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공포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가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10쪽
나는 사랑이란 것은 기질과 필요가 계기를 만나서 생겨났다가 암시 혹은 자기최면에 의해 변형되고, 그리고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11쪽
나의 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1 쪽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12쪽
그 때 1969년 겨울, 나는 조그만 앉은 뱅이 책상 앞에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을 지우고 있었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 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12쪽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381쪽
사실로도 지금까지 나는 내 삶에 성실했다. 애초부터 신념 따위의 강렬하고 고급한 감정은 갖추지 못했지만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적응은 해왔다. 10대에 공부했고 20대에 일했으며, 지난 학기부터 소도시 전문대학에 자리를 잡았으니 30대에는 그런대로 남들이 말하는 바의 사회적 기반도 잡은 셈이다.-383쪽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나의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위선과 악의를 배워가며 이형렬들은 군대에서 애인을 구하고 뉴스타일양장점의 계는 깨졌다가 다시 시작되며 신분상승을 위한 미스 리의 교태가 반복되는 한편에서 광진테라 아줌마는 둘째아이를 가짐으로써 뒤웅박 팔자 속에 구덩이를 판다. 정여사의 남편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으며 유지공장의 불 같은 뜻밖의 재난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그 사고는 이내 잊혀진 뒤 반복되며 사고가 잊혀진 뒤까지도 그 때 대동병원이 번 돈처럼 돈들은 증식을 계속한다. -384쪽
사랑이 여전이 배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나를 안심시킨다. 만약 사랑이 무겁고 엄숙한 것이었다면 나는 열두 살 그 때처럼 상처의 내압을 견디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385쪽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385쪽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자끄프레베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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