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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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텔레비전도 세탁기도 냉장고도 형광등도 커튼도 현관 매트도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부동산 소개소 아저씨에게 처음 이 방을 안내받던 때와 느낌이 똑같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방 전체에 희미하게 가람 맛살라향신료 냄새가 남아 있고, 텅 빈 거실 중앙에 애인이 사용하던 열쇠가 반짝이는 것뿐. -p5

 

참으로 고약한 시작이다. 세상에 애인이라는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이 사랑을 버리고 간 것도 모자라, 부동산 소개소 아저씨에게 처음 방을 안내받던 때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몽땅 싸들고 나갔다니...가재도구며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비법으로 만든 매실장아찌까지 알뜰하게 싸들고 날라 버렸다. 날라버렸다는 말이 맞는 건, 함께 힘을 모아 식당을 열자며 허리띠 졸라매고 모아두었던 돈까지 몽땅 들고 튀었기 때문이다. 선한 얼굴에 눈빛을 하고 있던 인도 애인은 그렇게 카레향 정도만 남기고 그녀를 떠나가버렸다. 그 와중에 그녀는 생각한다. '겨자씨 된장만은....겨자씨 된장만은....' 그렇게 기도하듯 열어본 현관문 옆 가스계량기 옆에는 겨자씨 된장 항아리가 오늘 아침 그녀가 나갈 때 다독거려 놓은 그대로 얌전히 앉아있다.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사실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집도, 가재도구도, 사랑도 잃어버린 마당에 잠시 나오지 않는 목소리쯤이야, 라고 생각하는걸까.

 

그 길로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 링고는 할머니의 유품인 겨된장을 끌어안고 10년 전 떠나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고 이웃들도 그리 많지 않은 시골 마을로 돌아간 링고는 그곳에 '달팽이 식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식당을 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성스런 음식으로 손님을 맞는다. 메뉴를 정해놓고 많은 손님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루 한 팀의 손님을 받아 원하는 메뉴를 요리해준다. 손님의 취향과 이야기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그 상황에 맞는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녀의 정성은 '달팽이 식당'에 작은 기적을 만든다.

 

음식이 마구마구 등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금단의 팬더'가 생각나기도 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혹은 자신의 추억와 맞바꿀 수 있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사람들을 보면 '내 생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생각나기도 하고, 음식이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것을 보면서는 '심야식당'을 떠올리게도 하는 그런 따뜻한 소설이다. 식당의 이름도 그런 면에서 아주 직관적이다. 달팽이...아주 느리지만 자기의 길을 가는 달팽이. 달팽이 식당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천히, 많은 손님을 받고, 많은 돈을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한 팀이라도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식사를 통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링고가 원하는, 달팽이 식당이 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읽는 이까지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착한 이야기이다. 다만, 출출해질 수 있는 늦은 저녁시간에 읽는 것은 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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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의 책읽기 - 내 삶을 리모델링하는 성찰의 기록
유인창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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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수없이 많은 곳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어떤 구절 아니 어떤 문단 아니 어떤 페이지에는 도무지 어디에 붙여야 좋을지 몰라서 헤매이기도 했다. 좀처럼 책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는 나에게는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는 굳이 포스트잇을 붙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이 아닌 책을 잘 읽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제목에 나이가 들어가 있는 책은 왠지 버겁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는 아닌지라,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을 읽을 수도 없고,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를 읽을 수도 없다. 서른 즈음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기는 했다. 이제 나이 마흔이 넘고 보니 제목에까지 나이를 붙여 놓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왠지 서글퍼져서 제목에 나이가 들어가 있으면 싫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요즘들어 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혹은 내 주변의 친구들까지 하나같이 하는 말은 "이제, 몸이 예전같지가 않아...그래서 더 힘들어"하는 말이다. 왜 마흔은 이렇게 힘든걸까? 몸도 이제 맘 같지 않고, 아이는 아직도 크려면 멀었고, 키우는데 부담은 아직도 크기만 하고, 회사에서 일하는데서 오는 압박감 또한 커져만 간다. 우리가 흔히 아는대로 마흔은 불혹,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일 줄만 알았던 이 마흔은 왜 아직도 이렇게 힘겨운걸까? 우린 언제까지 힘들어야 하는걸까?

 



 

취직 고민이 세상의 거의 모든 고민이었던 대학교 졸업반 시절, 친구들과 술 한 반을 나누면 가끔 나오는 이야기가 '마흔이 되면...'이었다. 이미 취직을 해서 출근을 앞두고 있는 친구와 아직 취직을 못한 친구들이 뒤섞여 술값 걱정을 하면서 미래를 그려 보고 예측해 보곤 했다. (중략) 우리는 술을 마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올 미래의 자리에 이미 가 있는 듯 겸연쩍으면서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리라. 그것도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중략) 종합적으로 그림을 완성해 보면 그럴듯한 직장에 다니면서 어드 정도 위치를 가지고 있는 현모양처와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는게 우리들의 '마흔이 되면 아마...'의 모습이었다. (중략) 마냥 편하고 안정적일 줄 알았던 삶은 20대 때와 다르지 않게 흔들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직장은 가지고 있지만 직장생활이 언제 추억으로 바뀔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아파트에 살고는 있지만 빚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않다. 삶은 때가 되면 스스로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게 착각이었다.  -p153~155

 


 

 하하하. 그렇다. 난 언젠가 나이가 들면 저절로 어른이 되고, 훨씬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을만큼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편협했던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편협해지기 일쑤였고, 나이들수록 너그러워지기는 커녕 나이가 들수록 쓸데없는 고집만 늘어 아집이 되기만 했다. 세상에 대해 많이 알게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세상은 나보다 더 먼저, 더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 이젠 세상에 뒤떨어졌다는 소리마저 듣기 십상이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정말 오산도 이런 오산이 없다.

 

마흔의 어느 날엔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에 퍼뜩 놀라고, 놀란 김에 곰곰이 생각한 끝에 써낸 이 책은 마흔 언저리의 독자라면, 특히나 작가의 말마따나 '이상하고 슬픈 인종'인 남자가 읽는다면 더더욱 공감할 수 있을만한 책이다. 그렇다고 여자는 공감하지 못하느냐, 20대나 30대라고 공감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내가 생각한대로가 아니라 부모가, 학교가, 회사가, 정치가가 원하는대로 밖에 살아오지 못한 자유국가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착한 책이다. 달리 착한게 아니라 아, 이런 고민이, 이런 아픔이 나에게만 있었던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를 압박하고 채찍질하던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나를 조금은 더 다독이고 괜찮다고 타일러 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구구절절이 적자면 한도 없을 이 공감은 "꼭 읽어 보세요~"라는 말로 갈음한다.

 

p.s : 한 챕터마다 작가의 이야기에 한 권의 책을 덧붙여 놓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있는 책까지 모두 29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 책들도 다 주옥같은 책들. 추천책이 또 스물 아홉권만큼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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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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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다 못해 약간 붉은 기운마저 도는 진한 노랑 빛의 표지와 그 위에 의자, 아마도 윙체어로 보이는 쿠션이 몹시도 푹신할 것만 같은 의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치마를 입은 여인과 남자의 다리가 보인다. 그림만으로는 두 사람이 다툼을 하고 있는지, 키스를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문득, 키스를 하려는 거라면 여인의 버티고 선 다리가 너무도 완고해보인다.

 

삶,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기차여행.

 

인생이 기차여행과 같은 점이 있다면 누구나 그 끝이, 여행의 종착역이 같다는 점일 것이고,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든 역이 다 같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흔하디 흔한 표현으로 인생은 여행과 같다고 한다. 편도여행. 왕복표를 끊지 않는 기차여행과 같다고들 말한다. 어떤 이는 리허설이 없는 연극무대라고도 한다. 누군가는 조금 편하게 KTX를 탄 것처럼 남들보다 빠른 걸음으로 갈 수도 있는 여행. 누군가는 좌석이 없어 입석표를 끊어 불편하게 갈 수도 있는 여행.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 끝은 죽음인 여행.

 

그저 '기차'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닿지 못할 그 어느 곳에 가려는 이야기인가 싶다. 게다가 '곰스크'라니... 우리나라 지명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더구나 곰스크라는 이름이 생소하면서도 닿지 못할 곳으로 들린다. 단편집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는 이 이야기 외에도 7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조금씩 닮아있다. 가고자 하나 가지 못하는 현실, 혹은 닿지 못하는 꿈에로의 여행인 삶에 대한 이야기.

 

'배는 북서쪽으로'라는 단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아버표르트로 간다 하고, 누군가는 루트로브로, 누군가는 넥쇠로, 에스표르트로, 말뫼로, 졸리츠로 간다 한다. 그러나 정작 누구도 그 배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키를 잡은 선원은 북서쪽으로 간다한다. 선장에게로 가 이 배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선장 또한 정해진 항로를 따를 뿐이라며 정확한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얼어붙을 듯이 춥고 어두운 뱃머리에 서있던 한 사람에게 두터운 모직코트를 걸치고 머리엔 숄을 두른 창백한 소녀가 말한다.

 

"처음부터 전 알고 있었어요. 원래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는 것을요......어디로 가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책 표지의 남녀와 의자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한 장면이다. 남자는 곰스크로 가기 위해 아내와 함께 기차에 올랐고, 잠시 들른 간이역에서 아내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기차를 놓치고 만다. 간이역이었던 까닭에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어쩌다 한 번 그 역에 설 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남자는 다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표 살 돈을 모으며 기차를 기다리지만, 아내는 조금씩 살림을 늘리며 그 간이역에서 살아갈 준비를 한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마련한 또 하나의 살림살이가 바로 그 의자였고, 의자가 필요없다는 남자와 곰스크로 떠나게 되더라도 그 때까지만이라도 편하게 앉아 있을 의자가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아내와의 대립이 표지의 그 그림이다. 역자의 말마따나 이 단편집들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에 나오는 비유적 장치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함축이다.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배. 같은 꿈을 꾸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조금씩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고, 결국에 꿈은 꿈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현실. 세상이 강요하는 길과 항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한 길은 따로 있다는 것. 내 길을 가려는 의지를 막는 것이 내 곁의 누군가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세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폭발하는 듯한 이야기와 서사는 없지만 다 읽고 나면 원가 가슴속에서 잊었던 기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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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김해용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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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궁극의 연애소설이라는 문구에 현혹된 것이 사실이다. 제목 또한 곧 모래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봄날씨에 바람난 처녀처럼 나를 흔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이다. 좀,이라는 말이 애매하다면 많이 실망이다. 내가 생각했던 연애소설이 아니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두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집은 두 편이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연애가 아니었다 뿐이지, 사실 무척이나 처절한 연애이야기이다.


한 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또다른 한 편은 '둘도 없이 소중한 너에게'이다. 원서의 표지를 보니 어쩌면 원서가 훨씬 더 내용의 미묘한 느낌을 잘 살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제목부터 표지까지 무척이나 따뜻하고 공감이 가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심리학 서적의 표지로도 그럴 듯해 보이는 이 표지는 사실 내가 느낀 내용과는 다른 느낌이다.

 

'운명의 짝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작가가 쓴 연애소설은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자신의 짝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택한 것 같다. 첫번째 소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는 부유하고 유명한 가족, 잘난 형제들 사이에서 그저 그런 평범한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컴플렉스를 지닌 남자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한 여자에게서 배신 당한 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내용이다. 두번째 소설 '둘도 없이 소중한 너에게'는 적당히 괜찮은 남자와 적당히 괜찮은 관계를 이어가다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불륜의 상대로 만나오던 거칠고 마초같은 남자에게 이끌리면서 진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문화적 차이일까? 솔직히 둘 중 어떤 사랑에도 공감의 표를 던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다 같은 사람만 있는게 아닌 것처럼, 다 같은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니까 라며 이해하려고 노력해봤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아줌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사실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게 웬만하면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입장이 있고, 옳은 길이라고 혹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길이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한이 있어도 결국은 다시 또 최선이라는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는 것 자체가 용감한 일이고, 맞는 일이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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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엄마
서미애 지음 / 노블마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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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문구, 띠지, 인터넷서점의 서평, 소개문구등으로 현혹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만큼 실패하는 일도, 실망하게 되는 일도 쉬운 일이다. 궁극의 혹은 대단한, 독보적인, 충격적인, 고품격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구들에 속을만큼 속아왔으면서도 사실 혹 하는게 또 나란 팔랑귀를 가진 사람이다. '잘자요, 엄마'는 띠지가 참으로 자극적이다.

 

"이렇게......두 손에 잔뜩 피를 묻혔는데도 안아 줄 수 있나요?"

 

"엄마......엄마는 정말 그렇게 내가 끔찍했어요?"

 

엄마와 피, 그리고 끔찍이라는 단어 세 개만으로도 우리는 여러가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 상상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속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 이번에는, 하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추리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라 하니 더더욱 기대감이 만발한다. 한국추리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없어서 못 읽었다고 하는게 맞으려나? 솔직히 서미애라는 작가의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작년에 김언수라는 작가를 찾아내고 얼마나 기뻐했던가를 생각하니 방금했던 기대에 또 다른 기대가 얹힌다.

 

응암동. 화재가 발생하고 화재 장소에서 커다란 곰인형을 안은 소녀가 발견된다. 그녀는 화재조사관과 경찰에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달라며 명함을 내민다. 그 소녀와 함께 살고 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화재가 난 집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범죄심리학자 이선경. 세상을 뒤흔든 연쇄살인범 이병도가 그녀와의 면담을 요구한다. 여죄가 있을수도 있는 상황에서 입을 다물어 버린 연쇄살인범에게 자백을 받아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경찰과 범죄심리학단체에서는 기대가 크고, 그런 이유로 선경은 기대와 함께 부담도 크다. 그런 그녀앞에 전남편의 11살 난 딸아이 하영이 등장한다. 응암동 화재로 함께 살던 외조모와 외조부를 잃은 소녀가 바로 하영이다.

 

연쇄살인범 이병도에게 있어 자신에게 가장 오래된, 첫 기억은 바로 베개를 들고 자신을 눌러 죽이려 하던 엄마의 모습이다. 아들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 베개를 물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던 엄마. 매를 등뒤에 감추고 거짓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부르고, 가까이 다가오면 매질을 하던 엄마. 욕조에 머리를 집어 넣고 죽기를 바라던 엄마. 그럴 때마다 그녀가 부르던 노래는 비틀즈의 맥스웰의 은망치Maxwell's Silver Hammer라는 노래이다. 

 

쿵,쿵, 맥스웰의 은망치가 존의 머리위로 떨어졌어

쿵,쿵, 맥스웰의 은망치가 확실히 그가 저 세상 사람이 될 때까지

 

이병도에게 가장 먼저 '살인'이라는 폭발하는 마음을 갖게 한 사람은 엄마이다. 선경은 그런 이병도를 만나면서 자신의 집에서 만난 하영도 엄마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았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11살 난 아이가 무서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보면 저건 인간도 아니다, 당장 죽여없애야 한다는 과격한 말이 나온다. 감옥에서 주는 밥도 아깝다고, 저런 인간에게 인권이라는게 무슨 소용이냐, 그가 저지른 범죄에 합당한 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한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가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배경이 나온다. 어렸을 적부터 가난한 집에서 가족들에게 학대를 당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등의 배경말이다. 실제로 유영철이었던가. 그가 어렸을 적 무언가 작은 것을 훔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어려서 동네 슈퍼에서 알사탕 하나, 혹은 아버지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하나쯤 훔치는 일은 누구에게라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동네 파출소로 데리고 가 '이런 도둑놈의 새끼, 당장에 감옥에 쳐 넣어라, 이런 놈은 따순 밥 먹여 키울 필요도 없다, 쓰레기 같은 놈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자신은 천하에 몹쓸 놈, 뭘해도 가치 없는 놈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사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고 누구에게나 정보가 넘쳐나는 때, 꼭 범죄심리학같은 수업을 듣지 않아도 인터넷을 조금만 서핑하다보면  사람의 심리에 대한 기사나 포스팅 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작년엔가 범죄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때도 아주 전문적인 부분이나 용어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수업내용은 하다못해 스릴러 영화에까지도 출연한 적이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런 점을 악용하는 범죄자들도 많이 있다니 그런 범죄자들의 모든 말들을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특별히 안면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불특정 다수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범죄자들의 경우 대다수가 기본적으로 가족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아끼지 않았어야 할 부모로부터 학대를 꾸준히 당해온 사람이 많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엄마의 뱃속에 있다가 차가운 세상으로 맨 몸으로 튕겨져 나온 핏덩이. 말을 할 줄 알고, 글을 읽을 줄 알아도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있으면 긴장하게 되고, 두려운 것이 인간이다. 혼자 몸으로는 일어설 수도 먹을 수도, 말을 할 줄도 모르는 핏덩이는 가족의 온기와 사랑을 함께 먹으며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인성이, 인격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터인데,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는 가족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어떤 인성과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인가.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자신에게도 한번쯤은 따뜻한 목소리를 내어주길 바라는 아주 작은 바람조차도 거절로 되돌아 올 때, 그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흔치 않은 스릴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리없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스릴러계를 보는 것이 참으로 반갑고, 또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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