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의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셀 프루스트 -카라오스만오울루의 번역본에서

 

서문

 

나는 매년 여름 게브제 군에 일 주일 머무는 동안 그곳에 있는 폐허 같은 문서 보관소에서 무엇인가를 긁어모으곤 했는데, 칙령과 땅문서 등록부와 재판 기록부와 공문서로 빽빽이 찬 먼지 나는 궤짝 안에서 1982년에 이 필사본을 발견했다. 누렇게 낡은 문서들 틈바구니에서, 꿈꾸는 듯한 푸른색 에브루로 고상하게 만든 표지와 또박또박 씌여진 글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이 필사본은 쉽게 내 눈에 띄었다. 내 호기심을 더욱더 자극하기 위해 원작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책의 첫 장에 제목을 써놓은 것 같았다. '포목상의 의붓아들'.다른 제목은 없었다. 책의 가장자리와 빈공간에는 단추가 많이 달린 옷을 입은, 머리통이 작은 사람들이 서툰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단숨에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베껴 쓰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특별히 감시하지 않는 그곳 청소부의 신임을 악용하여 재빨리 그 책을 내 가방에 넣은 다음, 젊은 군수조차 '문서보관소'라고 부르지 않는 그 쓰레기장 같은 곳을 빠져 나왔다. 12쪽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이었다. 터키 함대가 우리 길을 가로막았다. 우리 배는 고작 체 척이었고,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그들의 갤리선 대열은 끝이 없었다. 우리 배 안은 갑자기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다. 대부분이 터키인과 무어인으로 구성된 노 젓는 노예들은 함성을 질렀고, 우리는 신경이 곤두셨다. 17쪽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못하는 닮은 사람들 55쪽

 

나는 이제 이스탄불 거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자신이 투명인간이며, 그들 사이를, 정원에 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밤나무, 박태기나무 사이를 유령처럼 지나가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59쪽

 

지금 추억을 더듬어 과거를 만들다보니, 이 부분이 내가 어린 시절 들었던 동화나 그 동화를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들에게 재료가 될 만한 행복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60쪽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학문과 궤변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다시 '인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마치 인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인식하고 있기라도 한 듯이 행동했다. 61쪽

 

그는 "사람이 왜 이런지 또는 왜 그런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아, 네가 진짜 의사여서 우리 몸, 우리 몸 속과 머릿속을 내게 가르쳐준다면..."하고 말했다. 그는 조금 무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태연한 척 가장하며 설명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끝까지 가겠다고 했다. 끝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기도 하고, 그 외에 마땅히 할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이 모든 것을 내게서 배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나중에는 우리 둘만의 비밀인 것처럼 그는 그 말을 자주했다. 하지만 그 단호함에는 환상을 꿈꾸며 자주 질문을 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배어 있었다. 끝까지 가겠다,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자신에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묻는,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슬프고 분노에 찬 저주를 보는 것 같았다. 70쪽

 

끝날 것 같지 않던 불면이 두려웠던 밤, 젊은 시절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하곤 했던 내 친구에게 느꼈던 친밀감, 이 후 그 친구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생각하고 그와 함께 산 채로 매장되는 상상을 하며 느꼈던 공포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이러한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후 나는 용기를 내어 내가 지닌 꿈을 이야기했다. 내 몸이 내게서 빠져나가, 어둠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와 닮은 사람과 결탁하여 둘이서 함께 내게 대항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93쪽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쓰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의 글 쓰는 스타일과 행동거지에는 내가 좋아하고 배우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훗날에 온전히 받아들일 만큼 좋아해야 한다. 95쪽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했고, 왜 그가 그인지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속였고,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쓸데없이 다시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호자는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지겨워지자 한동안 집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다시 내게로 왔다. 그러고는 우리가 우리의 진짜 생각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보이듯,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본질을 볼 수 있다고. 98쪽

 

우리는 이 일을,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하는 일이며, 결국 이 일은 바보들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 들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주장했다. 103쪽

 

그 당시 나는 나의 불행을 잊기 위해, 잠잘 동안 행복한 꿈을 꾸면 그것을 종이에 써나갔다. 의미와 행위가 같았던 그 꿈들을, 잠이 깬 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시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기록했다. 113쪽

 

흑사병에 전염된 것처럼 학문에 전염 된 사람도 그것에서 도망칠 수 없다

114쪽

 

우리는 좋은 이야기란 처음 부분은 동화처럼 천진난만해야 하며, 중간 부분은 악몽처럼 무서워야 하고, 마지막 부분은 이별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처럼 슬퍼야 한다고 생각했다. 144쪽

 

왼손잡이 서예가가 깨끗하게 베껴놓은 결론 부분에는, 호자가 아주 좋아했던 그 '가득 찬 서랍으로 비유'된, 우리 뇌의 복잡한 비밀에 대한 수수께끼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정형시가 있었다. 자부심 가득하고 잔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시의 잔잔한 안개는, 호자와 함께 썼던 가장 좋은 책을 슬픔으로 끝냈다. 168쪽

 

나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환상을 말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기 때문에 나도 오늘날 대부분 믿고 있는 이 환상이, 내가 젊었을 때 정말로 경험한 것인지 혹은 책을 쓰기 위해 매번 책상에 앉았을 때 연필 끝으로 다가온 꿈 같은 이야기인지는 지금 판별해 낼 수 없다. 187쪽

 

언덕에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길은 도저히 끝이 나지 않는다. 어두운 숲과 산자락 사이에 있는 평지에 시냇물이 자주 넘치는 바람에 만들어진 더러운 늪이 있다는 것을, 그 늪을 넘은 보병들과 포병들의 엄호에도 불구하고, 그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219쪽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가요? 234쪽

 

이 이야기들은 내게 왠지 이상한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울고 싶었다. 태양에 물든 노을이 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블리야가 내게도 이런 놀라운 이야기들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가 정말로 놀라는 것을 보고 싶어, 동행과 함께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했다. 내게는 그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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