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 저는 정신과 레지던트입니다.

후원사들은, 정신과 의사들이 참석하는 학회 일정이 어찌된 일인지 항상 점심시간과 겹쳐 있는 관계로 요리가 있는 향연을 만들게 된다. 뉴욕의 정신과 의사들은 메리오트 마르퀴즈 호텔에서 프로작을 만든 릴리사의 호의로 주로 점심식사 때 조울증에 대해 알게 된다. 팍실을 만든 GSK가 후원하는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의 점심식사 때는 주부 우울증에 대해 설명을 듣고, 화이자가 후원하는 저녁 심포지엄에서는 루스벨트 그랜드볼룸에서 일반적인 불안장애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이 현대 의학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 본문 p.122.

현대 의학의 적나라한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국적제약회사와 의사들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파헤치는 이 책을 읽는 와중에도, 나는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정신과 수련을 시작한 후 내가 비싼 호텔요리를 먹은 때는 모두 제약회사가 제공해줄 때 뿐이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이 책이 고발하고 있는 부패한 의사 중 하나다. 자존심을 팔아 돈을 버는 의사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내 심기는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잘못하고 있다"고 매 페이지마다 질책하는 저자들의 목소리를 견디는 것은 곤혹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자 홍혜걸님이 말했듯, 이 책은 누군가는 번역해서 국내에 소개해야 했고, 한국의 의사들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마케팅 전략 1 심장마비와 돌연사의 주범으로 몰아라|고콜레스테롤
마케팅 전략 2 정상 범위를 좁혀라|고혈압
마케팅 전략 3 젊은 여성을 새로운 위험군에 포함시켜라|골다공증
마케팅 전략 4 약물 치료가 필요한 정식 질환임을 강조하라|과민성 대장증후군
마케팅 전략 5 마음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시켜라|우울증
마케팅 전략 6 모든 여성을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어라|월경 전 불쾌장애

마케팅 전략 7 정상적인 노화 과정도 질병이라고 믿게 하라|폐경
마케팅 전략 8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질병을 브랜드화하라|사회불안장애
마케팅 전략 9 환자와 그 가족들을 통해 병을 홍보하라|주의력 결핍장애

마케팅 전략 10 새로운 시작을 개척하라|여성 성기능장애

위의 책 목록을 보라. 참 부끄러운 것은, 제약회사와의 검은 커넥션에 연루되었다고 저자들이 고발한 중요 질환 10가지 중에 4가지나 정신과 질환이라는 것이다! 본문에 직설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정신의학과 제약 회사 간의 긴밀한 관계는 매우 악명이 높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 뇌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중추신경계의 중요한 병태생리학이 21세기 들어 큰 진전을 보이고 있고, 이 때문에 중추신경계 작용 약물들이 제약회사들의 매우 중요한 사업분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정신과 질환의 진단이 다른 과들에 비해 임상의사들의 판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과 진단은 혈액검사나 방사선영상검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임상의사 자체가 진단도구인 셈이며 그만큼 주관적이란 말이다. 그러니, 질환의 정의 자체를 확장시키고 싶어하는 제약회사들로서는 의사들 자체에 관심을 두고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진료 중에 이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마음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약을 제 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신분열병 환자나 조울병 환자의 경우 이 같은 환자교육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실제로 약물복용이 1차치료 전략이다. 하지만, 다른 질환들에대해서도 은연 중에 저 말을 중요시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스스로 제약회사의 판매원이 된 듯 하여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검은 커넥션에서 리베이트 같은 저급한 방법은 실제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적발하여 실정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다. 이 책도 그러한 불법적 거래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제약회사가 그냥 약을 많이 파는데 만족하지 않고, 질병을 정의하고 치료방침을 마련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통제하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로렌 모셔 박사가 지적했듯, 우리를 질리게 하는 것은 부정적 협력과정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협력관계가 정신의학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약물로만 환자를 치료하려는 편협한 관점이 우리를 질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우울증의 발병원인을 세로토닌 불균형으로만 설명하여 선택적 세로토닌 흡수 저해제(SSRI)만 처방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은 잘못된 의료행위다. 우리는 진료 과정 중에 수많은 삶의 요인들이 환자들의 기분을 좌우하고, 제대로 된 면담만으로도 환자의 증상이 경감되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럼에도 제약회사들은 끊임없이 세로토닌과 수용체의 문제들을 의사들에게 반복 설명하고, 환자들에게 약만 잘 먹으면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양 광고한다.

더욱 큰 문제는 정신의학의 중요한 연구들이 제약회사의 후원 하에 이루어지고 있고, 젊은 의사들이 한 수 배우기를 원하는 수 많은 대가들이 제약회사의 후원 하에 학회에서 발표한다는 것이다. 정신의학회에 가면 점심시간에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식사를 먹으며 진행되는 강의가 가장 알차다는 얘기는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검은 커넥션이 단순히 의사들의 지나친 탐욕 때문에 성립된 것은 아니다. 제약회사에서 가장 공을 들여 무료식사와 간식, 선물을 제공하려는 대상은 대형병원의 전공의들이다. 수련 중인 전공의들에게 자기 회사의 약을 많이 광고하고 수련과정에서부터 많이 쓰게 만들면, 그들은 전문의가 된 후에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익숙한 약을 계속 처방하게 된다. 젊은 전공의들이 제약회사의 선물공세에 약해지는데에는, 이 검은 커넥션이 작동하는 근본 메카니즘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전공의들은 밥 먹을 시간, 잠 잘 시간조차 보장되지 않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평균 19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고 산다. 이들에게 "잘 나가는 의사"라는 미사어구는 21세기 한국 사회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오해일 뿐이다. 이런 박봉 속에서 공짜로 제공되는 일상의 소소한 선물들을 거부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 또한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식사를 먹을 때마다 오늘 하루 식사비를 줄여 다행이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해도 이것이 오늘 하루 내가 전공의로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다.

이 책은 단순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 의사들에게 "내부고발자"가 되어달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제약회사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의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5만명의 회원이 소속된 미국의과대학생연합은 "No Free Lunch" 캠페인에 고무받아 제약회사로부터 모든 형태의 선물 공세를 근절시키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인 "제약회사로부터의 자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정말 훌륭한 청년들이다. 학생 때 그렇게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외쳐대던 내가 기껏해야 "주는 것 마다 말고 누가 준 것인지는 잊어버리자"는 소극적 자세로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그들은 보석같이 소중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내일 당장 '당신들이 주는 식사는 먹지 않겠습니다'고 얘기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내 지갑이 너무 얇다. 하지만, 괴로움을 감수하고라도 의사들이 이 책을 한 번씩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당장에 현실을 뛰어넘을 용기가 없다 하더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잊어서는 안 될테니.

나는 희망한다. 사보험회사로 세어나가는 엄청난 액수의 보험금과 제약회사로 세어나가는 엄청난 액수의 약값을 국민건강보험으로 환수시켜 환자들의 보험혜택을 늘이고, 동시에 의사들의 진료비를 높일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의사들이 제약회사가 던져주는 떡고물을 받지 않도고 떳떳하게 보람을 느끼며 진료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가 쓸데 없이 낭비하는 어머어머한 의료비 규모를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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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2-19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unbelievable 2008-01-2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믿을 수 없군요. 정신과 의사 중에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는 직,간접적으로 많은 정신과 의사를 만났고 특정 정신과 질환 국내 No.1이라는
교수님 2분도 뵌적 있습니다. 단 1명을 빼고는 omentie님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정신과 의사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1명은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더군요. 아직도 사실 믿을 수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중에 당신 같은 사람-문제의식을 가진-이 있다는 사실을요...

바다기린 2008-04-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들의 진료비가 낮은가요? 내부사정을 모르는 평민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의학계도 양극화는 아니더라도 소속에 따라 소득이 다를 거다라고는 생각하지만요.
지난 번 뉴스후를 보니 제약회사의 떡고물은 다분히 한국적 관계가 만들어낸 산물같더라구요. 진료비가 높게 책정된다고해서 풀릴 문제는 아닌 것 같다라는 거죠. 태클을 걸었습니다. 이해를 해주실 것 같아서요. ^^:
윗분 말씀처럼, 의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행이라 생각이 들어요. 조금 더 많은 지면에서 만나 뵈었으면 하네요. 무상의료가 되는 그날까지 힘써주시길...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