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내 일기 읽고 있어? 라임 청소년 문학 2
수진 닐슨 지음, 김선영 옮김 / 라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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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제로 독후감을 써 가야 하는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과 총기 사고와 폭력의 후유증과 남은 사람들의 애도와 편견과 박해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라는 문장을 마치 천하에 둘도 없는 지혜라도 되는 듯 엄숙한 태도로 글의 맨 끝에 박아넣었을 테지. 사실은 그 말이 장례식장에서 읊조리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별다를 바 없는, 조건 반사적으로 남용된 탓에 닳고 닳아 오래전에 그 무게를 잃어버린 허약한 경구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뒤통수를 쿡쿡 찔러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소설의 중심 소재나 주제 자체에 얽매이지 않게 된 지금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싶다. 『형, 내 일기 읽고 있어?』는 '학교 폭력 끝에 총기 사고를 일으키고 자살한 소년의 동생이 형의 죽음이 남긴 상처를 끌어안고 나가는 과정'이라는 소재를 다루었기에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 그런 소재를 취했으면서도 뜻밖에 밝고 경쾌하며 산만하기까지 한 태도를 유지한 채 웃음 짓기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훌륭한 작품이다. 비극이 아무리 큰 파문을 몰고 왔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의 비극이 일상 전체를 뒤덮을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새로운 동네의 새로운 학교에 전학 온 중학생에게야. 형의 죽음이라는 대서사가 늘 맴돈다 한들 그것이 당장 점심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나 참견쟁이 이웃을 상대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좌우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아버지나 형의 죽음 때문에 만나게 된 상담사와 관계를 맺을 때조차, 과거의 비극과는 무관한 관심사가 하나둘쯤 끼어들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만큼 그렇게 한결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쩌면 주인공이자 화자인 헨리 K. 라슨은 죄책감과 원망 속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은 채 침잠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작가인 수진 닐슨은 그를 끊임없이 밖으로 꾀어낸다. '도전! 전국 퀴즈왕'으로, 프로레슬링으로, 카레로, 첫 키스로, 일기로. 그 숱한 '여분의 사건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헨리를 보며 세상을 다 잃은 듯 목 놓아 울다가도 눈앞에 무언가 흥밋거리를 던져주면 울음을 싹 그치고 눈을 똥그랗게 뜨는 아기를 보는 듯한 즐거움마저 느꼈다고 하면 다소 지나친 말일까? 헨리는 분명 불쾌하게 여길 테지만.

 그런즉 『형, 내 일기 읽고 있어?』의 가장 존중할 만한 점은 (심각한 사회 문제, 청소년 문제를 환기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중학교 시절의 눈으로 돌아가 중학생의 일상을 중학생의 언어로 대하며 중학생에게 중요한 고민과 마주하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 프로레슬링 경기 입장권을 사기 위해 학교 재활용품 쓰레기통을 뒤질 때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가를 상세히 나열하는 것은 형이 생전에 당한 고통스러운 일을 환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둘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자가 후자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둘 다 헨리가 누리고 또 해소해야 할 삶의 일부로서 소중하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자극과, 소박한 고민과, 그 나이에는 온 세상이나 다름없는 기쁨이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한, 계속 살아가지 않을 도리는 없다. 굳이 비극을 분석하고, 새로운 사건과 연결하고, 구체적인 극복 과정을 제시하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하여 종지부를 찍을 필요조차 없다. 다만 죽음과 슬픔과 낙담 또한 삶임을 체감할 수 있도록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수진 닐슨은 그 점을 이해하는 작가이며, 그리하여 이 책은 쉼 없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그 기분을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었다는 정도일까. 내적 완결성을 놓고 보자면야 안정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끝' 없이 계속 살아가는 이야기니까, 얘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더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게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다만 작가로서는 고려하지 않았을 부작용이 좀 있었으니─ 정작 이 책을 읽는 성인 독자인 나의 현재는 중학교 시절처럼 자극과 흥분과 중대한 결정으로 넘쳐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 살짝 우울해지기도 했음을 밝혀둔다. 게다가 내 중학교 시절과 헨리의 중학교 시절을 비교했을 때도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이게 다 첫 키스가 늦었던 탓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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