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책을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강유원은 이상적인 세상엔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가 필요 없으며, 병이 없으면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책을 읽는 행위는 나무로 만든 종이를 소비함으로써 세상을 훼손하는 행위고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병든 사람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억지 같지만 일리가 있다. 자연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반면에 책을 읽는 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 비해 극소수임과 동시에 자연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세계를 파악하려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눈이 하나인 나라에 사는 눈이 둘인 사람처럼 병든 사람들이 된다. 책을 읽는 행위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되돌아봄과 같은 행위일 것이다. 이른바 ‘자기반성’이다. 다시 풀어쓰자면 강유원은 책을 읽는 행위가 자기를 반성하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책을 읽고 쓰는 사람의 수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수에 비해 절대 소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책을 읽는 행위는 하나의 음모에 불과할 수 있는 허무한 것이라고 말한다. 텍스트 책은 수많은 매체 중 하나일 뿐이고, 책 속에 있는 문자로 이루어진 어떤 정보들은 큰 의미에서 이른바 텍스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책은 넓은 의미에서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강유원은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가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는 세계를 희롱하고, 텍스트 자체로서 일정한 힘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 와중에 세계와 전혀 일치하는 점이 없는 텍스트까지도 생겨났다고 말한다. 세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텍스트 때문에 세계와 텍스트의 컨텍스트, 즉 세계와 텍스트의 전후좌우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해법은 인류의 통상적인 시간 순서에 따라 텍스트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강유원은 주장한다. 그 텍스트가 언제 어디에서 편집되었을지 모르지만. 고전 통상적인 시간 순서에 따라 텍스트와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읽게 되는 것은 이른바 고전이다. 강유원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부터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까지를 고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그가 이 두 텍스트와 그 사이까지를 고전이라고 일단락 지은 것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고전은 당대를 비롯해 그 이후까지 세계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용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히 재검토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텍스트는 사라지고 어떤 텍스트는 살아남아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책과 세계 이 책은 어디까지나 통상적인 시간 순서와 서양의 고전 텍스트를 위주로 고전 읽기를 자극하고 사라져야 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지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을 핥는 독서가 아닌 진득하니 앉아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당대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사람, 쉽게 말해 고전을 읽어야겠는데 무엇을 읽어야 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텍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