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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 친구들과 함께 스티븐 프린스의 구로사와 아키라 연구서 『The Warrior's Camera: The Cinema of Akira Kurosawa』를 읽은 적이 있다. 구로사와의 전작을 대상으로 한 그 책에서, 프린스는 구로사와의 영화뿐만 아니라 구로사와의 자서전 또한 연구의 대상으로 삼겠노라고 말한다. 구로사와의 영화를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캐릭터의 창생사멸을 바라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서전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아 만든 한 편의 영화와 같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구로사와의 자서전은 『감독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지 오래였다. 더구나 프린스는 자신이 논거로 삼은 대목들을 일일이 저서에서 인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인용된 내용이 재미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필요한 부분은 책에 다 있으니 굳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따로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야 모비딕에서 일본판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출간한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을 읽노라니 새삼 당시의 내 게으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것 참 근사한 책이 아닌가. 프린스는 책의 내용을 두고 한 편의 영화와 같다고 했지만, 그전에 이 한국어판 자체가 또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 책의 외형, 특히 책등과 판형과 내지 편집은 모비딕에서 이미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을 내면서 갈고닦은 실력이 발휘된 것이다. 또한 영어 번역판을 중역했다는 『감독의 길』과는 달리 일본어 원문을 토대로 번역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역자 김경남의 문장 및 낱말 선택은 한결 값지게 다가온다. 과연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의문이 드는 구절이 한둘이 아니었다. 부록도 빼놓을 수 없다. 짧은 "구로사와 아키라 연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구로사와 아키라 필모그래피"는 퍽 반갑다. 적당히 구색을 갖추기 위해 넣었겠거니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분량이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설명에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알고 보니 일본의 영화평론가 쓰루타 고지가 쓴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년 특집호』의 해제를 바탕으로 덧붙였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사실 기대만큼 실속이 있지는 않지만 ─ 원래 영화 만드는 방법을 글로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 실렸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출판사의 설명으로는 1975년에 도호 영화사에서 냈던 책자의 내용을 일본 영화 연구가이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통역을 맡기도 했던 오디 벅이 발췌한 글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이사이 들어간 도판 설명도 충실하며 그 출처도 분명히 표기하여 새삼 그 소스를 찾아 책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 비슷한 것"도 있다. 박찬욱의 글이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한국에 좋은 직업 감독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좋은 직업 글쟁이 한 사람이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듯한 글이다.
그러니까, 묘하게도, 이 책은 그 내용 이전에 책의 물질적 구성 자체를 영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협동 예술처럼 느끼게 하는 데가 있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내 앞에 놓인 이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해 쏟은 노동력이 전해져 그것만으로 감동하게 된다.
아니, 과연 그게 "그 내용 이전"의 문제일까? 바로 구로사와의 글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게 아닐까? 구로사와가 장 르누아르의 자서전 머리말에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순간순간 '그래, 이게 구로사와지!' 하고 무릎을 치지만, 동시에 그 장면에 늘 다른 등장인물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다른 사람이 구로사와를 알아주고 용기를 줄 때, 또 구로사와가 다른 사람에게 우정과 경의를 표할 때 찾아온다. 심지어 구로사와가 쓴 서문부터 그렇다. 그는 서문 말미에 이 책을 쓰기 전에 기억을 되새기고자 만나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서문이나 후기에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자체는 업계 관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로사와는 단지 이름을 부를 뿐 아니라 아예 단락을 나누어가며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 자신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단 기나긴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한 편의 영화로구나. 더구나 최상의 영화다.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주인공의 모험과 갈등의 극복에 뒤이은 승리(혹은 장렬한 패배)를 기대하고 들어가지만, 극장을 나설 때는 주인공이라든가 클라이맥스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한 모두를 기억하고 사랑하게 되는, 그런 영화다. 시간을 함께하며 공간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복작복작한 촬영장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이 할 법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멋진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책을 읽기 전에, 『감독의 길』을 읽었던 사람들에게서 '워낙 재미있어서 한달음에 읽게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상에는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한달음에 읽기에는 눈물이 너무 자주 흘러 여러 번 책장을 덮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린 시절 울보였다는 구로사와의 이야기가 독자인 내게도 전염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책에는 정말 눈물을 빼는 순간이 쉴 새 없이 나온다. 본디 잃어버린 것들, 지나간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찬탄만큼이나 아픔을 불러일으키는 법. 게다가 구로사와의 기억은 (구로사와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생생하고, 일본적이면서도 원형적이라 누구든 쉽게 자신의 체험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그의 시대를 살기는커녕 그런 모습을 전해 듣지도 못했던 어린 나조차 노스탤지어에 푹 빠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구로사와가 전해주는 가장 근사한 기억들은 죄다 내 안의 아직 채워지지 못한 구석을 자극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는 이것이 없다는 상실감이 차오른다. 박찬욱의 서문 비슷한 것이 젊은이의 벅찬 마음과 늙은이의 아련한 서글픔을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겪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속에 마냥 주저앉기만 하기에는 책이 전해주는 에너지가 막대하다. 영화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기 등장하는 영화나 영화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장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거나 적어도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거나 살아가기를 꿈꾸게 될 것이다. (혹은, 나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구로사와처럼 살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지 않을까?) 무슨 자기계발서 광고 같은 소리지만, 남에게 뭘 해라 어째라 하는 대신 자신이 정말로 자기 믿음대로 그렇게 살았음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 설득력이 남다르다. 역시 움직임을 담지 않고는, 남을 움직이도록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감독답다.
유익할지도 모를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라쇼몽〉 시절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혹시 젊은 시절에 쓴 자서전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고, 어쩐지 그 이후는 쓰고 싶지 않았거나 더는 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풍성한 목소리로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천국과 지옥〉 등등에 관해서도 말해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은 사람을 독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혹시 너무 아쉬워서 무덤에 가서 비석이라도 한 방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출판사에서 2000년에 출간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천재이다』와 소화 출판사에서 2012년에 출간한 『복안의 영상』을 함께 권한다. 전자는 구로사와의 대담과 구술을 정리한 것인데 특히 〈7인의 사무라이〉 제작 이야기랑 그가 '세계 감독'이 된 다음에 친분을 맺은 다른 감독들에 관한 소회가 담겨있다. 그리고 후자는 〈라쇼몽〉을 통해 만난 각본가 하시모토 시노부가 이후 구로사와와의 각본 작업에 관해 술회하는 책이다. 둘 모두 실제로 당대를 산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의 확장판처럼 놓고 읽어도 좋겠다.
여기에 다시 슬픈 사족을 덧붙이자면─ 혹시라도 이 책을 읽은 다음에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고 싶어진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DVD와 블루레이로 정식 출시된 구로사와 영화는 후기작 〈카게무샤〉와 〈란〉뿐이다. 그나마 〈카게무샤〉는 20분이 삭제된 국제판이다. 검색해 보면 그 외 숱한 대표작이 다 DVD로 나와 있다고 뜰 터이나, 그것들은 모두 허가 없이 외국 타이틀의 소스를 가져다가 대충 만들어 낸 소위 립핑판이다. 이와 같은 관행은 DVD 시장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늘 성행해왔다. 굿다운로드나 IPTV 등을 통해 제공되는 소스, 특히 최근의 극장 개봉작이 아닌 몇십 년 전 영화의 소스 및 자막은 그 합법성이나 정당성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다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뻔한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홈비디오 시장은 설령 소비자가 정당한 값을 치르고 합법적인 양질의 서비스를 받고 싶더라도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부정한 세계에 한 발 걸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생산자와 유통자와 소비자 모두 '그 방법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어차피 거의 안 팔린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이런 사태를 묵과하고 있다. (범죄 소설 독자들이 종종 수십년 전에 나온 일본어 중역본을 표지만 갈아서 판매하는 출판사의 책을 두고 '그 판본 외에는 볼 방법이 없다'거나 '중역이 차라리 더 나을 때도 있다' 따위의 발언을 반복하며 옹호하는 것, 심지어 다른 양식 있는 출판사에서 새로 제대로 된 번역과 편집을 통해 다시 작품을 소개해주면 '냈던 거 다시 낸다'며 냉대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영어 중역판을 다시 제대로 된 번역과 성실한 구성을 통해 다듬어 내놓은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을 읽고 나니, 책과는 정반대 처지인 홈비디오 시장의 꼬락서니가 영화 애호가로서 한심하고 서글퍼 이참에 늘어놓아 본다.
아, 하나만 더. 모비딕, 혹시 장 르누아르 자서전 출간은 생각 없으십니까?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구로사와에 비해 훠어어어어얼씬 안 유명한 이름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