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시절 몸 담았던 언론계의 선배들 중에 심연섭 선생은 잊히지 않는 분의 하나이다. '국제국장'시절의 그가 아침 출근과 동시에 국장석에 앉아 맨 먼저 하는 일은 맥주병 마개부터 따는 일이었다. 수습기자들에게 통행금지 시간까지 술을 퍼먹인 다음 이튿날 아침 비실대며 늦게 나오는 올챙이들을 혼내는 것은 그의 유명한 훈련법이었다. 가끔 그는 여름날 부하들을 몰아 산에 가자 해놓고 막상 산자락에 당도하면 "양반이 땀 뻘뻘 흘리며 산에 올라 갈 수 있나? 그건 하인들이나 시키지"라며 계곡에 어죽솥을 걸어 우리더러 불 때게 해놓고 자기는 웅덩이 물속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물에 듭실 적의 심연섭 행색 보소, 머리에는 '도리우찌' 쓰고 입에는 '청자'담배 피워 물고 볼록한 술배를 웅덩이에 담근 다음 치느니 개헤엄이라. 영락없이 그것은 양반이 개헤엄을 친다는 순수한 모순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개헤엄에도 위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보았다. 도리우찌 쓰고 담배 연기 뿜으며 개헤엄을 치면서도 담배불이 물에 젖어 꺼질세라 온갖 정성을 다하는 그의 수중 운신법은 보통 품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그 담뱃불을 지키기 위해 물속에서 은근히 필사적이었는지 모른다. 양반이 땀 흘릴 수 있나. 하인들이나 시키지, 하던 그 심선배는 세상 뜰 때까지도 자기 집 한 채가 없었다. 선비였고, 정신의 귀족이었을지언정 결코 '재물과 권세의 양반'이 아니었던 그는 비록 개헤엄으로라도 불을 꺼트리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름날 우리를 북한산 골짜기로 몰아갔던 것일까? 아니면 개헤엄을 쳐서라도 지킬 불은 지키는 것이 이 시대 선비의 도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불이 고작해야 가난한 담뱃불일 때에도? 10쪽 초판 서문 중에서

 

 

 

세상에 나왔더니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몇 달 전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뜬 뒤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 뿐아니라 이름까지 그대로 물려받아 알렉상드르 예르생이라 불렸다. 1863년 태어나 1943년 여든 살에 숨을 거둔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에게 이름을 물려 주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악명 높은 흑사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학명이다. 한때 유럽인 셋 중 하나의 목숨을 앗아갔던 역병을 통해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역사상 그 어느 전쟁이나 자연재해보다도 무자비했던 이 균을 추출하여 치유의 길을 열었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12년 프랑스 소설가 파트리크 드빌이 발표한 <페스트와 콜레라>는 그의 삶을 그린 일종의 전기 소설이다. 이 작품은 모든 문학상의 후보 목록에 올랐고 마침내 <페미나상>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일곱개의 문학상 수상작들 중에서 다시 한 편을 골라 수여하는 <문학상의 문학상>이라는 묘한 상도 받았다. 거칠게 요약하면 2012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420여편의 소설 중에서 신정된 일곱 편의 수작을 대상으로 다시 한 편만을 고르는 상중상을 받은 셈이다. 무심한 서점 직원이 의학서 코너에 꽂을 법한 제목이지만 한 해 문학농사의 대표 작물이라니 궁금하다.

 소설가나 시인, 아니면 화가, 음악가의 생애를 그린 예술가 소설은 흔한 데 비해 대중에게 생소한 분야의 인물이 소설화된 것이 이채롭다. 하지만 작가는 "시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광기에 가깝다"고 한다. 과학 분야의 뒷이야기로는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이 인상적이지만 화자가 곧 이야기의 당사자인 <이중나선>은 굳이 따지자면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에 속한다. <페스트와 콜레라>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한 인물의 삶을 추적하지만 서술의 순서는 딱히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 않는 터라 설명의 편의상 우선 시간 순서에 따라 예르생의 삶을 정리해보자.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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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의 광고 문안은 믿지 않는 편이지만, "혜성처럼 등장해 전설이 된 비평의 부활" 인문학자 도정일의 첫 문학에세이. 22주년 개정판. 이라는 제목만으로 구입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와 첫 부분을 읽고 반해서 빌려 온 <소설, 때때로 맑음>을 오늘 읽으려고 한다. <소설, 때때로 맑음>은 지난 주에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좋아서 잠시 숨고르기 중이었고,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오늘 처음 읽기 시작하는 책. 아침에 시간이 남아 첫 부분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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