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그냥 선택되어지지 않는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제목이 눈에 띄어 뽑아보는 일이 있을지라도 '읽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도 누군가가 좋다고 해서 꺼내 들었지만 꽤 오래 시루었다. 인연이었는지, 떠나지 않고 곁에 있다가 오늘에야 결국 제대로 만났다고 해야 하나. 아침인 줄 알고 잠이 깬 자정부터 시작해 꽤 재밌게 대여섯 작품을 읽었다.
1931년생 앨리스 먼로가 1968년에 낸 첫 작품집이다. 책날개의 사진이 노년의 앨리스 먼로라, 당연히 이 책도 5,60대의 먼로가 썼겠거니 했다. 마흔도 안되어 이런 작품들을 써내다니, 작가로 태어난 사람이구나,한다. 30대 후반이 이런 통찰력으로 작품을 써낸 곳이 어딘지, 괜히, 지도에서 캐나다 온타리오주도 찾아 보고, 주빌리도 찾아 본다.
50여년 전의 작품인데, 오늘을 읽은 것 같다.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은 예리하고 서술은 담담하다. 무료한 인간은 무료하게 지루한 풍경은 지루하게 그렸다. 상처있는 인물들을 건드리고 위로하는데, 설교하지 않는다. 상황을 보여 줄 뿐이다. '죽음 같은 시간'의 퍼트리샤나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의 매디는 현실을 직시하는 자체가 상처가 된다. 상처를 외면하는 것은 내면의 고통을 키운 뿐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볼 수가 없다. 그 자체가 너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들의 상처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돌아본다. 그렇게 먼로는 삶의 다양한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독립적인 공간을 원하는 주부 작가. 농장에 사는 여자 아이, 오래 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신 딸, 무료한 시골의 일상에서 한 번 놀만한 상대를 찾는 젊은이들...
사람과 풍경이 빼곡한데, 참 황량하다.황량하다 고 쓸쓸해 하는 내게 먼로는 말한다.
"사람은 저마다 제각각의 풍경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랍니다."
작업실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 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13
태워줘서 고마워
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로이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속으로는 도대체 기대고 있으면서 경멸스러워하고, 순순히 따르면서 성이 나 있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다가가기 어렵게 하는 여자애라니. 그 때 나는 만지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데, 그건 당찮은 바람이었다. 몸을 만지는 일보다 대화를 한다는 게 로이스에게는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152
서로 떨어져서 무지근한 몸으로 각자 검불을 털어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헛간을 나와 달은 졌으되 그루터기만 남은 평평한 밭들도 미루나무들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하고, 그 무모한 여정을 끝낸 다음 한기에 오슬오슬 떨던 우리도 여전히 그대로라는 걸 발견하고, 차로 돌아가 두 사람이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트리스테(쓸쓸함)이다. 트리스테 에스트.(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는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또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앞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 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차를 빨리 몰았을 뿐이다. 158
죽음 같은 시간
이 집도, 나무로 지은 나머지 다른 집들도 페인트 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물매가 가파른 지붕마다 덕지덕지 땜질을 했고, 좁다란 베란다들은 비스듬히 기울었다. 굴뚝마다 장작 연기가 피어 올랐고, 유리창에 짓누르고 있는 아이 얼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집들 너머에는 군데군데 갈아 놓은 밭과 풀이 무성하고 돌투성인 나머지 땅이 가느다란 띠처럼 늘어져 있었으며 그 뒤로 오종종한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 앞쪽으로는 마당과 메마른 텃밭과 시내로 통하는 잿빛 고속도로가 있었다. 눈이 왔다. 고속도로와 집들과 소나무들 사이로 눈은 천천히 고루고루 내렸다. 처음에는 커다랗더니 차츰차츰 작아진 눈송이가 딱딱하게 굳어진 밭고랑에서도 땅에 박힌 바위에서도 녹지 않았다. 204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해 겨울은 예전에 헛간 앞에서 엄마가 꺼냈던 그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듣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몹시 불안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유유히 흐르는 생각의 물줄기가 이 한 가지 주제에서만큼은 곁길로 새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계집애라는 말이 아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 같았다. 계집애는, 내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냥 본디부터 타고난 내가 아니라 어떠어떠하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였다. 계집아이를 규정하는 말은 언제나 강다짐과 꾸지람과 실망의 뜻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레어드와 싸우면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팔을 눈 깜짝 할 사이에 동생에게 잡혔는데 움쭉달싹도 할 수 없었고 무척 아팠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몇 주일 묵을 때면 으레 듣는 말들은 또 어떻고.
"계집애가 그렇게 문을 꽝꽝 닫으면 못쓰느니라."
"계집애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야 하느니라."
그보다 더 심한 말을 들은 건 내가 질문을 했을 때였다.
"계집애가 그건 알아서 어디다 쓰게."
그래도 나는 계속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았고, 되도록 다리를 쫙 벌리고 볼썽사납게 앉았다. 그것이 내 자유를 스스로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221
이 근방에는 농장만 있을 뿐, 플로라가 내쳐 달아날 야생 지대가 없다. 더욱이 아버지가 돈을 주고 플로라를 산 것은 여우에게 먹일 말고기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우리가 먹고살자면 여우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짓은 가뜩이나 뼈 빠지게 고생하는 아버지를 더 고생시키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한 짓을 알게 되면 아버지는 앞으로 날 믿지 않을 거였다. 온전한 아버지 편이 아니라고 여길 테니까. 나는 플로라 편들어 주었고. 그로써 나는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플로라에게 조차. 그렇다고 해도 후회스럽지는 않았다.플로라가 나를 보고 뛰어왔을 때 나는 열린 문을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231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괴기스러운 우리 엄마 말인데, 이젠 나도 지칠 대로 지쳐서 엄마를 그냥 두거든. 엄마를 사람답게 만들려고 기를 쓰는 일 따위 이젠 안 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매디는 신앙심이 깊어서 자기희생이라는 희열과 전면 포기라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마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352
지구상 어디에도 주빌리로 통하는 편한 길이 없었으므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큰길과 샛길을 거쳐 온 탓이다. 353
"여기가 엄마네 집이에요?"
나는 딸아이의 목소리에서 착잡한 실망감, 뭐랄까 체념한 듯한, 아니 벌써부터 체면하고 있었던 듯한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전설의 근원이라는 데가 도대체 신통치 않고 안쓰럽고 악착같은 현실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찰나의 무미건조함과 이상야릇함이 오롯이 담긴 목소리였다.354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럴만도 한 것이 마살레스 선생님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아이들을 대했기 때문이고, 고지식한 이상주의자의 인자함은 선생 노릇을 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없이 자상하고 미안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지적하는 것 말고는 꾸중이라는 걸 할 줄 몰랐고 칭찬할 때는 허무 맹알하리만큼 치켜세우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니 보기 드물게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조차도 훌륭하다 할 만한 실력을 익히지 못했다.383
기적을 믿는 사람은 정말로 기적이 일어날 때 법석을 떨지 않는다.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