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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이 작품을 소개 받은 건 <바보 아저씨 제르맹>이라는 작품 안에서였다. 제목에서처럼 바보인 제르맹은 책이라곤 모르고 그저 하릴 없이 공원에서 비둘기나 세고 앉았는 한심한 청춘이다. 그 공원에서 만난 어떤 지적인 할머니는 제르맹에게 소설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몇 권의 책 중에 이 작품이 들어 있었다. 나도 제르맹처럼 그 할머니에게서 책을 소개받은 것이다. 이렇듯 주변의 책 읽는 이에게서 소개받는 책과는 또 다른 느낌, 책 속의 주인공에게서 소개받는 책은 정말 굉장히 다른 느낌을 준다. 나와 그 주인공이 실제로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든단 말이다. 그렇게 만난 이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노인이고 연애 소설을 읽는다. 아마존의 엘 이딜리오라는 고장에서 살고 있다.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가득한 밀림 한 복판으로도 어김없이 문명은 찾아오지만 문명보다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건 노다지꾼들과 술병, 카메라로 대변되는 '양키'다. 그들은 단순히 원주민의 터전 뿐만 아니라, 정글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까지도 위협한다.
노인의 이름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그는 임바두라 화산 근처 산간지방에서 살던 동갑내기 돌로레스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가난한 생활 중에도 둘은 넘치는 사랑이 있었으나 아기가 생기지 않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마침 정부에서 아마존 유역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돌고 정부가 말하는 <약속한 땅>에서 새 출발을 하기로 한 안토니오 부부는 엘 이딜리오로 이주한다. 아마존의 땅은 무엇하나 일구기 어려운 땅이었고, 그들이 생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우기가 시작되자 안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삶에서 모든 것을 앗아갔고, 물은 무지막지하게 불어났으며 뿌리 채 뽑힌 거대한 나무 등걸, 부패한 동물들의 시체까지 휩쓸었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타난 원주민 수아르 족 인디오들은 그들에게 밀림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었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안토니오의 아내 돌로레스는 그 약속한 땅에서 두 해를 넘기지 못한 채 뼈를 태울 듯한 고열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안토니오는 엘 이딜리오에서 노인이 되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들르는 치과 의사에게 갖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루는 '연애소설'을 부탁해 읽으며 살아간다.
무서운 우기가 다가오는 아마존. 우기를 감지한 암살쾡이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 남아 있는 숫살쾡이를 쏴죽이고, 새끼들의 가죽을 벗겨내던 '양키'를 시체로 만들어 보낸 암살쾡이의 복수가 마을을 위협하자, 마을 사람들과 노인은 암살쾡이를 사냥하러 나선다. 수색대와 함께 암살쾡이의 흔적을 찾던 중 밤을 만난 이들은 야영을 하게 되고, 그 어둡고 축축하고 또 언제 맹수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노인은 희미한 가스등 불에 비추어 연애소설을 읽는다.
"조금만 더 크게 읽으면 안 될까요?"
숫돌에 칼을 갈던 동료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는지 씨익 웃으며 채근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정말 관심이 있소?"
(중략)
새로운 음성이 끼어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에이 영감님도. 조금 더 천천히 읽을 수 없어요?"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잠자리에 든 두 사람까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p. 134~135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며 연애소설을 비웃던 사람들까지도 노인의 소설에 귀를 기울이는 이 장면에서 나는 왈칵 울음이 났다. 누구나 어린 시절과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옛날 이야기.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꼭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도, 무서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신나는 모험이야기 등등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도 그런 '이야기들'로 천일을 버티고 목숨을 구한 뒤 왕비가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우리가 이야기라는 것을 잃는 순간 우리는 또한 꿈꾸기를 멈추게 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이야기'라는 조그마한 숨구멍이라도 만들어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팍팍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술이나 담배, 기타 건전치 못한 오락들로 정신과 육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안토니오처럼 달달한 사랑이야기라도 한 편씩 읽으며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게다가 이 작품은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정말로 묵직하고도 많은 메세지를 담고 있다. 실제로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 책으로 티그레 후안상을 수여했는데, 이 상을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쳤다. 아마존의 숲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그들의 삶이 경제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숲과 함께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맹을 조직하고 전 세계에 그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노력했던 치코 멘데스는 앙심을 품은 지주에게 고용된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노년을 한가로이 연애 소설이나 읽으면서 지내는 안토니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왜 그가 아마존 강가에 작은 집을 짓고 홀로 외로이 연애소설을 외우다시피 천천히 거푸 읽어가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아마존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파괴되고, 숲을 그저 이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숲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아마존 원주민들과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년의 고독>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이 유행하던 남미의 문학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현실적이면서도 아마존이라는 대자연이 주는 매력을 마술과도 같이 풀어 낸 솜씨가 일품이며, 또한 암살쾡이와 인간과의 대립을 통해 스릴러 못지 않은 긴장감도 선물하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 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양키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적대감도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깊고 깊은 메세지의 울림이 있으면서도 이야기의 재미도 놓치지 않는 좋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