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마음이 이틀을 가기 어렵다. 어제 그제 좀 차분한 듯 싶더니, 오늘 해가 쨍나는 것을 보니 짜증이 밀려온다. <앵두를 찾아라>를 아무데나 펼쳐서 읽는다. 머리맡에 두고 마음이 헝클어질 때 마다 읽기에 좋다.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늘 구찮다. 하지만 들여다보지 않으면 다스려지지가 않는다. 오늘 짜증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결과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용서하기로 한다. 젊어서도 컨디션이 안 좋을 수 있는데, 요즈막은 조금만 건강에 이상이 생겨도 늙느라 이렇구나 싶으니 두 배로 서럽다. 변월룡전을 보러 가려 하였더니 덕수궁 미술관은 월욜이 휴관이다. 목요일은 오후 7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하니 시팀들과 함께 관람 제의를 해봐야 겠다. 혼자 잘 다니지만, 때론 혼자 가면 무슨 재민겨. 하는 날들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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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다 돌아도 한 시간이면 된다고 들었다. 국토 최남단 땅의 무한 들판과 무변 바다 앞에 가슴을 활활 연다. (왜 짜증이 나는지 알았다. 바다를 못 보아서 ㅋ) 호방한 바람과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훌훌 걷자니(나도 호방한 바람 맞으며 훌훌 걷고 싶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솟는다. 한 시간으로는 부족하겠다. 나라는 섬, 너라는 섬도 그 짧은 시간으로는 턱없다. 발아해 밟히는 여린 풀자락에 물기가 맺쳐 있다. 서럽게 맺힌 그 물방울의 의미를 너도 나도 알지 못했으니 돌고 도는 인연으로 억거브이 시간이 흘러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입불상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기원정사를 나오며 전화로 나가는 배 시간을 뒤로 미뤄 둔다.
이제 섬의 절반을 지나, 처음 보는 그림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높고도 낮은 언덕에 마라도 성당이 한 폭의 자연주의 그림으로 서 있다. 조개껍질 같기도 원시 동굴 같기도 한,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외형이 마음을 잡아끈다. 천날 곽지과물해변에서 맞은 호우로 축축한 운동화를 양말과 함께 벗어두고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텅빈 공간의 품이 넓다. 수수하고 가녀린 성모상과 그 앞에 봉헌 된 은촛대에 의지하지도 않고 조용히 몸을 사르는 한 자루 양초뿐이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그저 쉬어 가라고 지어 놓은 정자마루처럼 편안하다. 마룻바닥에는 소박한 면 방석 대 여섯 개가 가지런히 깔려 있고 프란치스코 교황과 기도하는 성모의 손이 액자안에 담겨 뒤쪽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옆에는 성경 몇 권, 사람들의 이름과 기도의 말들이 적힌 공책이 나란하다. 하나하나 읽어 본다. 사는 일의 무수한 소망들이 눈물 겹다. 소망하는 것을 조심하라. 내 속에서 들리는 이 말에 나는 아무 말도 적지 않는다. 감히 무엇을 소망할 수 있을까.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