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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에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이미 장르 구분이 필요없는 시대에 발을 들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액션, 코미디, 스릴러, 고어, '공상'과학 등의 장르 요소가 잔뜩 섞인 그 영화를 한 요소만 떼어서 '이것은 어떤 장르의 영화다.'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 영화의 다른 모든 요소는 무너지게 될테니까. 재스퍼 포드의 <제인 에어 납치사건>은 바로 그런 장르 혼합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대체역사SF라고만 알고 읽기 시작했던 이 작품은 팬터지, SF, 형사물 등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복합소설이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크림전쟁이 백 년 이상 지속되는 가운데 문학 작품에 미쳐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1985년의 영국에서, 문학 관련 범죄를 담당하는 수사관 서즈데이 넥스트Thursday Next는 희대의 악당 아케론 하데스를 쫓는다. 죄목은 찰스 디킨스의 『마틴 처즐윗』 원본 절도. 뭐, 거기까지는 좋다. 고서를 박물관에서 귀히 보관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게 사라졌으면 절도범을 쫓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절도범이 원본 속의 인물을 꺼내다 죽여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본들의 내용이 바뀌었다면 슬슬 곤란해진다.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인 에어>의 원본 속에서 주인공 제인 에어가 납치돼서 <제인 에어>의 뒷부분이 몽땅 지워졌다면(<제인 에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므로 주인공이 사라지면 끝이다.)?
이와 같은 재스퍼 포드의 발랄한 상상은 매력적인 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와, 역시 그 매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여러 조연들, 그들이 보여주는 유쾌한 유머 감각, 그리고 그 줄거리 만큼이나 황당한 세계관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잘 짜여진 이야기로 완성된다. 상상 속에서만 붕붕 떠 다니는 허황된 소리일 것 같다고? 설마. <제인 에어 납치사건>은 현실을 유쾌하게 비틀어 허구를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행복한 소설읽기를 가르쳐준다. 허구에서 기쁨을 느끼고 낄낄거리며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아무 곳에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 아낌없이 추천하련다.
송경아 씨의 번역은 원어의 느낌을 살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며, 그 결과도 만족스럽다.(특히 141개에 달하는 주석은 책을 읽어나가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나처럼 무지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참, p.77 l.1의 SO-4는 SO-14의 오타, pilgrim 님께서도 리뷰에서 언급하신 바 있는 p.473 l.15의 '세번째 이야기'는 '삼 층'의 오역이니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