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신문 읽기의 혁명’은 보다 큰 범주에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의 근본적인 원인 구조를 바로 보는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 경찰이 시민을 때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시민이 경찰을 때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본다면 서로 맞았으니 단순하게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문사들이 서로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 및 단체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여름 땡볕과 장마 속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에 대한 언론사들의 왜곡보도에 대해서 널리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사실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사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파적인 왜곡보도를 서슴지 않는 언론사들의 보도를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역학관계는 변함이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질타가 아니라 그 사실을 왜곡하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개인의 좁은 범주에서 사람은 “믿음, 소망, 가치관”에 의해 특정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개인의 좁은 범주가 엮여 사회라는 넓은 범주가 되면 그 사회의 주된 가치판단은 그 사회가 어떤 경제적 체제(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 경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특정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원인은 물질적 관계, 즉 자본에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을 소유한 자들의 ‘자본 권력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 책 《신문 읽기의 혁명》의 핵심은 언론 자본의 권력 구조와 그 권력에 의한 신문 ‘편집’의 강제와 왜곡에 대한 이해다. 재미는 있지만 신문을 비롯해 언론에 대한 이 책의 다른 내용들은 핵심내용에 따른 분석과 신문을 주체적으로 읽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이 담긴 문장을 내 나름대로 ‘편집’해서 인용하겠다.
“‘객관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종종 신문 또한 사회 속의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러나 신문은 그가 속한 사회 속의 여러 상호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 나아가 신문은 언제나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긴밀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실제 신문 기사를 인용하면서 언론 자본의 권력 구조에 따른 신문들의 기사 왜곡과 편파 보도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의 권위에 눌려 맹목적으로 신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신문 읽기의 변화에 대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래서 10월 25일 토요일, 광화문 시내의 가판대에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을 구입해 표제와 기사 편집 시의 비중을 살펴보았다. 모든 신문의 1면 기사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기사는 “금융위기”로 인한 코스피 지수 1000선의 붕괴에 대한 기사였다. 다루는 사건은 같았지만 1면 표제는 각 신문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가령 <조선일보>는 “공포가 <코스피 지수> 1000 무너뜨렸다”를 표제로 하고 있고, <경향신문>은 “코스피 대폭락 1000선 붕괴”를 표제로 했다. 분명히 <조선일보>가 사용한 단어와 <경향신문>이 사용한 단어는 차이가 있다. 1면 톱기사의 표제와 발맞춰 <조선일보>는 앨런 그리스펀이 자신의 이론에 허점이 있었고, 금융위기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기사의 표제는 “‘경제의 神’ 고해성사하다”로 했고 중간 제목은 “18년간 FRB 의장으로 군림했던 앨런 그리스펀…이젠 금융위기 부른 주범으로 美청문회선 온통 성토 · 비난…“백년 만에 한 번 있을 신용 쓰나미 저도 충격…잘못 있었습니다”로 했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다른 신문들이 “그리스펀 반성”과 같은 표제를 쓴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고해성사”, “군림”, “경제 위기를 부른 주범”, “…잘못 있었습니다”와 같은 선정적인 표제를 사용했다. 신문을 입체적으로 읽어보자면 1면 기사의 표제의 “무너뜨렸다”와 앨런 그리스펀에 대한 기사의 표제로 볼 때 <조선일보>는 마치 현재의 금용위기가 누군가에 잘못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보일 수 있게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 2008년 10월 25일
<경향신문> 2008년 10월 25일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하면 위와 같이 표제만을 비교하는 단편적인 비교가 아니라 전체 지면과 사설의 관계, 언론사 자본 권력 구조까지 고려한 입체적인 신문 읽기가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신문을 읽는 이유는 왜곡되고 편향된 가치판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 제시한 문제 해석의 틀은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기본 틀로 적용할 수 있다. 신문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도 이 책의 핵심 주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그 때문이다. 편향된 보도와 사실 왜곡을 서슴지 않는 언론은 혐오스럽다. 악취가 나는 언론 정보의 쓰레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각자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