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아웃핏 시공그래픽노블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 / 시공사(만화)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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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편 『헌터』와 비슷한 스타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했는데 이런 변주가 나오는구나.

 전편에서 한바탕 뒤집어진 조직 쪽이 자신을 쫓아오자, 파커는 역으로 조직을 뒤엎기로 한다. 그것도 혼자서 엎는 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야, 거기 조직 업장 있댔지? 거기 좀 털어줘.' 하는 식으로. 그런 다음 서술자가 잠시 파커에게서 벗어나 몇몇 사례를 직접 소개하는 대목이 멋지다. 아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리처드 스타크)의 원작에서도 어느 정도 스타일 변주가 있을 테지만, 그래도 소설이라는 형식의 한계상 이 그래픽 노블만큼 표현이 다채롭지는 않았을 듯하다. 다윈 쿡은 아예 시각적 형식까지 달리하면서 각각의 이야기를 독립된 단편 범죄 만화처럼 다룬다. 범행 과정을 잡지의 르포처럼 묘사하기도 하고, 사기 과정을 제품 사용설명서처럼 찬찬히 나열하기도 한다. 특히 번호 맞추기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파커 개인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사회의 시스템을 더듬어 보는 쾌감마저 있다. 이런 스타일로 아예 논픽션 범죄 만화 같은 것도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마틴 스콜세지의 〈카지노〉 같은 만화는 어떻습니까?

 『헌터』 영화판인 〈포인트 블랭크〉에서 적극 다루었던 범죄의 기업화를 반대 방향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회계사가 장부를 들고 와서 운영을 논의할 정도로 합법화된 형태의 기업형 범죄 조직. 그런 조직에 몸담고 일하는 사람들의 심리. 그리고 그 맹점으로서의 파커. 〈포인트 블랭크〉가 직접 총을 들고 날뛰는 과거의 갱스터가 현대 사회의 조직망 속에서 설 자리를 잃은 모습에 관해 말한다면 『아웃핏』은 거꾸로 일을 나누고 책임을 넘기며 모든 일에 간접적으로만 관여하는 현대적 조직 체계가 직접적인('원시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 타격 앞에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그냥 졸라 짱 센 주인공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다 패버리는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할 수도 있을 테지. 그래도 규정과 대리인, 책임의 분화로 점철된 현대의 집단에 곧잘 느끼게 되는 불신을 생각하면 쉬이 넘기지 못하겠다.

 미국에서는 시리즈가 두 권 더 나왔고 분위기상 쿡이 이후로도 계속 파커 시리즈를 그래픽 노블로 옮길 것 같은데, 모쪼록 한국어판도 계속 나와주면 좋겠다. 안 팔릴 게 빤히 보여 그게 걱정. 정말 멋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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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시공그래픽노블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 / 시공사(만화)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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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범죄 소설계의 거목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쓴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 『The Hunter』를 원작으로 삼아 만화가 다윈 쿡이 각색하고 그린 그래픽 노블. 원작 소설도 동서문화사에서 『인간 사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출간하여 아직도 구할 수 있으나, 2000년대 들어 범죄 소설 붐이 일자 베른 협약 가입 이전에 냈던 일본어 중역본을 그대로 다시 내는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의 행태가 괘씸하여 일부러 읽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는 존 부어맨 감독이 1967년에 발표한 영화 〈포인트 블랭크〉, 그리고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이 각각 1999년과 2007년에 내놓은 〈보복〉 극장판과 감독판으로 친숙한 작품이다. 원작을 접하지 않은 채로 각색작만 네 편째 만나는 것도 드문 경험이지 싶은데, 다행히 그간 마이클 코넬리를 필두로 하여 현대 미국 스릴러 소설을 다수 출간해 온 바 있는 RHK에서 올해 안에 파커 시리즈도 본격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라니 무척 기대하고 있다.

 애인과 동료에게 배신당한 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범죄자 파커가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그 단도직입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나는 하드보일드 계열 작품에 함부로 '남성적', '냉혹무비', '마초'와 같은 수식어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파커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그와 같은 편견에 철저히 부응하는 캐릭터다. 어쩌면 이 캐릭터의 과격함이 그토록 유명하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드보일드 세계가 원래 다 그렇게 마냥 살벌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하드보일드라고 해도 파커와 필립 말로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단 말인가.

 다른 한편으로, 파커는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에 나오는 자의식적 마초와도 다르다. 그는 자신의 강맹함을 전시하거나 되새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자신에게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씬 시티』의 하드보일드가 하드보일드라는 세계에 매혹당해 '나도 하드보일드 할 거야!'라고 외치는 유형의 하드보일드라면, 파커는 자신의 롤 모델을 찾거나 자신을 무어라 규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행동에 나서기 전에 '세상은 이래라저래라 말하지만 나는 좆도 신경 안 써!' 라고 계속해서 되뇌는 자와, '나 이거 한다.' 라고 통보하기만 하는 자의 차이랄까.

 존 부어맨-리 마빈 팀은 〈포인트 블랭크〉를 통해 이 '올곧은' 하드보일드를 갱스터 장르에 대한 성찰로까지 밀어붙여 자아성찰적 초현실주의 필름 누아르로 완성해내어 원작자의 찬사를 받기에 이른 바 있지만, 다윈 쿡은 그런 야심을 접어두고 다만 원작의 거칠거칠한 성정을 고스란히 옮겨내는 데에만 주력하기로 한 듯하다. 영화로 따지면 헬갤랜드의 〈보복〉 감독판과 비슷하달까. (〈보복〉은 1999년 첫 공개 당시 대스타였던 멜 깁슨이 편집에 크게 관여하는 바람에 극장판과 감독판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영화다. 2007년에 나온 감독판에 비하면 1999년 극장판은 밀러 유의 자의식적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물론 『씬 시티』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하드보일드를 활자에서 활자+그림으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많은 고민거리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야심 찬 기획이며, 완성된 결과물을 보노라면 이 그래픽 노블을 구태여 '안전한 각색'이라고 일컬을 이유는 없겠다. 일찍이 『DC: 더 뉴 프론티어』에서 확인한 바 있는 쿡의 그림체는 그 특징을 더욱 전면적으로 과시한다. 안 그래도 굵던 선은 더욱 굵어진다. 선의 굵기로 인해 거꾸로 하나의 면이 선처럼 보일 때도 있다. 쿡은 그 선 같은 면 속에 인물의 신체를 파묻는가 하면, 아예 전신을 봉선화(棒線畵)에 가깝게 묘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끝이 닫히지 않은 직선을 이용해 죽죽 그어 내린 윤곽선은 확신에 가득 찬 날렵함을 유지하면서도 정제되지는 않은 뒷맛을 남긴다. 아예 윤곽선 없이 두 면의 접합만으로 선을 '열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복잡하게 얽힌 표면을 확고한 힘 하나로 그러모아 단순하게 만들어버린 듯한 파커의 세상. 끝까지 읽고 나면 이보다 더 파커에게 적합한 그림체를 달리 떠올리기 어렵다.

 쿡은 대사 하나 없이 수십 개의 패널을 끌고 나간 끝에 파커의 얼굴을 소개하는 도입부만으로 자신이 그림체뿐만 아니라 장면 구성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뤄낼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무엇을 얼마 만큼의 시간(공간)을 할애하여 보여줄 것인가, 또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 게으른 각색자들이 종종 플롯 구성의 차원에서 고민하는 데에 그치곤 하는 이 문제를 쿡은 개별 장면의 구성에서도 주의 깊게 다룬다. 특히 대화 도중에 아무것도 아닌 듯 한 박자 쉬어가거나 동작과 말풍선의 대비를 이용해 짧게 시간을 가속하는 대목들은 이 작가가 패널의 시각적/공간적 연쇄가 빚어내는 시간의 감각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91쪽에서 로즈가 "파커, 당신은 얼마나 강하지? 사실 가끔 그게 궁금했어. 어쩌면 내가 아는 남자들 중에 당신이 가장 강할지도 몰라."와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지 나도 모르겠어." 사이에 침묵하며 담배를 빨아들이는 연출이 그렇다. 혹은 112쪽에서 파커와 카터가 두 패널에 걸쳐 "브론슨 회장이 먼저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네." / "아니, 지금 바로 해결하라고 해." / "그건 곤란하다는데." / "전화기 이리 줘." 라는 대사를 교환할 때 담배 연기의 연속성 및 두 패널 간의 대칭성, 그리고 패널 가장자리에 잘려나간 파커의 얼굴을 이용해 잠시 시간을 가속하는 연출이 그렇다. 사실상 줄거리만 따지자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이 이야기에 묵직한 힘을 부여하는 원천은 이와 같은 리듬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는 2009년에 『헌터』가 나온 이후 1~2년에 한 권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2013년 12월에 네 번째 작품인 『Slayground』가 나왔고, 2014년 5월부터는 아예 스타크의 원작 소설도 쿡이 새로 그린 일러스트를 포함하여 다시 나온다고 하니, 당분간은 계속 파커와 함께해주리라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모쪼록 한국어판도 그래픽 노블이든 원작 소설이든 모두 꾸준히 나와주길 바랄 따름이다. 그간 그래픽 노블을 여럿 내면서 노하우가 쌓인 줄은 알았지만, 유독 이 책은 편집은 물론이거니와 판형이나 제본, 식자가 모두 다 마음에 쏙 들어서, 오래도록 이 품질을 누리고 싶다.

 그나저나 어차피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라는 시리즈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다 번역하기 난처하거나 한국어로 옮긴다고 '폼이 안 사는' 제목도 아닌데 그냥 "사냥꾼"이라고 해도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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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내 일기 읽고 있어? 라임 청소년 문학 2
수진 닐슨 지음, 김선영 옮김 / 라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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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제로 독후감을 써 가야 하는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과 총기 사고와 폭력의 후유증과 남은 사람들의 애도와 편견과 박해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문장을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지혜라도 되는 듯 엄숙한 태도로 글의 맨 끝에 박아넣었을 테지. 사실은 그 말이 장례식장에서 읊조리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별다를 바 없는, 조건 반사적으로 남용된 탓에 닳고 닳아 오래전에 그 무게를 잃어버린 허약한 경구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뒤통수를 쿡쿡 찔러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소설의 중심 소재나 주제 자체에 얽매이지 않게 된 지금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싶다. 『형, 내 일기 읽고 있어?』는 '학교 폭력 끝에 총기 사고를 일으키고 자살한 소년의 동생이 형의 죽음이 남긴 상처를 끌어안고 나가는 과정'이라는 소재를 다루었기에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 그런 소재를 취했으면서도 뜻밖에 밝고 경쾌하며 산만하기까지 한 태도를 유지한 채 웃음 짓기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훌륭한 작품이다. 비극이 아무리 큰 파문을 몰고 왔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의 비극이 일상 전체를 뒤덮을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새로운 동네의 새로운 학교에 전학 온 중학생에게야. 형의 죽음이라는 대서사가 늘 맴돈다 한들 그것이 당장 점심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나 참견쟁이 이웃을 상대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좌우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아버지나 형의 죽음 때문에 만나게 된 상담사와 관계를 맺을 때조차, 과거의 비극과는 무관한 관심사가 하나둘쯤 끼어들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만큼 그렇게 한결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쩌면 주인공이자 화자인 헨리 K. 라슨은 죄책감과 원망 속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은 채 침잠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작가인 수진 닐슨은 그를 끊임없이 밖으로 꾀어낸다. '도전! 전국 퀴즈왕'으로, 프로레슬링으로, 카레로, 첫 키스로, 일기로. 그 숱한 '여분의 사건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헨리를 보며 세상을 다 잃은 듯 목 놓아 울다가도 눈앞에 무언가 흥밋거리를 던져주면 울음을 싹 그치고 눈을 똥그랗게 뜨는 아기를 보는 듯한 즐거움마저 느꼈다고 하면 다소 지나친 말일까? 헨리는 분명 불쾌하게 여길 테지만.

 그런즉 『형, 내 일기 읽고 있어?』의 가장 존중할 만한 점은 (심각한 사회 문제, 청소년 문제를 환기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중학교 시절의 눈으로 돌아가 중학생의 일상을 중학생의 언어로 대하며 중학생에게 중요한 고민과 마주하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 프로레슬링 경기 입장권을 사기 위해 학교 재활용품 쓰레기통을 뒤질 때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가를 상세히 나열하는 것은 형이 생전에 당한 고통스러운 일을 환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둘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자가 후자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둘 다 헨리가 누리고 또 해소해야 할 삶의 일부로서 소중하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자극과, 소박한 고민과, 그 나이에는 온 세상이나 다름없는 기쁨이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한, 계속 살아가지 않을 도리는 없다. 굳이 비극을 분석하고, 새로운 사건과 연결하고, 구체적인 극복 과정을 제시하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하여 종지부를 찍을 필요조차 없다. 다만 죽음과 슬픔과 낙담 또한 삶임을 체감할 수 있도록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수진 닐슨은 그 점을 이해하는 작가이며, 그리하여 이 책은 쉼 없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그 기분을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었다는 정도일까. 내적 완결성을 놓고 보자면야 안정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끝' 없이 계속 살아가는 이야기니까, 얘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더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게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다만 작가로서는 고려하지 않았을 부작용이 좀 있었으니─ 정작 이 책을 읽는 성인 독자인 나의 현재는 중학교 시절처럼 자극과 흥분과 중대한 결정으로 넘쳐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살짝 우울해지기도 했음을 밝혀둔다. 게다가 내 중학교 시절과 헨리의 중학교 시절을 비교했을 때도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이게 다 첫 키스가 늦었던 탓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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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트 아날로그 환상의 숲
르네 도말 지음, 오종은 옮김 / 이모션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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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르 X 고다르』,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를 출간한 바 있는 이모션 북스에서 새로이 펴내기 시작한 환상 소설 시리즈 "환상의 숲" 첫 번째 출간작. 표지와 간략한 소개만 대충 보았을 때는 프랑스 철학 에세이 비스름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인상이 옳았다. 권말에 수록된 작가의 노트와 편집자의 서문, 옮긴이의 후기(라기보다는 해설)에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듯, 『마운트 아날로그』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신비주의-구도자-시인이었던 르네 도말이 말년에 주목했던 진리 탐구에 대한 실천으로 기획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화 속에서 땅과 하늘/인간과 신성을 연결해주지만 인간은 그 중턱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는 산의 존재를 지적한 다음, 인간이 온갖 고봉을 점령한 오늘날에도 그러한 산이 실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와 같은 '유추의 산'에 오르고자 하는 등산가들의 여정에 함께한다. 상징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허구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이야말로 장르 SF나 팬터지의 경계에 관한 논의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사변소설이라고 불러 마땅한 소설이겠다.

 그런데 이 사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유추의 산이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도말의 목표는 자신의 논의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우화를 쓰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탐구가 언어에 고정된 채 생각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실천이 되기를 바랐다. 『마운트 아날로그』의 등산가들은 존재할 리가 없는 허구의 산을 가정하고 상상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실재하는 그 산의 위치를 찾아내어 직접 올라가야만 한다. 이는 사상적으로도 따져볼 만한 결단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환상 소설의 독자로서 반가운 선택이다. 교훈과 상징 의미에 종속된 이야기만큼 따분한 이야기도 없는 법. 등산가들은 직접 지도를 펴놓고 유추의 산의 위치를 찾아가며 그것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와 접근 방법을 토론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그 여정은 하나의 명료한 사상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디테일로 들어차 있다. 또한 역으로 그 디테일들이 마운트 아날로그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하고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채워준다. 즉, 어엿한 환상 소설로서, 『마운트 아날로그』는 독자에게 다른 세계를 접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리고 아마 작가에도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은 곧 마운트 아날로그 세계의 특성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도말이 "나는 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면서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해 했던 말도 단순한 작가의 다짐을 넘어서는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마운트 아날로그』를 르네 도말이라는 작가의 개인사와 연결하여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처럼 안내하려 애쓰는 듯한 작가 노트, 편집자 서문, 옮긴이 후기와는 반대로, 일개 독자인 나는 다른 잠재 독자들에게 그 반대의 독서를 권하며 (혹시 겁먹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다. 『마운트 아날로그』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모험 소설이다. 하나의 상징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어떻게 실재하게 되는가? 누가 그 실재를 믿고 탐험에 나서는가? 탐험에서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되는가? 그들은 산에서 무엇을 찾게 되는가? 혹은 찾지 못한다면 이 등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들은 신비주의에 물든 지적 허세를 벗어나 ─ 사실 탐험의 지도자인 피에르 소골이 처음 등장해서 자신을 소개할 때만 해도 그런 의심이 있었다 ─ 직접 디뎌보며 확인함 직한 실체를 갖추고 있다. 비록 도입부에 제시된 마운트 아날로그의 특성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예고되듯 그 정상에 올라 새로운 인간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기란 요원한 일일 테지만, 등산의 의의는 꼭 정상 정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

 (또 하다못해 최악의 경우 책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눈에 띄면서도 단아한 디자인과 손에 착 감기는 표지 재질 ─ 특히 책등 부분의 질감이 참 좋다 ─ 덕분에 어쩐지 프랑스 지식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책을 가까이하고 있다는 허영이라도 채워주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 글은 『마운트 아날로그』를 소개할 때 거론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책을 읽어나갔고, 그 때문에 가능했던 감상의 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이미 꼼꼼하게 읽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작정 읽기 시작하는 것도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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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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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친구들과 함께 스티븐 프린스의 구로사와 아키라 연구서 『The Warrior's Camera: The Cinema of Akira Kurosawa』를 읽은 적이 있다. 구로사와의 전작을 대상으로 한 그 책에서, 프린스는 구로사와의 영화뿐만 아니라 구로사와의 자서전 또한 연구의 대상으로 삼겠노라고 말한다. 구로사와의 영화를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캐릭터의 창생사멸을 바라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서전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아 만든 한 편의 영화와 같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구로사와의 자서전은 『감독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지 오래였다. 더구나 프린스는 자신이 논거로 삼은 대목들을 일일이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인용된 내용이 재미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필요한 부분은 책에 다 있으니 굳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따로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야 모비딕에서 일본판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출간한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을 읽노라니 새삼 당시의 내 게으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것 참 근사한 책이 아닌가. 프린스는 책의 내용을 두고 한 편의 영화와 같다고 했지만, 그전에 이 한국어판 자체가 또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 책의 외형, 특히 책등과 판형과 내지 편집은 모비딕에서 이미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을 내면서 갈고닦은 실력이 발휘된 것이다. 또한 영어 번역판을 중역했다는 『감독의 길』과는 달리 일본어 원문을 토대로 번역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역자 김경남의 문장 및 낱말 선택은 한결 값지게 다가온다. 과연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의문이 드는 구절이 한둘이 아니었다. 부록도 빼놓을 수 없다. 짧은 "구로사와 아키라 연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구로사와 아키라 필모그래피"는 퍽 반갑다. 적당히 구색을 갖추기 위해 넣었겠거니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분량이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설명에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알고 보니 일본의 영화평론가 쓰루타 고지가 쓴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년 특집호』의 해제를 바탕으로 덧붙였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사실 기대만큼 실속이 있지는 않지만 ─ 원래 영화 만드는 방법을 글로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 실렸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출판사의 설명으로는 1975년에 도호 영화사에서 냈던 책자의 내용을 일본 영화 연구가이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통역을 맡기도 했던 오디 벅이 발췌한 글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이사이 들어간 도판 설명도 충실하며 그 출처도 분명히 표기하여 새삼 그 소스를 찾아 책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 비슷한 것"도 있다. 박찬욱의 글이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한국에 좋은 직업 감독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좋은 직업 글쟁이 한 사람이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듯한 글이다.

 

 그러니까, 묘하게도, 이 책은 그 내용 이전에 책의 물질적 구성 자체를 영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협동 예술처럼 느끼게 하는 데가 있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내 앞에 놓인 이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쏟은 노동력이 전해져 그것만으로 감동하게 된다.

 

 아니, 과연 그게 "그 내용 이전"의 문제일까? 바로 구로사와의 글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게 아닐까? 구로사와가 장 르누아르의 자서전 머리말에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순간순간 '그래, 이게 구로사와지!' 하고 무릎을 치지만, 동시에 그 장면에 늘 다른 등장인물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른 사람이 구로사와를 알아주고 용기를 줄 때, 또 구로사와가 다른 사람에게 우정과 경의를 표할 때 찾아온다. 심지어 구로사와가 쓴 서문부터 그렇다. 그는 서문 말미에 이 책을 쓰기 전에 기억을 되새기고자 만나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서문이나 후기에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자체는 업계 관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로사와는 단지 이름을 부를 뿐 아니라 아예 단락을 나누어가며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 자신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단 기나긴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한 편의 영화로구나. 더구나 최상의 영화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주인공의 모험과 갈등의 극복에 뒤이은 승리(혹은 장렬한 패배)를 기대하고 들어가지만, 극장을 나설 때는 주인공이라든가 클라이맥스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한 모두를 기억하고 사랑하게 되는, 그런 영화다. 시간을 함께하며 공간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복작복작한 촬영장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이 할 법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멋진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책을 읽기 전에, 『감독의 길』을 읽었던 사람들에게서 '워낙 재미있어서 한달음에 읽게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상에는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한달음에 읽기에는 눈물이 너무 자주 흘러 여러 번 책장을 덮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울보였다는 구로사와의 이야기가 독자인 내게도 전염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책에는 정말 눈물을 빼는 순간이 쉴 새 없이 나온다. 본디 잃어버린 것들, 지나간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찬탄만큼이나 아픔을 불러일으키는 법. 게다가 구로사와의 기억은 (구로사와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생생하고, 일본적이면서도 원형적이라 누구든 쉽게 자신의 체험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시대를 살기는커녕 그런 모습을 전해 듣지도 못했던 어린 나조차 노스탤지어에 푹 빠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구로사와가 전해주는 가장 근사한 기억들은 죄다 내 안의 아직 채워지지 못한 구석을 자극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는 이것이 없다는 상실감이 차오른다. 박찬욱의 서문 비슷한 것이 젊은이의 벅찬 마음과 늙은이의 아련한 서글픔을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겪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속에 마냥 주저앉기만 하기에는 책이 전해주는 에너지가 막대하다. 영화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기 등장하는 영화나 영화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장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거나 적어도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거나 살아가기를 꿈꾸게 될 것이다. (혹은, 나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구로사와처럼 살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지 않을까?) 무슨 자기계발서 광고 같은 소리지만, 남에게 뭘 해라 어째라 하는 대신 자신이 정말로 자기 믿음대로 그렇게 살았음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 설득력이 남다르다. 역시 움직임을 담지 않고는, 남을 움직이도록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감독답다.

 

 유익할지도 모를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라쇼몽〉 시절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혹시 젊은 시절에 쓴 자서전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어쩐지 그 이후는 쓰고 싶지 않았거나 더는 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풍성한 목소리로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천국과 지옥〉 등등에 관해서도 말해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은 사람을 독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혹시 너무 아쉬워서 무덤에 가서 비석이라도 한 방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출판사에서 2000년에 출간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와 소화 출판사에서 2012년에 출간한 『복안의 영상』을 함께 권한다. 전자는 구로사와의 대담과 구술을 정리한 것인데 특히 〈7인의 사무라이〉 제작 이야기랑 그가 '세계 감독'이 된 다음에 친분을 맺은 다른 감독들에 관한 소회가 담겨있다. 그리고 후자는 〈라쇼몽〉을 통해 만난 각본가 하시모토 시노부가 이후 구로사와와의 각본 작업에 관해 술회하는 책이다. 둘 모두 실제로 당대를 산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의 확장판처럼 놓고 읽어도 좋겠다.

 

 여기에 다시 슬픈 사족을 덧붙이자면─ 혹시라도 이 책을 읽은 다음에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DVD와 블루레이로 정식 출시된 구로사와 영화는 후기작 〈카게무샤〉와 〈란〉뿐이다. 그나마 〈카게무샤〉는 20분이 삭제된 국제판이다. 검색해 보면 그 외 숱한 대표작이 다 DVD로 나와 있다고 뜰 터이나, 그것들은 모두 허가 없이 외국 타이틀의 소스를 가져다가 대충 만들어 낸 소위 립핑판이다. 이와 같은 관행은 DVD 시장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늘 성행해왔다. 굿다운로드나 IPTV 등을 통해 제공되는 소스, 특히 최근의 극장 개봉작이 아닌 몇십 년 전 영화의 소스 및 자막은 그 합법성이나 정당성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다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뻔한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홈비디오 시장은 설령 소비자가 정당한 값을 치르고 합법적인 양질의 서비스를 받고 싶더라도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부정한 세계에 한 발 걸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생산자와 유통자와 소비자 모두 '그 방법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어차피 거의 안 팔린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이런 사태를 묵과하고 있다. (범죄 소설 독자들이 종종 수십년 전에 나온 일본어 중역본을 표지만 갈아서 판매하는 출판사의 책을 두고 '그 판본 외에는 볼 방법이 없다'거나 '중역이 차라리 더 나을 때도 있다' 따위의 발언을 반복하며 옹호하는 것, 심지어 다른 양식 있는 출판사에서 새로 제대로 된 번역과 편집을 통해 다시 작품을 소개해주면 '냈던 거 다시 낸다'며 냉대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영어 중역판을 다시 제대로 된 번역과 성실한 구성을 통해 다듬어 내놓은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을 읽고 나니, 책과는 정반대 처지인 홈비디오 시장의 꼬락서니가 영화 애호가로서 한심하고 서글퍼 이참에 늘어놓아 본다.

 

 아, 하나만 더. 모비딕, 혹시 장 르누아르 자서전 출간은 생각 없으십니까?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구로사와에 비해 훠어어어어얼씬 안 유명한 이름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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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2014-02-0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동, 이라는 말로 다 모자랄 훌륭한 리뷰를 달아주셨습니다.
어쩌면 저희보다 더 구로사와 감독을 사랑하시는 듯합니다.^^

마지막에 주신 질문. 저희도 장 르누아르 자서전을 하고 싶습니다. 다만, 이 책 역시 때를 못 만나 시공사에서 절판이 되었고, 이왕에 한다면 불어 원전으로 다시 파고 들어야 하니, 역시 공을 들인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음을 슬쩍 줘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