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1 - 천하를 취하게 할 막걸리가 온다!
이종규 지음, 김용회 그림, 허시명 감수 / 북폴리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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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는 만화에 대한 편견이 참 심했다. 지금은 학습만화가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 만화자체를 아예 금지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만화라는 것이 그림 위주에 간단한 말풍선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아직 독서습관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은 어린이들이 만화에만 몰두하게 되면 나중에 긴 호흡의 책을 읽기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은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어른이 무슨 만화책을 보냐는 둥, 만화가 책이냐는 둥 하는 이야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려서 읽은 만화책들 중에는 그저 웃자고 보는 코믹물도 있었지만, 역사를 배경으로 한 팩션도 있었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있었다. 아름답고 멋진 그림, 거기에 시처럼 아름다운 대화, 그리고 줄거리의 끈을 놓치지 않는 주제의식까지. 나는 만화가 정말 종합선물세트라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황미나 작가님의 <레드문>은 아직까지도 내 책장에 손때 묻은 그대로 꽂혀 있고, 가끔 한 번씩 들춰볼 때마다 감동이 전해져 오니 말이다. 몇 년 전에 사서 아직 어린 아들이 볼까봐 숨겨두었던 <타짜>는 숨겨진 자신의 모양새가 처량해서 집을 나갔는지 그 길로 나조차도 찾지 못하게 되어서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다.

 

여튼! 이번에 내 품안에 온 이야기는 천하를 취하게 할 막걸리 이야기, <대작>이다. 스토리라인은 간단하고 또 익숙하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천하에 망나니 백수건달 안태호. 특별한 꿈도 의지도 없이 매일 술이나 부어라 마셔라 하며 할머니 속 썪이고, 동네사람들에겐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연히 친구 석배가 운영하는 파리 날리는 포장마차에서 할머니가 직접 빚은 막걸리를 내놓게 되고, 그 막걸리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할머니의 막걸리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자는 의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집에서 담근 술은 함부로 남에게 주어서도 안 되고, 더구나 팔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할머니마저 뺑소니차에 치어 운명을 달리 하시고,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국내 굴지의 주류 회사에 자신의 모든 막걸리 빚는 기술과 도구들을 5천만원에 넘기셨다. 모두가 태호를 위한 일이었지만 그 일로 태호는 또 다시 무기력한 상태가 되고, 그저 할머니의 막걸리 흉내만 낸, 이름 뿐인 할머니 막걸리가 자본을 등에 업고 판을 치게 된다.

 

주인공을 돕는 사람들. 주인공과 대치하는 인물들. 선한 이와 악한이의 대결구도. 망나니에서 제대로 정신차린 한 사람의 건실한 청년으로 변신하는 드라마틱한 구조는 심플하다. 5권이라는 것이 좀 아쉬울 정도로 빠른 전개였다.  그림도 멋지고, 캘리로 표현된 제목도 막걸리라는 주제에 걸맞게 한국적으로 보여서 좋았다. 중간중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술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곁들여져 있어 주류여행을 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세계의 술이 된 와인을 알기 위한 와인여행도 있는데, 막걸리라고 왜 안 되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항상 너무도 괜찮은 우리의 것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홀대하다가 남의 것으로 빼앗기곤 해왔다. 김치가 기무치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만화 하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불어닥쳐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된 막걸리라는 우리 술이 단순히 우리나라에서만 잠깐 인기를 끌다 사라지게 하지 말고, 우리나라를 알리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다른 효자상품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오버일까?

 

재미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짧은 만화 한 편을 통해 우리나의 정서를 느끼고 또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생각했따면 정말 오버인가? 뭐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관두고라도 약간 찌그러진 잔에 막걸리 한 잔을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켜고 싶어졌던게 사실이다. 맛있는 막걸리 한 잔이라면 특별히 다른 안주 없이 그저 또 맛있는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고 손가락을 쪽 빨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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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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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때, 작고 얇고 동화같은 표지를 보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졌다. 책을 손에 들고 가볍게 촤라락 넘겨보니 동화품의 일러스트가 여러 장 담겨 있었다. 뭔가 예쁜 이야기이겠구나 짐작되었다. 세상에 전쟁이 없었다면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들은  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1946년.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해이다.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지만 전쟁의 피해로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고, 도시는 어둡고 추웠다.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슬롱스빌의 거리. 부모를 잃은 아이들.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두 번 다시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된 사람들. 이도 저도 아니게 전쟁 통에 사라진 이들. 서로의 부모이고, 아내, 남편이고 자식들이었던 이들이 사라져 그저 조용히 땔감을 구하고 누군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조용한 눈길만이 전부인 시절과 거리. 아무 이야깃거리도 없는 이 슬롱스빌의 거리에 기이한 소문이 떠돈다. 바로 '가위소년'이야기. 가위소년은 이웃의 옷에 별모양의 구멍을 내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가위소년은 누구이고, 왜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슬롱스빌 시립 고아원에는 고아원 생활에 아무 불만도 없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고, 가장 힘이 센 아이도 아니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권위를 발휘하는 미셸이라는 아이가 있다. 상식과 농담 섞인 한 마디만으로 아이들 사이의 싸움을 해결해주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기쁨을 전해주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미셸이 사랑하는 에리라는 소녀가 있었고, 어느 날 밤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에리를 위해 미셸은 눈 덮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다 한 거지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는 별이 가득한 심장을 짜야 한다고 말한다.

 

"이 방법이라면 실패할 일이 없지.슬롱스빌에서 서로 다른 아홉 가지의 사랑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야한 한단다. 이 일을 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열흘이다. 그런데 더 어려운 일이 있어. 바로 그 사람들 모르게 옷을 별 모양으로 오려야 해. 아홉 개 조각을 모아 내게 가져오면 내가 그 별들을 꿰매서 별이 가득한 심장으로 만들어줄 테니. 그것을 에리에게 갖다 주면 된단다.......그 별 심장이 있더라도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는데......열 번째 별인 비밀의 별. 그게 있어야 다른 아홉 개의 별들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단다." - p36

 

많은 감정들이 죽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이 이야기는 한 편의 마법과도 같은 동화이다. 추운 길거리에 앉아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지나가는 고아에게 빵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말을 믿고 슬롱스빌 거리를 돌아다니며 진정한 아홉 개의 사랑을 찾는 미셸. 세상에 물들어버린 어른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모른 척 지났쳤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미셸은 그 어둡고 추운 슬롱스빌 거리에서 진정한 사랑 아홉 개를 찾아냈다. 낭만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사랑, 자식, 친구, 책, 동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그리고 그 아홉 개의 사랑을 엮어서 만든 별을 완성시켜줄 마지막 비밀은 바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반드시 표현해야 했다. -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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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싸리 정사 화장 시리즈 2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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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미스터리라고나 할까? 아마도 이야기의 배경이 다이쇼 시대라는, 이른 바 1912년에서 1926년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주인공들의 성향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뭔가 옛스럽고 그런 옛스러움이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배어 있어서 요즘의 사이코패스적 살인마에게서는 볼 수 없는 우아함 같은게 느껴진다.  렌조 미키히코의 화장(花葬) 시리즈 첫 편인 '회귀천 정사'에 이은 '저녁싸리 정사'에서는 <붉은 꽃 글자>, <저녁싸리 정사>, <국화의 먼지>라는 3편의 단편과 함께 작가의 유머 미스터리 연작이라는 <양지바른 과 사건부> 세 편이 더 실려 있다.

 

화장(花葬)이라는 것은 '꽃으로 장사지내다'는 뜻으로, 각 단편의 이야기 속에는 꽃이 복선이기도 하고, 트릭이기도 하고, 죽음의 메세지이기도 하며 때로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미스터리물이기 때문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고, 살인자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사이코패스적 살인마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즉 누군가를 강렬히 가지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욕심 등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어둠이 발현하고 그 어둠 안에 위태롭게 사랑이라는 것이 자리하여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조용하면서도 안타까운 사랑이 맺어지지 못해 화사하게 피어나지 못한 채 지고 마는 꽃처럼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죽음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고 그 이면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놀라운 반전이 자리하고 있다.

 

앞의 화장 시리즈가 품격있는 우아한 미스터리를 보여준다면, 뒤에 실린 <양지바른 과 사건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한가로운 다이토 신문사의 자료부 제 2과. 너무나 한가로운 나머지 따뜻한 볕을 즐길 여유까지 있다 해서 양지바른 과~라고 불리지만 어찌보면 비꼬는 듯 한 느낌이다. 사회부에서 한직으로 물러나 가족들과도 데면데면한 시마다 과장, 동료 기자와의 연애 사건으로 심사가 복잡한 아이코, 촐싹대는 쇼타, 집을 나간 아내를 기다리면서도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는 로쿠스케. 살인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 앞에 기이한 사건들이 나타나고 깨알같은 유머와 함께 그들의 지루한 일상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화장 시리즈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미스터리와는 반대로 가볍고 발랄한 대사와 코미디와도 같은 주인공들의 행동묘사가 재미있는 유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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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뮤직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5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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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시리즈 제 5편, 트렁크 뮤직. 책을 덮는 순간에 또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고독한 형사 해리 보슈의 또다른 사건 하나가 종결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아, 이 마이클 코넬리라는 작가는 정말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까지! 국내에 출간된 마이클 코넬리의 모든 작품을 다 가지고 있고, 다 읽었지만 조금 더 재미있다, 아니다 정도지 아직 크게 실망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작가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시리즈와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시리즈를 간혹 비교들 하기도 하고, 실제로 현재 스릴러 소설부분 수상이 코넬리냐 디버냐 하는 판이라 비교대상일 수 밖에 없는데 디버의 소설과 코넬리의 소설은 내가 보기에는 다르다. 일단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인 보슈와 라임은 해결방법 자체가 다르다. 보슈는 형사라는 동물적 감각에, 라임은 증거물에 의존한다. 보슈는 형사조직 안에 들어 있으면서 사건해결에 이런 저런 압박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라임은 경찰조직에게 도움을 주는 외부인으로 압박이 많지 않다. 보슈는 고독한 로맨티스트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만 늘 어떤 이유로 사랑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라임은 안정적이다. 전신마비라는 상황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사건 해결에도 감정적으로도 온전히 라임의 편에 서 있는 섹시한 여형사 아멜리아 색스가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범죄자의 유형이 다르다. 보슈는 사회적인 범죄, 조직적인 범죄를 많이 다룬다면 라임은 반사회적 성향의 사이코패스들을 많이 다룬다. 두 작품은 느낌이 너무 달라서 어떤작품이 더 좋은 스릴러물이냐, 보다는 어떤 작품이 더 내 취향에 맞느냐로 구분하는게 옳다고 본다.

 

사실적인 범죄와 경찰조직의 묘사, 거기에 다크 히어로라고 불리는 해리 보슈. 마지막 보이스카웃이랄까. 늘 경직된 조직생활에는 걸맞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보슈는 거칠고 감에 의존하는 하드한 형사다. 그렇지만 피해자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사건해결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우직한 심성으로 전진만 할 줄 아는 제대로 된 형사다. 개인적인 과거사로 인해 약간은 어두운 느낌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을 버릴 줄도 아는 로맨티스트. 1년만에 제대로 된 살인사건을 맡아 헐리우드 경찰서 살인전담팀으로 돌아온 보슈는 복귀 후 첫 사건이라는데 흥분하여 어느 때 보다도 활기차게 사건을 진행해 나간다. 단순강도사건으로 보였던 사건이 마피아와 관련된 사건으로 커지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스트립 클럽, 조직폭력배등으로 사건이 확장된다. 다른 보슈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찰관료주의, 도심 한 복판의 약자와 강자, 그리고 보슈의 연인이 얽히고 설켜있다.

 

처음 보슈 시리즈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범죄 스릴러가 가지는 사건해결방식,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전등에 눈이 더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슈라는 캐릭터에 이미 애정을 가진 독자라면 반전 따위는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고독한 아우라를 마구 풍기는 보슈의 담배연기를 따라 사건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보이고, 그리고 화려하게만 보이는 도시의 이면에 얼마나 안타까운 약자들이 많은지, 이 도시의 불빛이 그들의 삶을 빼앗아 밝히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단순히 사건 하나를 마무리 하고 끝내는 스릴러가 아니라 그 안에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의문이 들어 있고, 메세지가 들어 있는 코넬리의 작품. 역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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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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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소개 받은 건 <바보 아저씨 제르맹>이라는 작품 안에서였다. 제목에서처럼 바보인 제르맹은 책이라곤 모르고 그저 하릴 없이 공원에서 비둘기나 세고 앉았는 한심한 청춘이다. 그 공원에서 만난 어떤 지적인 할머니는  제르맹에게 소설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몇 권의 책 중에 이 작품이 들어 있었다. 나도 제르맹처럼 그 할머니에게서 책을 소개받은 것이다. 이렇듯 주변의 책 읽는 이에게서 소개받는 책과는 또 다른 느낌, 책 속의 주인공에게서 소개받는 책은 정말 굉장히 다른 느낌을 준다. 나와 그 주인공이 실제로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든단 말이다. 그렇게 만난 이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노인이고 연애 소설을 읽는다. 아마존의 엘 이딜리오라는 고장에서 살고 있다.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가득한 밀림 한 복판으로도 어김없이 문명은 찾아오지만 문명보다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건 노다지꾼들과 술병, 카메라로 대변되는 '양키'다. 그들은 단순히 원주민의 터전 뿐만 아니라, 정글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까지도 위협한다.

 

노인의 이름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그는 임바두라 화산 근처 산간지방에서 살던 동갑내기 돌로레스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가난한 생활 중에도 둘은 넘치는 사랑이 있었으나 아기가 생기지 않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마침 정부에서 아마존 유역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돌고 정부가 말하는 <약속한 땅>에서 새 출발을 하기로 한 안토니오 부부는 엘 이딜리오로 이주한다. 아마존의 땅은 무엇하나 일구기 어려운 땅이었고, 그들이 생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우기가 시작되자 안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삶에서 모든 것을 앗아갔고, 물은 무지막지하게 불어났으며 뿌리 채 뽑힌 거대한 나무 등걸, 부패한 동물들의 시체까지 휩쓸었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타난 원주민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그들에게 밀림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었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안토니오의 아내 돌로레스는 그 약속한 땅에서 두 해를 넘기지 못한 채 뼈를 태울 듯한 고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안토니오는 엘 이딜리오에서 노인이 되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들르는 치과 의사에게 갖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루는 '연애소설'을 부탁해 읽으며 살아간다.

 

무서운 우기가 다가오는 아마존. 우기를 감지한 암살쾡이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 남아 있는 숫살쾡이를 쏴죽이고, 새끼들의 가죽을 벗겨내던 '양키'를 시체로 만들어 보낸 암살쾡이의 복수가 마을을 위협하자, 마을 사람들과 노인은 암살쾡이를 사냥하러 나선다. 수색대와 함께 암살쾡이의 흔적을 찾던 중 밤을 만난 이들은 야영을 하게 되고, 그 어둡고 축축하고 또 언제 맹수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노인은 희미한 가스등 불에 비추어 연애소설을 읽는다.

 

"조금만 더 크게 읽으면 안 될까요?"

숫돌에 칼을 갈던 동료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는지 씨익 웃으며 채근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정말 관심이 있소?"

(중략)

새로운 음성이 끼어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에이 영감님도. 조금 더 천천히 읽을 수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잠자리에 든 두 사람까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p. 134~135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며 연애소설을 비웃던 사람들까지도 노인의 소설에 귀를 기울이는 이 장면에서 나는 왈칵 울음이 났다. 누구나 어린 시절과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옛날 이야기.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꼭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도,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신나는 모험이야기 등등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도 그런 '이야기들'로 천일을 버티고 목숨을 구한 뒤 왕비가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우리가 이야기라는 것을 잃는 순간 우리는 또한 꿈꾸기를 멈추게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이야기'라는 조그마한 숨구멍이라도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팍팍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술이나 담배, 기타 건전치 못한 오락들로 정신과 육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안토니오처럼 달달한 사랑이야기라도 한 편씩 읽으며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게다가 이 작품은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정말로 묵직하고도 많은 메세지를 담고 있다. 실제로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 책으로 티그레 후안상을 수여했는데, 이 상을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쳤다. 아마존의 숲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그들의 삶이 경제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숲과 함께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맹을 조직하고 전 세계에 그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노력했던 치코 멘데스는 앙심을 품은 지주에게 고용된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노년을 한가로이 연애 소설이나 읽으면서 지내는 안토니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가 아마존 강가에 작은 집을 짓고 홀로 외로이 연애소설을 외우다시피 천천히 거푸 읽어가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아마존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파괴되고, 숲을 그저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숲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아마존 원주민들과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년의 고독>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이 유행하던 남미의 문학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현실적이면서도 아마존이라는 대자연이 주는 매력을 마술과도 같이 풀어 낸 솜씨가 일품이며, 또한 암살쾡이와 인간과의 대립을 통해 스릴러 못지 않은 긴장감도 선물하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 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양키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적대감도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깊고 깊은 메세지의 울림이 있으면서도 이야기의 재미도 놓치지 않는 좋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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