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 아날로그 환상의 숲
르네 도말 지음, 오종은 옮김 / 이모션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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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르 X 고다르』,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를 출간한 바 있는 이모션 북스에서 새로이 펴내기 시작한 환상 소설 시리즈 "환상의 숲" 첫 번째 출간작. 표지와 간략한 소개만 대충 보았을 때는 프랑스 철학 에세이 비스름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인상이 옳았다. 권말에 수록된 작가의 노트와 편집자의 서문, 옮긴이의 후기(라기보다는 해설)에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듯, 『마운트 아날로그』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신비주의-구도자-시인이었던 르네 도말이 말년에 주목했던 진리 탐구에 대한 실천으로 기획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신화 속에서 땅과 하늘/인간과 신성을 연결해주지만 인간은 그 중턱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는 산의 존재를 지적한 다음, 인간이 온갖 고봉을 점령한 오늘날에도 그러한 산이 실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와 같은 '유추의 산'에 오르고자 하는 등산가들의 여정에 함께한다. 상징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허구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이야말로 장르 SF나 팬터지의 경계에 관한 논의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사변소설이라고 불러 마땅한 소설이겠다.

 그런데 이 사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유추의 산이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도말의 목표는 자신의 논의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우화를 쓰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탐구가 언어에 고정된 채 생각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실천이 되기를 바랐다. 『마운트 아날로그』의 등산가들은 존재할 리가 없는 허구의 산을 가정하고 상상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실재하는 그 산의 위치를 찾아내어 직접 올라가야만 한다. 이는 사상적으로도 따져볼 만한 결단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환상 소설의 독자로서 반가운 선택이다. 교훈과 상징 의미에 종속된 이야기만큼 따분한 이야기도 없는 법. 등산가들은 직접 지도를 펴놓고 유추의 산의 위치를 찾아가며 그것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와 접근 방법을 토론한다. 그런 다음 실제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간다. 그 여정은 하나의 명료한 사상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디테일로 들어차 있다. 또한 역으로 그 디테일들이 마운트 아날로그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하고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채워준다. 즉, 어엿한 환상 소설로서, 『마운트 아날로그』는 독자에게 다른 세계를 접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리고 아마 작가에도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은 곧 마운트 아날로그 세계의 특성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도말이 "나는 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면서 실천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해 했던 말도 단순한 작가의 다짐을 넘어서는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마운트 아날로그』를 르네 도말이라는 작가의 개인사와 연결하여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처럼 안내하려 애쓰는 듯한 작가 노트, 편집자 서문, 옮긴이 후기와는 반대로, 일개 독자인 나는 다른 잠재 독자들에게 그 반대의 독서를 권하며 (혹시 겁먹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다. 『마운트 아날로그』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모험 소설이다. 하나의 상징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어떻게 실재하게 되는가? 누가 그 실재를 믿고 탐험에 나서는가? 탐험에서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되는가? 그들은 산에서 무엇을 찾게 되는가? 혹은 찾지 못한다면 이 등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들은 신비주의에 물든 지적 허세를 벗어나 ─ 사실 탐험의 지도자인 피에르 소골이 처음 등장해서 자신을 소개할 때만 해도 그런 의심이 있었다 ─ 직접 디뎌보며 확인함 직한 실체를 갖추고 있다. 비록 도입부에 제시된 마운트 아날로그의 특성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예고되듯 그 정상에 올라 새로운 인간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기란 요원한 일일 테지만, 등산의 의의는 꼭 정상 정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

 (또 하다못해 최악의 경우 책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눈에 띄면서도 단아한 디자인과 손에 착 감기는 표지 재질 ─ 특히 책등 부분의 질감이 참 좋다 ─ 덕분에 어쩐지 프랑스 지식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책을 가까이하고 있다는 허영이라도 채워주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 글은 『마운트 아날로그』를 소개할 때 거론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책을 읽어나갔고, 그 때문에 가능했던 감상의 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이미 꼼꼼하게 읽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작정 읽기 시작하는 것도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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