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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ㅣ 시공그래픽노블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 / 시공사(만화)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미국 범죄 소설계의 거목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쓴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 『The Hunter』를 원작으로 삼아 만화가 다윈 쿡이 각색하고 그린 그래픽 노블. 원작 소설도 동서문화사에서 『인간 사냥』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을 출간하여 아직도 구할 수 있으나, 2000년대 들어 범죄 소설 붐이 일자 베른 협약 가입 이전에 냈던 일본어 중역본을 그대로 다시 내는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의 행태가 괘씸하여 일부러 읽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는 존 부어맨 감독이 1967년에 발표한 영화 〈포인트 블랭크〉, 그리고 브라이언 헬겔랜드 감독이 각각 1999년과 2007년에 내놓은 〈보복〉 극장판과 감독판으로 친숙한 작품이다. 원작을 접하지 않은 채로 각색작만 네 편째 만나는 것도 드문 경험이지 싶은데, 다행히 그간 마이클 코넬리를 필두로 하여 현대 미국 스릴러 소설을 다수 출간해 온 바 있는 RHK에서 올해 안에 파커 시리즈도 본격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라니 무척 기대하고 있다.
애인과 동료에게 배신당한 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범죄자 파커가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그 단도직입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나는 하드보일드 계열 작품에 함부로 '남성적', '냉혹무비', '마초'와 같은 수식어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파커는 하드보일드에 대한 그와 같은 편견에 철저히 부응하는 캐릭터다. 어쩌면 이 캐릭터의 과격함이 그토록 유명하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드보일드 세계가 원래 다 그렇게 마냥 살벌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하드보일드라고 해도 파커와 필립 말로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단 말인가.
다른 한편으로, 파커는 프랭크 밀러의 『씬 시티』에 나오는 자의식적 마초와도 다르다. 그는 자신의 강맹함을 전시하거나 되새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자신에게 증명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씬 시티』의 하드보일드가 하드보일드라는 세계에 매혹당해 '나도 하드보일드 할 거야!'라고 외치는 유형의 하드보일드라면, 파커는 자신의 롤 모델을 찾거나 자신을 무어라 규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행동에 나서기 전에 '세상은 이래라저래라 말하지만 나는 좆도 신경 안 써!' 라고 계속해서 되뇌는 자와, '나 이거 한다.' 라고 통보하기만 하는 자의 차이랄까.
존 부어맨-리 마빈 팀은 〈포인트 블랭크〉를 통해 이 '올곧은' 하드보일드를 갱스터 장르에 대한 성찰로까지 밀어붙여 자아성찰적 초현실주의 필름 누아르로 완성해내어 원작자의 찬사를 받기에 이른 바 있지만, 다윈 쿡은 그런 야심을 접어두고 다만 원작의 거칠거칠한 성정을 고스란히 옮겨내는 데에만 주력하기로 한 듯하다. 영화로 따지면 헬갤랜드의 〈보복〉 감독판과 비슷하달까. (〈보복〉은 1999년 첫 공개 당시 대스타였던 멜 깁슨이 편집에 크게 관여하는 바람에 극장판과 감독판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영화다. 2007년에 나온 감독판에 비하면 1999년 극장판은 밀러 유의 자의식적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물론 『씬 시티』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하드보일드를 활자에서 활자+그림으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많은 고민거리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야심 찬 기획이며, 완성된 결과물을 보노라면 이 그래픽 노블을 구태여 '안전한 각색'이라고 일컬을 이유는 없겠다. 일찍이 『DC: 더 뉴 프론티어』에서 확인한 바 있는 쿡의 그림체는 그 특징을 더욱 전면적으로 과시한다. 안 그래도 굵던 선은 더욱 굵어진다. 선의 굵기로 인해 거꾸로 하나의 면이 선처럼 보일 때도 있다. 쿡은 그 선 같은 면 속에 인물의 신체를 파묻는가 하면, 아예 전신을 봉선화(棒線畵)에 가깝게 묘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끝이 닫히지 않은 직선을 이용해 죽죽 그어 내린 윤곽선은 확신에 가득 찬 날렵함을 유지하면서도 정제되지는 않은 뒷맛을 남긴다. 아예 윤곽선 없이 두 면의 접합만으로 선을 '열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복잡하게 얽힌 표면을 확고한 힘 하나로 그러모아 단순하게 만들어버린 듯한 파커의 세상. 끝까지 읽고 나면 이보다 더 파커에게 적합한 그림체를 달리 떠올리기 어렵다.
쿡은 대사 하나 없이 수십 개의 패널을 끌고 나간 끝에 파커의 얼굴을 소개하는 도입부만으로 자신이 그림체뿐만 아니라 장면 구성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뤄낼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무엇을 얼마 만큼의 시간(공간)을 할애하여 보여줄 것인가, 또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 게으른 각색자들이 종종 플롯 구성의 차원에서 고민하는 데에 그치곤 하는 이 문제를 쿡은 개별 장면의 구성에서도 주의 깊게 다룬다. 특히 대화 도중에 아무것도 아닌 듯 한 박자 쉬어가거나 동작과 말풍선의 대비를 이용해 짧게 시간을 가속하는 대목들은 이 작가가 패널의 시각적/공간적 연쇄가 빚어내는 시간의 감각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91쪽에서 로즈가 "파커, 당신은 얼마나 강하지? 사실 가끔 그게 궁금했어. 어쩌면 내가 아는 남자들 중에 당신이 가장 강할지도 몰라."와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지 나도 모르겠어." 사이에 침묵하며 담배를 빨아들이는 연출이 그렇다. 혹은 112쪽에서 파커와 카터가 두 패널에 걸쳐 "브론슨 회장이 먼저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네." / "아니, 지금 바로 해결하라고 해." / "그건 곤란하다는데." / "전화기 이리 줘." 라는 대사를 교환할 때 담배 연기의 연속성 및 두 패널 간의 대칭성, 그리고 패널 가장자리에 잘려나간 파커의 얼굴을 이용해 잠시 시간을 가속하는 연출이 그렇다. 사실상 줄거리만 따지자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이 이야기에 묵직한 힘을 부여하는 원천은 이와 같은 리듬감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시리즈는 2009년에 『헌터』가 나온 이후 1~2년에 한 권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2013년 12월에 네 번째 작품인 『Slayground』가 나왔고, 2014년 5월부터는 아예 스타크의 원작 소설도 쿡이 새로 그린 일러스트를 포함하여 다시 나온다고 하니, 당분간은 계속 파커와 함께해주리라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모쪼록 한국어판도 그래픽 노블이든 원작 소설이든 모두 꾸준히 나와주길 바랄 따름이다. 그간 그래픽 노블을 여럿 내면서 노하우가 쌓인 줄은 알았지만, 유독 이 책은 편집은 물론이거니와 판형이나 제본, 식자가 모두 다 마음에 쏙 들어서, 오래도록 이 품질을 누리고 싶다.
그나저나 어차피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라는 시리즈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다 번역하기 난처하거나 한국어로 옮긴다고 '폼이 안 사는' 제목도 아닌데 그냥 "사냥꾼"이라고 해도 좋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