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그는 사람들이 창문으로 온갖 쓰레기를 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창문 밑을 지나가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모자 위에는 늘 참외나 수박 껍질 같은 잡동사니가 얹혀 있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거리에서 매일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에, 알다시피 그의 동료인 젊은 관리가 보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바짓부리를 매는 끈이 떨어진 것까지 알아챌 만큼 기민하고 예리한 눈길로 항상 쳐다보는 것, 그래서 언제나 그 관리의 얼굴에 교활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에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뭘 쳐다보든 거기에서 자신의 가지런한 글씨체로 정성껏 쓰인 깔끔한 문장들을 보았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말이 그의 어깨에 낯짝을 얹고 뺨에 콧김을 불 때에야 비로소 자기가 서류를 정서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길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식탁에 앉아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파리가 붙어 있든 뭔지 모를 이상한 것이 들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양배춧국을 급하게 떠먹고 양파를 곁들인 소고기 한 조각을 모두 먹어 치웠다. 배가 불룩해진 느낌이 들면 그는 식탁에서 일어나 잉크통을 꺼내 집으로 자신만을 위해 일부러 서류를 베껴 적었다. 문체가 유달리 아름답다기보다는 주로 수신인이 새로운 사람이거나 중요한 인물인 서류들이었다. 17쪽

 

동생이 중1조카에게 주려고 셰익스피어 책들을 샀다길래, 이 책이 떠올랐다. 우리 나라 정서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문학보다 러시아 문학이 더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 오던 참이다. 나도 중1때 셰익스피어 희극들을 재밌게 읽긴 했지만, 고골의 외투 같은 책을 그 시기에 읽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문학동네 세계명작 시리즈는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권할만 하다. 일단 러시아문학을 읽을 때 걸림돌이 되는 것이 도무지 발음하기조차 힘든 복잡한 이름들인데, 그냥 두꺼운 책으로 읽다보면 그런 요소들이 책 읽기를 멈추게 하는 핑계가 된다. 일러스트 세계명작 시리즈는 얇고 판형도 크고 삽화까지 있으니 중고생들이 읽기에 그만이다. 물론 직장인들의 가방에 들어가기에도 맞춤하다.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정말이지 슬픔을 자아내는, 존재자체만으로도 안쓰러운 인물의 전형이다. 평범한 캐릭터가 아닌데도 대중적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나오는 그 피아노 선생님이 떠올려지기도 하고, <스토너>의 스토너가 생각나기도 한다.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가 아닌, 열심히 성실하게 산다고 해서 결과가 늘 장밋빛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이 미리 좀 알아도 좋지 않을까. 관료주의 사회를 미리 경험해보는 것 만으로도 인생 공부로 치자면 얇고 감각적인 책의 모양새보다 훨 값어치가 있다.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웃기면서도 슬픈 이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읽을 때 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나는 좀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열성적으로 일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그는 애정을 갖고 근무했다. 이 정서하는 일에서 그는 다양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이건 의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정서는 자기 직무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 노동이지만 아카키에게는 만족과 즐거움의 세계입니다. 아카키는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인물입니다. 정서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아카키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9급 관리로서 아카키가 있고, 자기 일에 열정을 갖고 지극한 만족감을 만끽하는,5등관이라 불릴 만한 아카키가 있습니다....아카키가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 충동의 세계입니다. 정신분석학 용어로 '충동(drive)'은 욕망과 달리 주체가 대상 주위를 계속 선회하는 데서 만족을 얻습니다. 곧 충동의 목적은 선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 겁니다....아카키는 400루블의 급료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적은 돈으로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 이게 고골이 생각했던 나름대로 이상적인 삶입니다. 그러니 아카키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들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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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ony 2016-05-26 13:19   좋아요 0 | URL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