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단한 책의 저자인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이고 여성이고 이미 타계한 미국 소설가라고 한다. 1980년대에 이미 백인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SF 문학에서 각종 문학상을 석권하며 파란을 일으킨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라는 게 뭔가 부끄러웠다. 문학세상은 넓고 그렇게 놓치는 좋은 작품들도 허다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다행인 작품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199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아주 가까운 미래인 2024년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작품이 발표된 1993년이면 30년 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읽는 지금의 나에게는 바로 2년 뒤의 일이 된다.
열다섯의 로런은 로스엔젤레스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인 로블리도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 이야기는 2024년부터 2027년에 걸쳐 쓴 로런의 일기로 진행되는데, 로런은 약물중독이었던 엄마로 인해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누군가의 모든 감정부터 신체적인 고통까지 그대로 느껴야 하는 로런에게 현실은 그야말로 지뢰밭이다. 왜냐하면 로런의 마을은 더이상 아름답거나 부유한 마을이 아니고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며 모든 안락하고 평온한 것들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강도와 침입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인 아버지와 마을의 어른들은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들이 꿈꾸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로런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혹은 절대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세대가 아니다. 그녀가 경험한 모든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악화일로를 걸을 일만 남아 있다고 여기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로런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을 재정의하고 스스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하나의 종인 '지구종'의 창시자가 되려한다.
고작 태풍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을까? 농사가 엉망이 되는 바람에 굶주릴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게 하느님일까? 죽은 사람은 대개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떠도는 빈민이거나 경고를 너무 늦게 들은 나머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다. 그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는 도대체 어디일까? 하느님이 보기에는 가난도 죄일까?
심스 부인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 까닭은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 아빠와 마찬가지로 심스 부인 또한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토록 불탄다고 믿었다. 그렇게 성서에 적힌 말을 글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다. 그랬는데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못 버틸 상황이 되자 현실의 고통과 내세에서 겪을 영원한 고통을 맞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뭘 진심으로 믿기는 한 걸까? 그 믿음은 다 가식이었을까?
하느님은 거스를 수도 막을 수도 없지만, 형상을 빚어 구체화할 수는 있다. 그 말은 곧 하느님은 기도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도는 단지 기도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뿐인데, 그 마저도 그 사람의 각오가 더 굳어지고 더 또렷해질 때 얘기다. 그런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뿐이며 실질적인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빌려 하느님의 형상을 빚을 뿐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린 형상을 받아들이고, 그 형상 안에서 힘써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힘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이 승리한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우린 열다섯 살이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뭔데?"
"대비는 할 수 있어. 그게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대비, 그 일을 끝까지 견뎌낼 대비, 다 끝난 후에도 계속 살아갈 대비. 우린 살아남을 계획을 짜는 데 집중해야 해. 미친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악당,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도자 같은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으려면!"
모든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그렇듯 인간의 욕심과 이기주의가 끝을 보이기 시작할 때 어느 순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지구의 모든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튕겨져 나가는 그 순간 순식간에 몰락이라는 것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순간에도 서로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다 끝이 나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던 모양이다. 그 전쟁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전세계의 경제는 지금 과거 대공황 때와 비견할만 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워지고 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 인류를 위해 벌어진 전쟁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가리를 부딪치며 다투는 숫양 두마리보다 지적으로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투쟁은
본질적으로
권력 투쟁이며,
대개는
대가리를 부딪치며 다투는
숫양 두 마리보다
지적으로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
-<<지구종 : 산 자들의 책>>에서
요즘 경제를 가장 절실하게 실감하게 하는 것은 장바구니 물가와 주식시장이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매일 52주 최저가에 도달했다는 종목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한국도 망하고 미국도 망했냐는 말도 한다. 그만큼 세계경제가 쇼크에 빠져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인간들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본없는 혐오가 판을 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지구의 멸망이 코앞에 있는데 인간이라는 종이 그렇게 뻔하기만 할까, 라고 의심했지만 정말 소름돋도록 뻔하더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한심하도록 뻔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뻔한 인간이라는 종이 여태껏 문명을 이루고 살아 온데는 또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디선가 누군가 씨 뿌리는 사람이 있는 한, 어디선가 백 배의 열매가 맺히리라는 믿음 말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누가복음> 8장 5~8절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584~5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