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책은 두 번 읽어야 읽었다!라고 말 할 수 있으려나. 다 읽은 그 순간에 앞으로 돌아가 일정부분을 다시 읽으면, 초반에 어버버 헤매며 읽었던 장면들이 선명해지고 줄거리가 또렷이 잡힌다. 무엇보다 그 소설이 더 좋아진다. 그리고 좋은 소설이라고 느낄수록 작가는 더 얄미워진다. 독자가 무방비로 첫 페이지, 또는 도입부를 읽을 때 작가는 쫌쫌한 시공의 그물을 그 안에 다 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 가는 것이니까' 이런 류의 문장들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종종 나온다. 읽다가 문득 멈추어 생각하게 되거나, 아, 이런 표현 하며 감탄한다. 어떤 갑갑함, 숨을 쉬기에 느끼는 일상적인 모호함 같은 것들을 해결하거나, 나 말고 너도?라는 공감을 느끼고 싶어 문학을 읽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나..답을 찾기 위해 읽지는 않지만 답 같은 문장들이 종종 등장해주는 이런 류의 소설들을 읽으며 마음이 단단해지고 숨이 쉬어진다. 왜인가. 그게 무엇인지 몰라 여기저기 흐트려놓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차분히 수습해주는 이런 사유들. 그리고 삶 그 자체가 문학이다라고 느끼게 해주는 스토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작가 캐기이다. 뭐야 이런 글을 쓴 사람. 누구야? 대체. 이런 기분으로 작가를 검색한다. 줄리언 반스. 아, 남자였구나. 하지만 정말 자기 이름 같이 생겼네. 이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옥스포드..무슨무슨 칼리지. 아 그 옥스포드의 어느 예쁜 석조건물 작은 마당이 있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학생이었겠구나. 어, 기자였기도 했네. 살만 루슈디보다 한 살 많구나. 올 해가 칠순이네. 한국작가들도 얼추 맞추어 검색해본다. 두 명 만에 갑장을 찾았다. 박범신.ㅎㅎ 문학사의 어디쯤에 줄리언 반스라는 바둑돌을 놓을지 더듬더듬 좌표를 그려 본다. 그리고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몇 권 더 읽을지, 무엇을 먼저 읽을지도 가늠해 놓는다. 그 시기가 금방 일수도 있고 문득 도서관에서 책을 발견하는 우연의 먼 훗날일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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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래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살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
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강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찌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적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순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13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불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 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 가는 것이니까. 어쨌거나 필 딕슨 선생이 우리에게 해준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리고 이제까지 소설과 무관하면서도 그에 준하는 삶을 산 사람은 - 롭슨을 제외하면- 에이드리언이 유일했다.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