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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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극장에서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정확한 줄거리가 기억나는 건 아니고 사무라이가 등장을 하고 그들의 긴 칼과 흰 눈위에 흩뿌려지던 피와 그 긴 칼이 사람의 살을 베던 소리가 너무 깊이 남았다. 그 이후로 칼싸움이 등장하는 영화는 선호하지 않았다. 칼은 그 어떤 살해무기보다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요 네스뵈의 신작 <칼>은 실제 범행도구로써의 칼에 대한 이야기와 동시에 우리가 간혹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할때처럼 은유적인 표현으로써의 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어디에 찔렸는지, 몇번을 찔렸는지에 따라 범행에 대한 프로파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뒤에서 몰래, 혹은 아주 근거리에서 또는 우발적으로, 방어를 하다가, 그리고 분노에 차서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일 수 있다면 가상의 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상에서 의미없이 던지는 악플도 칼이 될 수 있고, 이 작품 안에 등장하는 강간 피해자들이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면서 결국에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강간'이라는 것도 칼이 될 수 있다.

칼은 인류 최초의 도구고 인간은 250만 년에 걸쳐 칼에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어떤 인간들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운 도구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 집, 농사, 음식, 방어. 칼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새 생명을 창조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 이걸 이해하고 인류가 이뤄낸 결과와 그 기원을 수용한 자들만이 칼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사랑. 역시나 동전의 양면이다.

요 네스뵈 <칼> 24쪽

그토록 사랑하는 라켈의 집에서 쫓겨 나와 혼자 지내는 해리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술과 사건해결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쾌감만을 줄 뿐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의 흥분도 사건해결과 함께 사라지고, 술을 마시고 취하고 난 뒤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의 몸안에서 알콜은 그 생명을 다한 채 사그라든다. 라켈과 함께 한 모든 나날들이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꿈과도 같은 행복이었고, 그래서 불안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것만 같은 때의 불안감, 그녀와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망가지는 일 뿐이었다. 지독히도 외로운 남자, 해리.

그동안 행복했다. 행복은 헤로인과 같다. 한 번 맛보면, 행복이란 게 있는 줄 알면 다시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행복은 소박한 만족 이상의 무엇이므로. 행복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행복은 전율하는, 예외적인 상태다. 지속하지 않을 게 분명한, 초, 분, 말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의 슬픔은 뒤늦게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온다. 행복한 순간에 이미 다시는 이렇게 행복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사라진다는 지독한 진실을 통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빼앗기는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미리부터 걱정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그 능력을 저주한다.

요 네스뵈 <칼> 78쪽

'당신은 왜 나한테 와서 날 이렇게 외롭게 한 거야?'

요 네스뵈 <칼> 118쪽

전쟁터를 경험하고 온 사람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살인마들과 마주하는 형사들,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람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 혹은 밀어닥치는 응급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까지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때때로 그런 사람들 중에는 남들과는 다른 정의감에 누구보다 깊게 몰입하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슈퍼 히어로들도 어느 순간 빠지게 되는 자기혐오의 순간이 그들에게도 깊게 찾아온다. 내가 구해낸 사람보다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자책, 죄책감 그리고 자기혐오. 해리 뿐만 아니라 <칼>이라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애달픈 감정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어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과 비슷하게 형사들은 살인범을 잡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경험하는 카타르시스를 위해 뛰고 또 뛴다. 그러다 누군가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이 비록 법의 경계 밖에 있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잡아내는 것이 먼저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해리에게 잡혀 들어갔다가 출소를 한 스베인 핀네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해리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은 안 그래도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던 해리를 그야말로 진창으로 쳐박아 버렸다. 고생하기로 치자면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도 있고,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도 있지만 해리 홀레에게 그 정도 고생은 귀여울 정도다. 모든 걸 묻어버리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막다른 길에 놓인 해리에게 길을 열어준 건 늘 그의 곁에 있었던 음악이었다. 사건과는 별개로 등장인물들을 통해 풀어놓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고찰이랄까 통찰력이랄까, 그리고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음악과의 어울림까지, 요 네스뵈 당신이라는 작가는 정말!

뼛속까지 부패했지만 모든 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도덕률을 가진 사람. 그게 아주 멋졌다. 지독히 나쁠 수도 있지만 결국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나치와 공산주의자들도 저마다의 전쟁영화를 찍어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응원하게 유도했다. 무엇도 전적으로 진실이 아니고, 무엇도 전적으로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점. 관점이 전부다. 관점.

요 네스뵈 <칼> 155쪽

미드를 보면서 시즌 마지막화에서 화면 밖의 주인공과 총소리를 들어도 다음 시즌을 위한 떡밥이겠거니 한다거나 빗발치는 총알세례를 뚫고 지나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주인공 버프가 있으니 죽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처럼 해리가 결국은 그 진창을 해치고 나와서 마침내는 사건도 해결하겠지, 하는 믿음은 있었으나 어느 순간에는 그런 나마저도 '설마......'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을만큼 이 방대한 작품 안에서의 기류는 순식간에 돌변하기도 하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해리에게만큼은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일들이 매번 벌어진다. 생각해보면 가혹한 일들은 해리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아름답지만 망가진 해리를 사랑하는 여자들, 그리고 박애주의의 마음으로 그녀들을 밀어내지 않는 해리. 공포와 사랑도 동전의 양면이라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핀네가 남기고 간 주사위가 결정해 줄지도 모르겠다. 비록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고 결정한 그 길의 끝에도 해리를 괴롭힐 사건이 있을 것이 뻔하겠지만 말이다.

"책 같은 건 안 읽어, 홀레. 그래도 주사위는 가져도 돼. 자네한테 주는 선물이야.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운명이 결정하게 놔둬.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거야, 장담해."

요 네스뵈 <칼>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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