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책 반납일이란 문자를 받고 나서야 도서관 책들이 떠올랐다. 동생집에서 빌려 온 책들과 새로 구입한 책들을 방안에 펼쳐 놓고 이리 저리 뒤적이다 이번 주가 흘러가 버렸다. <다뉴브>는 두 번째 빌려와서도 결국 표지도 못 넘기고 돌려 줄 판이고 <헤겔 미학개요>는 헤겔의 <미학강의> 서론 해설인데 (서론만 해설했다는데 무려 355페이지)  강의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베이스로 빌려 온 책이다. 역시 이번 차수엔 고이 모셨다가 보내 드린다. 이번 도서관 책들 중에서 두께로 1위인 <조지프 앤턴>만 겨우 삼분이 일 가량 읽었다. 두꺼운 책들은 지레 읽지 않는 편인데,읽다보니 빠져 들었다. 뭔가 옮겨 적고 싶어서 진도가 안나갔는데, 나머지는 책을 사서 밑줄긋기를 하며 읽어야 겠다.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인데 소설처럼 읽힌다. 아, 그리고 엊그제 밤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멋진 날들>을 휘리릭 보았다. 영국 귀족 베네시아가 일본의 자연 속에서 살면서 보낸 사계절 이야기이다. 허브 정원을 가꾸며 사는 베네시아표 각종 허브 활용법과 요리법, 아름다운 사진들이 볼만 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성안에 살면서 어쩌다 한 번 나가 본 마을에서 본 소박한 허브정원에 반해, 허브정원을 가꾸며 사는 소박한 삶이 꿈이 되었다는 베네시아. 직접 키운 카모마일로 만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정원에서 따온 세이지 잎을 넣어 끓인 허브 티로 아침을 시작하는 그녀의 삶은 언젠가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의 세계이다.

루슈디의 공책에는 마물리씨라는 미완성 등장인물이 있었다. 마물리씨는 그냥 보통 사람인데 지긋지긋하리만큼 어리석었다. 문학에서는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코기토씨나 이탈로 칼비노의 팔로마씨와 비슷한 부류다. 성명은 아지브 마물리. 이름이 브래드퍼드 시의원의 성과 같은데, 이 말은 "괴상하다"는 뜼이다. 그런데 마물리는 반대로 "예사롭다"는 뜻이다. 요컨대 그는 `괴이한 보통`씨, `이상한 정상`씨, `야릇한 평범"씨였다. 이름부터 모순어법이고 자가당착이다. 아무튼 루슈디가 쓴 미완성 소설에서 마물리씨는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피라미드를 머리에 이고 다녀야 했는데, 꼭짓점이 대머리를 콕콕 찔러 가려움증이 극심했다. 218

루슈디는 자기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이것저것 조합해보았다. 블라디미르 조이스. 마르셀 베케트. 프란츠 스턴. 그런 식으로 짝을 지어 목록을 만들어보았는데 모두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스꽝스럽지 않은 조합을 발견했다. 나란히 적어 보았다. 콘래드와 체호프의 이름. 바로 그것이 앞으로 11년 동안 쓰게 될 이름이었다.
"조지프 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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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부적절해진 제목이 붙은 <나르시스호의 검둥이>에서 주인공이자 선원인 제임스 웨이트는 긴 항해를 앞두고 결핵으로 앓아 눕는데, 몸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승선했냐고 묻는 동료 선원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소?" 그 책을 읽을 때도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이 상황에 비춰보니 이 힘찬 문장은 지상명령과 다름 없었다. 220

그는 블레이크에게 서평을 계속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부터 몇 주마다 한 번씩 800단어 안팎을 써 보냈다. 글은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 생니를 뽑는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비록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제 걸핏하면 사랑니가 아파 경호팀이 "해결책"을 궁리하는 중이었으므로 더욱더 실감이 났다-어설프나마 그것은 자신을 되찾는, 즉 루슈디를 떠나 살만으로 되돌아가는, 즉 작가 아닌 사람이 되겠다는 서글프고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다시 문학 쪽으로 다가가는 첫걸음이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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