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모임차 친구네 동네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조금 일찍 가서 친구가 듣는 도서관 인문학강의를 나란히 앉아 같이 들었다. 4차시 강의를 듣고 5차시에는 미술관을 가는 프로그램. 우리 동네에서도 지난 달에 유사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 강만 아니 반 강만 듣고 나와버렸다. 죄송하게도 강사님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힘들어서였다. 중간 휴식시간에 나오며 들을만한 또는 자기 스타일의 강의를 찾아 듣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느꼈다.
오늘 강의하신 분은 강의자와 수강생 간의 래포 형성을 중요시 해서 내 기준으론 지나치게 소통에 중점을 두었고 도입부도 너무 길었다. 저런 시간에 그림을 한 장이라도 더 보여주지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림에서 화가의 감정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미술강의는 처음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들었다. 도서관 강의 듣기 경력이 아마도 강사님이 강의 하신 경력보다 훌쩍 뛰어넘을 것이기에 이제는 강의 들으면서 강사님 관상도 보고 성격 분석도 하고 심지어 저 단어는 이렇게 설명해야 쏙 들어올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시건방을 떨며) 앉아 있게 되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을 큰 화면으로 보면서 설명 듣기는 고등학교 미술 수업이 시작이었다. 당시 현역 작가셨던 미술선생님이 직접 만든 슬라이드로 그림을 한 장 한 장 보여주면서 작가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게 그렇게도 꿀잼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미술관련 강의가 있으면 체력이나 일정을 고려치 않고 나도 모르게 덜컥 신청해버리곤 한다. 유명 미술강사님들의 강의도 두루 섭렵했지만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했다. 결론은 미술스터디모임 같은 데 나가서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알아보니 그런 모임이 의외로 많아서 선택을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각자 공부해와서 발표하는(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겠지?) 그런 모임을 언젠가는 해보리라 생각한 게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적 못했으니 앞으로는 더 요원하다.
오랜만에 대형화면 앞 1열에 앉아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과 루벤스의 십자가의 내림과 렘브란트의 35세 자화상과 로트렉의 물랭루즈 포스터, 드가의 발레학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뚫어지게 보았다. 원화 바로 앞에서도 사실 그정도 자세하게 보긴 힘든 것을 알기에. 그리고 지금 이렇게 봐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것도 알기에 기억하고 싶어 구석구석 오래오래 봤다. 그림 자체는 새로움이 없었지만 강의 내용은 새로웠다.
강의 장면은 주제가 같더라도 강의자와 수강생에 따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래서 강의는 대상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고 창조가 가능한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기에 인상주의 강의를 수차례 들었다 하더라도 그 때 마다의 새로움이 있는 것이고.
새벽 2시까지 하는 젊은 미남 셰프의 차이니즈 주점에서 꿔바로우와 토마토누룽지탕을 벗해서 칭따오와 이과두주와 연태고량주를 마시느라
전화기를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은 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처럼 쏟아져 내린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을 저벅저벅 밟으면서 렘브란트(1606~1669)가 그냥 물감 살 돈이 없었던 게 아니었구나 중얼중얼 그림 외적인 데에 관심이 많았었구나 소설 외에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던 발자크(1799~1850) 처럼. 귀족의 삶을 동경했다는 건 둘이 비슷하네..중얼중얼. 아무리 추워도 나는 춥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오전 마음이었는데, 금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 정말 춥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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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낯섬>리뷰대회 배너가 보이는데 살짝 땡긴다. 만약 읽는다면 이번 기회에 오르한 파묵도
시간 순서대로 죽 섭렵해보고 싶다.
(언감생심 말이니까 하는 소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