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매들과 톡을 하다가 막내동생이 <안나카레니나>를 재밌게 읽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방학을 하고도 2주동안이나 '방과후 수업'을 하느라 고단한, 자아가 강한 외동이를 키우느라 늘 지쳐하는 동생을 위해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읽기>에서  [안나 카레리나를 읽는 즐거움]을 옮겨 적는다. 로쟈는 이 책에서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 푸슈킨과 레르몬도프의 사랑시]와 겹쳐 읽기로 <안나 카레리나>를 소개하고 있다.

 

한겨울은 러시아문학의 고전을 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시간에 두툼한 책장을 넘기며 이내 밤을 새우고, 어스름하게 비치는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는 일은 이런 계절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런 밤에는 백석의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눈이 폭폭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읊조려보고, 그런 아침에는 그의 푸슈킨 번역시 구절을 음미해봐도 좋겠다. '아침 날 눈위를 미끄러지며/부산떠는 말이 달리는데 맡기어/찾아가자, 사랑하는 벗아, 빈 벌판을/ 어제런 듯 풍성하던 그 수풀을,/그리고 정다운 나의 강가를.'(<겨울 아침>)

 나타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소설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지만, 세계문학전집 출간 열풍 속에서도 아직 '무풍지대'로 남아 있어서 내가 펼쳐든 책은 <안나 카레리나>다. 강의 시간에 주로 범우사판을 사용했는데, 요 몇 년간 3종의 새 번역본이 더 출간돼 읽을 만한 여건은 충분하다. 자세히 읽고 싶은 대목이 나오면 네 종의 번역본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유명한 첫 문장만 하더라도 번역은 제각각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대로 불행하다'(작가정신)

 

 가정 문제와는 사정이 달라서 번역이 제각각이라고 하여 독자가 불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엇비슷하다면 번역본의 존재 의의가 상실 될 것이다 (베낀 번역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알다시피 <안나 카레리나> 이야기는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난 오빠 오블론스키 집안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하여 동생 안나가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전에 소설은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을 등장시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미리 알려준다. 키티에게 청혼하러 온 시골 지주가 먼저 만나는 이는 친구이면서 키티의 형부인 오블론스키다. 사무실로 찾아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고 돌아간 부유한 지주 레빈의 처지를 부러워하며 오블론스키는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번역자들은 각각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게다가 얼마나 팔팔하냐 말이야!" (범우사) 

"게다가 얼마나 생기가 넘치나!"(민음사)

"게다가 또 얼마나 발랄하냔 말야!"(문학동네)

"건강은 또 어떻고."(작가정신)

 

 해서 우리가 그려보게 되는 레빈은 팔팔하고 생기가 넘치는데다가 발랄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하지만 키티의 어머니 공작부인ㅇ느 그런 레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더 젊고 부유하며 잘생긴데다가 시종무관으로서 앞날도 창창해 보이는 브론스키가 훨씬 더 나은 사윗감이라고 여긴다.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주 집에 드나들며 브론스키가 한창 키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즈음에 나타난 레빈이 달갑지 않다. 딸이 레빈에게 대한 '성실성'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걱정한다.

 

"레빈에게 한 때는 호감을 품었던 것 같은 딸이 필요 이상의 성실함으로 인해 브론스키를 거절하지나 않을까."(문학동네)

 

이 대목의 '성실함'을 다른 번역본들이 '브론스키의 성실함'이라고 본 것은 착오이다. 성실은 '가정생활'을 모르는 브론스키와는 거리가 먼 덕복이다. 그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끌려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하지만 브론스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간 기차역에서 곧 안나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될 것이다. p187

 

더불어 혼자 읽기 아까운 서문의 일부분도 옮겨 적는다. 국어 교사들이 암기해서 학생들에게 그대로 들려줘도 '지식 공유주의자 로쟈'는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작품에 대한 읽기를 굳이 '다시 읽기'라고 적은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글이 다시 읽기의 결과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고전은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는 관점을 반영한 때무이기도 하다. 다시 읽기란 단순한 반복적 읽기가 아니라 '고쳐 읽기'이고 '거슬러 읽기'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되읽기가 쓰기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다시 읽으면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읽기와 쓰기는 서로의 꼬리를 물며 순환한다. 이 책은 그러한 순환의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래전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생각과 이해에 도달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내겐 '발견'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 즐거움은 많은 부분은 '뭔가 써야 한다'는 강제에 빚진 것이다. 그런 의무가 없었다면 나는 책을 다시 손에 쥐었더라도 소홀하게 읽고 말았을지 모른다. 즉 '쓰기'는 다시 읽기의 중요한 조건이다. 써야 하기 때문에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으면 또 쓰게 된다. 이 책이 그러한 '쓰기'를 자극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 날 현장의 국어 교육이 '읽기와 쓰기'와 무관하게 흘러감은 통탄할 일이다. 국어 교육이란 모름지기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건만, 현장의 현실이란, 읽히기는 커녕 쓰기 교육은 언감생심 꿈꿀 수도 없다. 수십 년 전의 우리 세대는 학원을 안가는 여유시간이 있었기에 중고교시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전집들을 독파하곤 했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읽은 것은 읽었다고 말 할 수가 없구나 라고 느끼긴 하지만, 그 때의 경험이 최소한 '다시 읽기'라는 선택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 경험도 배경지식도 전무한 덩치만 큰 아기들을 앉혀놓고, 수능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현장의 교사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면서, 또 그럴수록 부단히 '읽기와 쓰기'에 대한 화두를 놓치지 말기를 당부해본다. 정부는 방과후 수업에 예산을 쓰지 말고 교사를 확충해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고, 교사의 수업외 잡무를 줄여 교사가 학생에게 할애할 시간을 확보함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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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2015-01-18 12: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특히 마지막 단락 옳소!! 읽고 싶지만 읽을 시간은 좀처럼 안 나는 현실.. 밤 새우는 것은 더욱 무리 흑! 참 카레니나!로 고치기. 북클럽 엄마들 중에도 요거 잘못 쓰고 헷갈려 하는 사람 많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