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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도시’시리즈
주제 사라마구(이하 저자)의 ‘…도시’시리즈는 인간 욕구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인간 사회 전체의 부조리를 저자의 상상력과 특유의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의 메시지는 소설 전면에 드러나기 보다는 소설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슬며시 떠오른다. 전작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가 현실 기반의 마술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욕구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냈다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특별히 ‘마술적’이라 표현할 만한 현실을 넘어선 기교가 없고, 전작에서의 타인에 의해 붙여진 ‘남자’,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같은 호칭이 아닌 개인의 이름을 등장시켰다는 것이 주인공 한 사람에 한 한 것이지만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도시’시리즈에서 전작과 그 서사 구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이 멀지 않은 한 사람을 전면에 내새워 마술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고, 《눈먼 자들의 도시》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시민(대중)과 소수 정치적 지배자들의 대립적 상황을 통해 깊이를 얻었다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는 한 개인의 심리 변화와 행동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서사로 저자의 집필 구조를 보건대 저자는 ‘사회-정치-개인’이라는 구조적 틀을 가지고 ‘…도시’시리즈 썼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이름) 삶의 가치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의 핵심 서사 구조는 한 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호적상의 변화가 생기는 일을 관리하는 중앙 호적 등기소에서 일하는 사무보조원 주제 씨가 남몰래 유명인의 신상을 수집하던 중 우연히 알지 못하는 여자의 서류를 얻게 되고 그 여자를 찾아 여자의 삶을 되짚는 것이다. 주제 씨는 여자를 찾기 위해 주소지의 집을 찾고 여자가 다니던 학교를 알아내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자의 삶이 지나온 굴곡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왜 주제 씨는 자신이 수집하던 유명인이 아닌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데 여기에 이 소설의 메시지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으로 관리되어 온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자기 이름보다는 자신의 모든 정보를 집약한 13자리 숫자와 붙여진 이름(호칭)으로 살아간다. 저자는 유명인이 아닌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사람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주제 씨가 전혀 알지 못하던 여자의 삶을 파헤치는 것에서 보았듯이 많은 나름의 굴곡과 삶의 명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세상엔 등기소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의 양보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사람들 중 대다수는 주변을 제외하고 이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극소수의 유명인들을 제외하고 한국에 살고 있는 아무개가 남아메리카 공화국이나 에콰도르, 미국, 프랑스 시골에 살고 있는 한 개인의 이름과 그의 삶에 대해 알기는 힘들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지만 극소수의 유명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이름 없는 자들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으며 유명인들로 인해 그들의 삶이 저급하다거나 유명인을 좇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고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비와 등기소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서류를 같은 곳에 보관하기로 결정하는 결말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직접적으로 이런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은 아닌데다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의문이 남게 되는 부분이 많지만 소설 전체에 흐르는 어휘와 문맥, 상황의 연계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각하기 떠올리기 어려운 메시지는 아님이 분명하다. 세상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이며 이름 없는 자들에게 존경과 진심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상호적인 세상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