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희생 -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희생의 논리

1. 과거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이름 모를 사람들에 대해 형식상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사람들의 노력으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의 희생을 민주주의를 향한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다카하시 데쓰야가 던지는 궁극적인 의문이 바로 이런 것이다.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 단순하게 보면 우리가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이들을 ‘호국 영령’이라 추모하는 것과 일본의 야스쿠니 참배의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바로 ‘희생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2. 민주화 운동과 다르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침략 전쟁과 권력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맥락의 왜곡이 엄연히 존재한다. 일본을 위한 침략 전쟁에서 타국의 시민을 무자비하게 사살한 전범들도 신사에 영령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이는 결국 침략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가 아니면 무엇인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호국 영령’을 기리는 장소가 대표하는 숭고한 희생의 논리는 전쟁의 참담한 일상을 은폐하고 국민 전체를 지속적인 전쟁 협력의 일원으로 동원하는 방법인 셈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국민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려는 목적을 지닌 숭고한 희생의 논리는 명예와 정당성을 갈구하는 인간의 근본 욕망을 자극함고 절대적 권력 혹은 인간이 정확하게 그 실체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어려운 범접할 수 없는 존재 혹은 관념의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히틀러가 항상 노을이 지는 즈음에 연설을 시작했다는 설과 나치 전당 대회에서 쏘아 올린 빛의 기둥의 스펙터클함과 다르지 않고, 인간 이성의 한계와 그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이지도 않는 신이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것과 같다.

3.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렇게 일상의 맥락에서 구분하여 생각하기 힘들게 된 희생의 논리를 ‘숭고한 희생’과 ‘타락한 희생’으로 나누어 생각한 칸트로비츠의 글을 인용하여 분석하고 있다. ‘자기희생’이라는 관념을 고귀하고 숭고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 칸트로비츠는 고대 국가와 중세 봉건 국가에서의 ‘조국을 위한 희생’을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숭고한 희생이라는 것은 당대의 정치, 경제적 권력의 헤게모니를 쥔 이들을 위한 죽음으로 타락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희생에 숭고함은 존재할 수 없으며 타락한 희생은 결국 아무런 의미 없이 존재가 지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생을 숭고와 타락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과 전쟁의 정당성과 전정에서의 정당성으로 전쟁의 정의를 두 단계로 분석하는 것은 “희생의 구조가 일상적인 구조 그 자체일” 때 ‘어떤 희생인가’란 의문을 던짐으로써 부당한 것들의 정당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4. 다시 한 번 다카하시 데쓰야가 던지는 궁극적인 의문을 상기해보자.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 이 질문의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다카하시 데쓰야의 한계인 동시에 시대의 한계인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희생의 폐기는 불가피하지만…우리는 ‘절대적 희생’의 구조 속에서, 그러나 모든 희생의 폐기를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동시에 (책임감 있게)결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5. 희생의 논리가 일상의 맥락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니 여간 골치 아프고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현상이든 그것을 투명하게 보려고 노력한다면 부당한 것들의 정당화에 속아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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