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그녀
부다데바 보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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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인도 어느 기차역 대합실의 새벽을 생각하는 일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처음 이 책을 펼치던 때가 

기차역이라곤 없는, 한국의 작은 도시에서.. 

아무런 낭만없는 도시 속 찻길을 쫄레쫄레 걸어가는 길에 펼쳐든 책이었으니 그럴까? 



표지의 그녀의 내려 뜬 그윽한 눈길도, 속표지의 보랏빛도, 

소설 속 단어 하나하나에서 간간히 섞여 드러나는 인도 특유의 장식물이나 지역 이름들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예감하게 해주었다.


내 비록 산부인과까지 걸어가는 짧은 길이었지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길만 같았다. 

때마침 대기환자 중에 흑인 산모 한 사람이 있어서, 

저 진료실 뒤에는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는 기분은 비밀(마치 먼 타국의 대합실처럼)!ㅋ






뜨거운 연인들


한 겨울, 선로의 문제로 기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마침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사내 넷-건축가, 관료, 의사, 작가는 

겨우 잡은 대합실 한 켠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겨우겨우 몸을 녹이려 하는데 

멀리서 신혼부부인 듯한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북적이는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온기가 남은 대합실을, 마치 불편한 듯 빠져나가는 두 사람. 


자리를 비켜주지 못한 어떤 이는 그들에게 미안해하지만 

작가 한 사람만큼은 꽤 시니컬해 보인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까. 

작가는 마치 그것은 한 때라는 양, 

그들은 단 둘이 있기 위해 기꺼이 한 겨울의 온기를 피하는 것이라는 양, 

물끄러미 바라본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어쩌면 기억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떤 기억이냐에 따라······"  (p.16)




아련한 사랑들


다 큰 사내 넷이서 

‘내 인생의 그녀’에 대해,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건축가 마칼랄은 이웃에 사는 교수의 딸을 돕고 싶었지만 

그녀 말라티에겐 그것조차 자존심을 뭉개놓는 일이었던가, 그의 사랑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관료로 일하는 가간 바란은 파키란 소녀에게 고백을 듣지만 당장의 그는 사랑을 택할 수 없고, 

그녀의 결혼식에 마지못해 참석하면서 끝끝내 깨닫는다. 아 내가 소중한 사랑을 잃게 된 것이구나.

아름다운 여인 비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에 아픈 환자. 

얼떨결에 아픈 그녀를 만나게 되며 치료하고 돌보는 의사 아바니. 

그녀의 사랑을 외면하는 친구가 원망스럽지만 

슬픔에 빠진 가련한 새 한 마리를 치유하고 싶어하는 그 또한 깊은 사랑을 앓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물론 '결혼이 곧 해피엔딩’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바니의 사랑은 아마도-해피엔딩이 맞겠지만. 흠. 글쎄.


가장 냉소적으로 젊은 연연들의 뜨거운 사랑을 바라보는 것만 같던 작가의 이름은 비카사. 

어떤 사랑이건 손쉽게 얻었거나 아니면 심한 열병을 앓았던 사람이 아닐까 

극과 극의 첫사랑 이야기를 예상했는데, 세상에. 

이 남자는 풋풋하고 아름다우면서 슬픈-다 갖춘(?) 첫사랑을 가졌다. 


우정 어린 세 친구가 함께 사랑한 그녀는 토루, 모나리자라고 부르고 싶던 그녀만의 우아한 모습. 

끝까지 애틋하게 사랑하고 지켜주던 작가는 지금 얼마나 슬플까, 괜히 작가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작가란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슬픈 옆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 같냔 말이다,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 연모하게 딱 좋게. ㅠㅠ




현실의 그녀는


왜 남자들에게 ‘첫사랑’이란 특별하냔 말이다, 하며 질투 아닌 질투를 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마음이 시릴 때, 

그 언젠가 마음을 오롯이 데울 따끈한 추억 하나쯤을 누구나 품고 사는 것만 같아서.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소설 속 아바니처럼 지고지순한 첫사랑의 주인공인가 싶기만 하고.) 


아니, 그럼 내 남자도 그런 사랑 하나 품으며 온기를 가지고 사냔 말이야? 

소크라테스의 악처라도 된 양 심통이 살짝 차오를 때쯤...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딱 맞아 떨어지진 않지만, 영화 <우리 선희>.


소설을 읽으며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쯤...

이 모두의 첫사랑이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잠시 상상했던 것 때문일까. 

‘우리의’ 선희였지만 그 누구의 ‘선희’이지도 못했던 영화 속 선희가 떠올랐던 것이다. 


소설 속 그들의 첫사랑은 예쁘고 착하고 솔직한(영화 속 ‘선희’의 비유) ‘그녀’같기만 하지만, 

막상 그 사랑을 하던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뭘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 사람의 마음과 저 사람의 마음을 둥둥 떠다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고. 


독특하게도-좀 엉뚱한 편이라 이해해주세요- 그런 생각이 들자, 

그들의 입에서 나온 ‘그녀’들이 하나같이 안쓰럽기도 했다.


더불어 인도 소설 속 이야기의 주체인 ‘그녀’들의 

진짜 이야기는 어떨까 더 궁금해지기도. 

(워낙 가부장적이며 계급이 강한 나라잖아요.)



아직 날이 어스름해서 젊은 부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작가는 알았다. 

잠든 동안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잠든 동안에도 두 사람은 서로가 곁에 있어 충만하다는 것을. (p.174)




여잔 그렇다~ (개콘 ‘놈놈놈’ 코너 버전으로 들어주세요)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길 바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첫사랑처럼 아스라이 멀어져 갔던 그런 존재로 보단

당장에라도 곁에 두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진짜인 한 사람의 존재로 늘 뜨겁게 존재하고 싶다~아?








그림에 대한 변명:

불꽃같은 현실을 지내는 연인들,

기차 역의 아련한 기억에 빠진 네 남자,

거슬러 올라간 기억 속의(?)........ 진짜 ‘선희’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의 선희> 속 등장인물 세 남자와 선희)


못 그리는 솜씨로라도 한 공간에 넣어보고 싶었어요.^^ㅋ










p.s.


다 적고 보니, 저는 참으로 불같은 여자로군요. (읭?!)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걸 좋아하는.


그나저나 저는 왜 마음 속에 일어난 깊은 이야기들을 

잔잔하고 차분하게 풀어내는 좋은 독자가 되지 못하는 걸까요. 또르르.


앞으로...더 많은  내공을 쌓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결론!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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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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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비슷한 제목의 뮤지컬을 접한 것도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늘 마음에 걸려 있던 책.

(참고로 구분을 하자면....

뮤지컬은 <벽을 뚫는 남자>고, 

그 뮤지컬의 원작이 되는 소설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다.^^)


워낙 뮤지컬 홍보에 유명한 배우들이 많아 나와서 귀에 익었는지라,

벽을 드나들건 뚫건 그 용어야 헷갈리긴 했지만.....문제가 되진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는 늘 궁금했다. 

(무대 장치를 어떻게 했네~하는 인터뷰도 많이 봤었으니까.)


게다가 원작 소설은 '단편'이라 들었는데 

어떻게 한 편의 뮤지컬 작품으로 태어나게 된 건가 

원작은 얼만큼의 무한의 공간을 품고 있길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엔 마르셀 에메의 짧은 글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참, 작가 김영하의 팟캐스트에서 접해 본 적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막상 책으로 읽어보진 못하다가 

표지에 있는 그림이 무겁지만은 않아 보여서 

+ 뒷 표지에 있는 '경이'나 '반전', '기이한 이야기'라는 단어가 좋아서 집어 들게 되었다.

(요즘은 머리가 자꾸 무거워져서... 심각하거나 밀도 높은 지적 활동이 좀 버겁다. ㅠㅠ)


다섯 개의 단편을 굳이 요약하자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뒤티유욀의 특별한 능력-'가루가루'가 나타났다!!

-생존 시간 카드:     쥘 플레그몽의 일기들, 생존 시간이 제한된다고?!

-속담 :    자코탱 씨는 아들 뤼시앵을 어떤 아이로 만들어 버린 것인가.

-칠십 리 장화:       제르멘 뷔주와 그의 아들 앙투안. 프랑스 동화 「엄지동자」의 새로운 변주

-천국에 간 집달리:      말리코른의 선행 기록 노트.



다 좋았다, 특유의 위트도 좋고. 

특히 

아래, 책에서 옮겨 적은 내용 중에 

43 페이지 내용 같은 유머, 내 스타일이다.ㅋㅋ


칠십 리를 갈 수 있는 장화라는 게 프랑스 동화에 등장한다는데 

그걸 모티브 삼아 아이들의 

꾸러기같은(?) 시선을 엿볼 수 있나 했는데 

마지막은 얼마나 따스하고 예쁜지.  표현마저, 아.+_+ (154 페이지의 문장들!)




-생존 시간 카드

"아니, 이 사람아. 일자리를 부탁할 양이면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어쩌자고 오늘까지 꾸물댄 거야?"

"하지만 이 조치가 나에게도 해당될 줄 알았어야 말이지. 요전날 같이 점심 먹을 때 자넨 그런 얘기를 안 했잖아······"

"무슨 소리야. 나는 분명히 이 조치가 무용한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말했어. 어떻게 그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어?"   (p.43)


신문들이 온통 '배급표 사건'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다. 생존 시간 카드의 암거래가 이 계절의 가장 큰 스캔들이 될 것이다. 부자들이 생존 시간 배급표를 매점하는 바람에 그 동안 애써 이룩해놓은 식량 절약 체제가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의 유별난 행태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파문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들 중에서 아주 큰 부자인 바데 씨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는 6월 30일에서 7월 1일 사이에 무료 1천9백67일, 즉 5년 하고도 4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p.70)


-칠십 리 장화


그렇게 십 분을 가자 지구의 반대편이 나왔다. 아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아침 햇살을 한아름 따서 '성모 마리아의 실'*('공중이나 풀 따위에 걸려 있는 거미줄'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표현.(옮긴이))로 묶었다.

앙투안은 지붕밑 방을 쉽사리 다시 찾아내어 살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이는 찬란한 아침햇살 다발을 어머니의 작은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 빛이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피곤이 덜어지지라고 생각했다.  (p.154)



그냥 읽어도 재미있는데,

역자 후기에 실린 이야기들

-암호에 대한 해독? 

인명에 얽힌 비밀이나 숨겨진 뒷이야기를

꼼꼼히 읽다 보면 마르셀 에메란 작가의 매력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된다.

"허- 참. 이 양반, 골때리는 양반이네." 이런 느낌? ㅎㅎㅎㅎㅎㅎㅎㅎㅎ





p.s. 

역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로 워낙 익숙해진-'이세욱'씨라서 

반갑기도 했는데 쉽게 버릴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 놓은 것도 참 센스쟁이~란 생각. ㅎㅎㅎ


프랑스 문학에서는 짧은 이야기를 누벨(nouvelle)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콩트(conte)라 부를 때도 있다. 누벨은 주로 길이가 짧고 구성이 극적이며 인생의 단면을 그린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붙이는 이름이라면, 콩트는 주로 이야기의 환상적이거나 우의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장르를 구별하는 기준이 분명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p.183-역자 후기의 참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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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탄생 행복한 육아 5
프레드릭 르봐이예 지음, 김영주 옮김 / 샘터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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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던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차연출산'에 마음이 갔다.
내가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주변에 누가 그렇게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닌데 
이미 잘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런 분야의 책들과 만나졌다?!

조우하였다는 느낌을 되짚어 보니, 
사춘기 시절에 
수중분만이니 뭐니 해서 
아이들의 인권과 산모의 건강함을 강조하는 
출산을 꼭 해야겠다고 일기에 몇 번이고 끄적인 적이 있었다.


자연'분만'이 아니라 '출산'이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었는데 
임신·육아 책에서 툭하면 등장하는 '르봐이예 분만'을 보면 낯설어 하기만 했다.
'나는 '출산'을 할 거라고!'란 무식한 소리를 하면서 
분만에 관련된 내용들은 하나도 읽지 않고.^^;;;;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꿈꾸던 출산의 과정이 사실은 이 '르봐이예'란 사람 덕분에 시작된 거란 걸.
그리고 만난 프레드릭 르봐이예 박사의 책, 『평화로운 탄생(Pour Une Naissance Sana Violence)』

내용은 짧고 글자 보다 여백이 훨씬 많지만 

(사진도 간간히 들어 있다) 

책이 주는 느낌은 그렇게 짧고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기와 의사소통을 하려면 아기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단어에 의존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아듣는 그 언어,

사랑.

말해주자······ 사랑의 언어로······ 신생아에게!

그래 바로 그거!

사랑하는 사람들끼린 어떻게 대화하지?

아무 말 안 한다. 그냥 만질 뿐. 

서로 조심스럽고 소줍어하기 때문에 

빛을 피하고 어두움, 밤을 선호한다.

또렷하지 않은 흐릿함, 고요함 속에서 그들은 

서로 다가가 팔로 감싸안아 예전의 감옥을 재현한다. (p.77중에서)




태어나기 전, 아기는 '하나로서' 살았다.

바깥과 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세계과 자신의 구분을 모르고 지냈다.

아기는 양극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가령 아기는 추위를 모른다.

더위라는 개념 없이 추위란 없으니까. 엄마의 체온과 

아기의 체온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니 어떻게 '현저한 차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겠는가?  (p.93 중에서)



탄생은 얼마나 교묘하고도 축복된 일이 될 수 있는지······.

탯줄을 그대로 두어 엄마와 경계선을 함께 넘는다는 믿음을 주고, 

부드럽게 거대한 세상으로 맞아들임으로써.

걸음마를 배울 때 지켜보듯, 바로 그렇게 엄마는 아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며 거기 있을 것이다.

아기가 언제라도 엄마를 붙잡고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아기가 스스로의 힘을 믿기 시작하자마자 손을 빼내는 것은 잔인하다.  (p.109 중에서)




아기의 입장에서,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볼 수 있다.

밝고 찬란한 수술대 조명 앞에서 

차가운 수술대나 금속으로 된 겸자나 캡을 통해 빨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조용하고 차분한, 어두운 분만실에서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탄.생.의. 순.간.


책을 통해 다시금 우리 아이의 탄생을 바라보자.

무얼 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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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치 문학동네 시인선 56
최서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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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서관 2층.
창 밖엔 비가 내렸다 천둥이 쳤다 번개가 번쩍했다.
주변의 초등학교 아이들은 우르릉 꽝-하는 소리에 맞춰
날카로운 비명을 짧게 질러대고 
나는 빗자국 따라 점점이 물들어가는 아스팔트 주차장과 
흐려지고 어두워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오롯이 눈에 담으며 한 권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욜랑거리다>라는 표현으로 나를 홀리던 시인은 
시인이기 때문에 겪는 
세상을 담는 '언어'에 무척 많은 고심의 흔적들을 심상치 않게 
시집 곳곳에서 흩뿌리고 있었던 것 같다..

'詩는 가시 같은 것',
'시는 밥통 속에 삭은 음식물 같은 것'이라 칭하다 
'무숳; 찔리며 
구멍을 키워온 말 
말의 푸른 이파리를 뜯어먹으며 
둥근 구멍의 힘으로 
가시를 뭉그러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시인> 중에서)
말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러 작품을 옮겨 적으면서도 
쉽게 넘겨지지 않는, 
괜히 더 상상하고 곱씹게 되는 시가 하나 있었는데

용기있고 소신있게 뭔가를 말하지도 못할 뿐더러 
안에 찰랑거리는 마음의 빛깔과 냄새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나는... 
이 시를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고 싶었더랬다.
4월 16일, 어젠.



비릿한   _ 최서림

어떤 말은 생쌀같이 씹히고 어떤 말은 밥그릇 속에 든 머리카락 같다 어떤 말은 입가에 묻은 밥알같고 어떤 말은 눈에 들어간 모래알 같다 애써 생쌀을 씹어 먹게 하고, 머리카락을 밥그릇에 집어넣게 하고, 모래알이 눈 속에 들어가게 하는 말이 있다 허연 눈자위가 핏발 서게 머드럭거릴수록 도드라지는 말들이 있다 종종 핏발이 서본 사람은 일부러 모래알을 집어넣지 않는다 생쌀을 씹어본 사람은 내켜 생쌀을 먹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머리에 붙어 있게 하고, 밥알을 밥그릇에 들어 있께 하는 말들을 뒤엎고자 마구잡이 칼을 휘두르는 컴컴한 말들, 패배한 말의 머리통을 밟고 선 점령군 같은 말, 빼앗은 밥그릇을 치켜들고 히히덕거리고 있다 깊고 어두운 데서 솟아나온 말들이 거리거리에 쫘악 깔렸다 비릿한 냄새가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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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에 있든 너와 함께할 거야 내인생의책 그림책 12
낸시 틸먼 글.그림, 신현림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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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았던 어느 오후, 

꽃구경 삼아 동네 뒷산에 있는 도서관에 올랐다.


벚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에 멈춰서서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도 듣고,

간만에 파랗게 보이는 시원한 봄 하늘도 마음에 담았다.


도서관에 오르는 돌 틈에 피어있는 꽃들에게도 눈길을 주며 조심스레 입구에 이르니,

때마침 어른 열람실은 개방하지 않는 날.



운명처럼 어린이 열람실에 들러 그림책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 많은 책 중에서 마음에 들어온 그림 책이 하나 생겼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너와 함께 할거야』.

이미 다른 채긍로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는데 잘 몰랐다.


아무 기대 없이 펼쳤던 그림 속에서 시원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이유없이 다 이해하고 사랑하는 듯한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태교일기장을 꺼내 

책 속의 구절 하나하나를 옮겨 쓰고 말았네? ^^;;;



비록 그 곱고 깨끗한 그림까진 담을 순 없었지만 

내 안의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엄마의 이야기.





네가 외롭거나 슬퍼지면, 

네가 시험을 잘 못 보거나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냥 고개를 들어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을 느껴 봐.

그게 바로 나야!

사랑스러운 내 아가,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어.


푸른 잔디 속에서...

바다 향기 속에서...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곳과 나무 꼭대기에서...

해 질 녘에 들리는 귀뚜라미 노래 속에서...


난 언제나 속삭인단다.

"사랑해, 사랑해, 널 사랑해!"                               (책 속에서..)




문득, 마음이 아리고 아프던 내 20대.

이유없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얻고 응원의 눈길을 깨닫던 내가 떠오른다.


아, 이 책의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이기도...

자연의 목소리이기도.... 하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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