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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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소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할 때면 은근히 긴장되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짧은 필력으로 이렇게 써보고 저렇게 써보아도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어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책의 내용 속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기분이 마침맞게 묘사되어 있었다. 오호라, 바로 이거였다!


레너드가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어려운 책을 읽는 경험과 비슷했다. 말년의 제임스의 작품이나 [안나 카레니나]의 토지 개혁에 관한 부분을 애써 읽어나가다가 별안간 다시 만족스러운 부분에 도달하고 점점 내용이 좋아지더니 결국 온통 마음을 빼앗겨 궁극적으로는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는 이유로 이전의 따분했던 부분에 거의 감사할 지경이 되는 경험 말이다. <2권 p286>


위의 문장에 나오는 “이전의 따분했던 부분”이 이 책에도 존재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매들린과 레너드, 미첼은 브라운 대학교의 대학원생이다. 그런 배경 덕분에 그들의 전공과 관련한 수업(기호학, 종교학, 영문학, 생물학)을 바탕으로 하는 학술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음… 그들의 난해한 토론과 사색은 나에게 꽤나 버거운 내용이었다. 특히 기호학 수업 내용은 저자가 브라운 대학교를 다니면서 본인의 경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사가 소상하다. 이러한 연유로 1권 중반까지는 이야기에 속도가 붙지 않아서 인내심을 요한다.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매들린과 레너드가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제법 급물살을 타며, 2권까지 읽고 책을 덮는 순간이 되면 이 책에 온통 빼앗긴 마음을 추스리느라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영어 원제는 “The Marriage Plot”이다.(플롯이라는 단어가 한번에 쉽게 딱 와닿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소설”로 제목이 바꾸었으리라 짐작한다.)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생긴 이래, 소설에서 결혼이라는 플롯의 자리매김은 변함없이 확고하다. 결혼을 하거나 안 하거나 결혼이라는 화두는 남녀관계에 맞물려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를 통해 결혼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는 시종일관 매들린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레너드와 미첼을 저울질했다. 이미 멋모르고 결혼해서 애엄마인 내가 이제 와서 저울질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그런데 결혼은 원래 멋모르는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매들린과 레너드도 그렇기에 결혼했다. 나 또한 그랬듯 아래와 같은 무모한 믿음을 가지고.


그녀는 결혼에 관한 앨윈의 불만이 결혼 생활과 남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듯 매들린은 자신의 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와 다르리라고, 전형적인 문제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1권 p498>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에서 미첼은 변화했다. 그는 더이상 멋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형식이 사랑을 완성하지 않으며 사랑은 완성이 없고 완성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는 매들린을 레너드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고, 결국 다른 선택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레너드와 매들린의 사이가 파경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나오는 레너드의 심리 묘사였다. 작가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문장들은 이 책의 백미였다. 문장들이 폐부 깊숙이 찔러 들어와서 페이지마다 잠시 호흡을 골라야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어머니는 널 안 좋아하셔.” 그 단어들이 물리적 타격처럼 레너드를 강타했다. 단지 매들린이 말한 내용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도 충분히 불쾌했지만 그 내용을 털어놓기로 한 매들린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런 말은 일단 언급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지금부터 레너드와 필리다가 한 방에 있을 때마다 그 말이 그곳에 도사리게 될 터였다. 그것은 매들린이 장차 그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1권 p136>


레너드는 바닥에 뿌리박힌 듯 서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계속 아주 빠르게 깜박거리니 눈물방울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가 리튬을 증오하는 만큼이나 그 순간 그것은 그의 친구였다. 레너드는 자신에게 돌진하려고 기다리는 거대한 슬픔의 파도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 정통으로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마치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투명한 작은 비닐봉지를 꽉 쥐어짜 젖지는 않으면서도 그 액체의 모든 속성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최소한 그것만큼은 고맙게 여길 만했다. 엉망이 된 인생도 온전히 그의 것은 아니었다.  <1권 p140>


이 모든 경우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기도 전에 상처는 이미 나 있었다. 최악인 점은 해가 감에 따라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 비밀 상자에 보관했다가 종종 뒤적거려 꺼내 보는 소중한 소지품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불행이라는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것들은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운 좋은 아이가 아니라면 나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운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꺠닫기 마련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이 온 생각을 지배해 버리기 마련이다. <1권 p144>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복잡미묘하고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마음에 언어로 정확한 형상을 부여한다. 그의 정교하고 유려하고 우아한 문장을 읽노라면 거울에 비친 마음을 또렷이 마주보는 기분이 들었다. 레너드의 마음을, 레너드의 마음에 덧대어진 내 마음을. 긴말해서 뭐하겠는가. 난 그냥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만 이렇게 말하면 임팩트와 설득력이 떨어질테니 이 책을 한마디로 소개할 수 있는 문장도 책 속 명문장을 빌려 말해볼 수밖에.

 

삶의 소음을 뚫고 도달해 와락 멱살을 움켜잡고 가장 진실된 것들에 관해 말해 주는 책이 몇 권 있다. <1권 p518>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보다는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더더욱 가슴 벅찼다. 문장들을 자꾸 곱씹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문장들이 자꾸 마음에 스며든다. 나는 매들린과 레너드와 미첼 때문에 얼마나 가슴 먹먹했는지. 하아—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한다. 그리고 엄지를 치켜든다. 역시 제프리 유제니디스! 여러분도 기꺼이 이 책에 멱살 잡히시길. 우리들의 젊은 날에 가장 진실된 것들에 관해 말해주는 이야기를 만나고 발견하시길….




* 해당 출판사로부터 이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이며 이 책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솔직한 애정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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