 뭐라고> 中 57p

아들이 입시를 준비할 때 SAT를 준비하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할 영어책 리스트가 있었고, 한국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또 꼭 읽어야 할 명작리스트가 있었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시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고전소설들이었거나 혹은 제목만 들어도 잠이 올 것만 같은 어려운 책들이었다. 그런 책들은 누가 리스트에 넣었는지, 그 리스트를 만든 사람들은 그 책을 다 읽었는지 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는데 장강명 작가도 그랬던 모양이다. 특히 제법 이름있는 작가로 청소년에게 추천할만한 책을 골라달라거나 올해 가장 좋은 책을 추려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는 거절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세상에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 책을 전부 다 본게 아닌 다음에야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을 골라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말이다. 연말에는 각 인터넷서점마다 올해의 책 투표를 하곤 하는데 그 투표를 하면 책 살 때 쓸 수 있는 할인쿠폰을 주기 때문에 나도 꼭 한다. 하지만 결국 내게 올해의 책이란, 리스트에 올라있는 책 중에 내가 읽은 책, 그 중에서 제일 나았던 책일 뿐이다. 그렇게 골라진 책이 올해의 책이 될 자격이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책'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 가치관의 영역이다. 아마 세상에는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와인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책은 더 그러하다. 소설의 영역으로만 좁혀도 그렇다. (중략) 나는 질리도록 오락 소설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양식화된 전형에 물려 변형을 찾아나갈 때 아이의 내부에 개성과 깊이가 조금씩 생겨서 굳어진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책, 이게 뭐라고> 中 424p

좋은 책을 쓰고 싶은 작가 장강명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장강명이 훨씬 더 와닿았던 산문집이었다.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려 들지 않는 신중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스스로 늘 뒤돌아보고 노력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으니 그런 사람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역시나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손끝에 닿는 책장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호들갑스럽게 과시한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과 '이상한 자부심과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분 나빴지만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나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기는 그 순수한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상스럽게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은근히 지하철을 탈 때는 밀리의 서재를 두고도 종이책을 싸가지고 다니는 그 행위가 어느 정도는 그가 의심하는 행위가 맞는 것 같아서 조금 찔리기도 했다. 또한 같은 책을 리커버 에디션으로 다시 내면서 가격을 올린다거나 굿즈를 샀더니 책이 왔다는 식으로 물성을 강조하는 요즘의 트렌드는 나 역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이 책 안에도 나와있지만 1850년 러시아에는 완전 문맹 비율이 90퍼센트였다고 했고, 그때가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가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이 끝났다고, 문학이 죽었다고 엄살떨지 말라고 일본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가 말했단다. 어려서는 제법 양질의 책들도 많이 읽던 스무살 아들이 청소년기에 라이트 노벨을 거쳐 지금은 웹소설에만 한달이면 10만원 정도씩 결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말리지 않는다. 어떤 책이라고 꾸준히 읽는 한 어느 순간 스스로의 독서에 대한 성찰은 찾아오게 마련이고 독서의 성향도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 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은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 번 건설하면 땅덩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 더 빠르게 늘어난다.

<책, 이게 뭐라고> 中 19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