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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과학소설(SF:Science Fiction-이걸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는 녀석은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덩달아 따라하는 거겠지만, 세상에는 '몰랐습니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굉장히 많다.)이다. 그것도 제법 진부한 소재-시간 이동을 소재로 한.
특히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시간 이동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타임 패러독스-을 소재로 삼고 있다. <타임 패트롤>이라든가 <백 투 더 퓨처>같은 작품들이 워낙에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놔서 도통 뭐 더 나올만한 이야기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이러한 진부함의 난관을 의외의 방식으로 헤쳐나간다. 이름하여 '수다', 그리고 '로맨스'.
역자 해설에도 나와있듯이, 본 작품의 작가 코니 윌리스는 시종일관, 주리줄창 이어지는 수다로 독자를 압도한다. 영국 특유의 비꼬는 듯한 유머는 매 페이지마다 발견되고 온갖 문학 작품에서 따온 인용구가 책을 수놓는다.(737페이지짜리 이 소설에 달린 역자의 주석은 251개이며, 장담하건대 그 중 절반 이상은 인용구에 대한 설명이다.) 특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책의 곳곳에는 주인공 헨리 네드의 잡상이 널려있다.
내용을 보자.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된 21세기 중반, 과거의 성당을 복원하는 작업에 투입된 역사 연구가 헨리 네드는 과중한 업무로부터 벗어나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19세기 옥스퍼드로 간다. (21세기에서 쉴 수 없는 이유는, 눈에 불을 켜고 역사 연구가들을 찾아다니며 혹사시키는 악덕 고용주-엄밀히 말해 고용주는 아닌 듯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굳이 19세기 옥스퍼드인 이유는 읽어보면 안다.) 그곳에서 그는 실수로 어느 남녀의 만남을 방해하게 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불확실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7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동안 헨리 네드는 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만가지 잡일을 하고 다닌다.
자아, 보시라. 남녀의 만남을 방해함으로써 생긴 실수를 교정하는 방법은 남녀를 다시 만나게 하는 것. 헌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다른 이와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 오오, 통재라. 결국 우리의 주인공이 할 일이란 이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커플을 찢어다가 제각기 원래 만나기로 되어 있는 임자를 만나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임무에는 아리따운 여자 역사 연구가도 동참. (오해의 여지가 있다. 주인공은 분명히 남자 역사 연구가 헨리 네드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 역사 연구가 베리티가 흔히 그렇듯 남자의 옆에 서 있는 보조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인 것은 아니다.)
결국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그 바탕에 타임 패러독스라는 SF 개념을 깐 수다스러운 장편 로맨틱 코미디 소설이다. 오오, 그렇다고 폄하하지는 마시라.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플롯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일품. (여담이지만, 그토록 골빈 여자들이 살았던 시대도 있었다니. 빅토리아 시대라는 건 그 이름만큼 영광스러운 시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코니 윌리스 여사의 수다스러운 유머 감각도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나같은 경우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휴고 건즈백의 이름이 박힌 상을 받는 건 아무 소설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