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겠지만, 신은 죽음과 대척점에 있기에 나는 그곳으로 절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어둑어둑한 언덕과 칙칙한 벌판, 그 사이를 천천히 움직이는 하얀 그림자를 상상해보았다. 어떤 이는 생전에 사랑했던사람들과 손을 잡고 걸어갔다. 또 어떤 이는 사랑했던 사람들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 확신하며 기다렸다. 사랑한 적 없었던 사람들, 삶이고통과 공포로 얼룩졌던 사람들을 위해서는 레테라는 시커먼 강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강물을 마시면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위안인가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천 년을 관통하는동안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나와 닮은 이들만 남을 것이다. 올림포스의 신과 티탄 신족, 내 여동생과 남동생, 나의 아버지.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길 하나가 내 발치에서 갑작스럽고 선명하게 열렸던 그 옛날, 내가 마법을 처음 배우던 시절 같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몸부림치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이 얘기했던 것처럼 내 안에는 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창백한생명체가 시커먼 심연 속에서 내는 속삭임이 들린 듯했다.
그럼 아가, 다른 걸 만들려무나.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지금 준비가 안 되었다 한들 언제는 준비될 수 있을까? 심지어 산꼭대기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가 내 섬의 이 노란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마주하면 그만이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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