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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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요일이고 야구 낮경기가 있는 날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현재 연패중이고 그 연패까지 오는 동안 경기의 질이 좋지 않았고(지는 경기에 질이 좋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흔히 말하는 '졌잘싸'와 같은 경기는 졌지만 질이 좋은 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선수들의 분위기는 영 엉망인 듯 보였다. 심지어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야구를 보고 있는 내 컨디션까지 바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만큼은 지지 말아야지, 지면 안되는 거지, 하고 나왔겠지만 경기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1회부터 어이없는 실수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경기의 흐름은 급격하게 상대팀으로 넘어가고 우리팀의 사기는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3회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나는 아, 오늘도 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화도 나고 실망도 되고 아무튼 여러가지 기분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요일인데, 이처럼 여유로운 한낮인데 야구 때문에 기분이 최악으로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차라리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머리의 한 부분은 어차피 야구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는 소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읽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한 티셔츠들을 모아, 그 티셔츠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엮은 책 <무라카미 T>는 지금의 내 상태에 어쩌면 딱 알맞는 책이었다.

Keep calm 으로 시작하는 문구들의 뒤는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게 여러가지로 변형되어 적용되고 있는데 원래는 'Keel calm and Carry on'이라는 문구가 그 시작으로 영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개월 전인 1939년에 대규모 공중 폭격이 예고되자 영국 정보부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패닉 발생을 막기 위해 만든 포스터의 문장이었다고 한다. '평정을 유지하고 일상생활을 계속하자'라는 뜻인데 하루키의 책을 홍보하려고 출판사에서 그 문장을 패러디하여 'Keep calm and read Murakami'라고 적힌 티셔츠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오늘의 나이다. 야구경기를 보고 평정심을 잃은 나.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Keep calm 하고 그리고 '무라카미 T'를 읽는 일~!

내 티셔츠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고양이 그림이 너무 귀엽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입을 수는 없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세상이 술렁거리고 어수선할 때 차분하게 앉아 독서에 정진하라는 뜻이 아주 좋다. 부디 꼭 그래 주십시오.

<무라카미 T> 中 42p

여태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에세이들과는 다르게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나 줄거리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저 어느 샌가 상당히 많아진,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쌓인 하루키의 티셔츠들에 대한 이야기들일 뿐이다. 하루키 본인이 가장 즐겨입는 옷이 티셔츠이기 때문에 많이 사기도 했고 달리기를 하는 동안 혹은 강연을 하거나 재직한 대학에서 구매했거나 기념품으로 받은 티셔츠들이 많기도 했다는 것. 티셔츠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T모양의 심플한 옷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이미 특별할 것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색깔과 느낌의 티셔츠가 있다. 같은 무지 티셔츠라 할지라도 무채색의 티셔츠가 있는가 하면 네온색의 티셔츠도 있다. 프린팅 된 그림도 귀여운 그림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의 시선을 확 끄는 강렬한 느낌의 그림도 있다. 새겨진 문자열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있고 명언에 가까운 좋은 글귀가 있는가 하면 '욕'이 씌여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똑같이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그 티셔츠를 고르는 사람의 취향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일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예일이라는 글자가 프린팅 된 학교 티셔츠를 가지고 있지만 입지는 못한다는 하루키.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의 티셔츠는 입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그 학교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봐 조심스럽다는 하루키. 상당히 귀여운 동물이 그려진 티셔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나 귀여운 것과 나와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어서 입지는 못한다는 글들을 보면서 이전의 에세이에서 받았던 '하루키'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어지간하면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사람!

입을 수 있는 티셔츠와 입지 못하는 티셔츠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결국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거죠. 되도록 숨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걸어 다닐 대도, 서점에 잘 때도, 디스크 유니온에 갈 대도 누구 눈에 띄는 게 거북해요. 티셔츠를 입는 건 괜찮은데 시선을 끌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제한적이에요. 티셔츠 자체는 멋진데 개인적으로는 입지 못하는 게 꽤 있습니다. 우선 메세지가 있는 티셔츠를 못 입어요.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읽으니까(웃음). 읽고 있으면 정말 민망하죠.

<무라카미 T> 中 180p

나도 오늘 티셔츠를 입고 있다. 집에서든 어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곳으로 나갈 때든 가장 편안한 옷이 티셔츠니까. 내 티셔츠에는 'I'd rather be outside'라고 씌여져 있다. 어제 이 티셔츠를 입은 나를 보고 아들이 그랬다.

"너무 엄마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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