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호원숙 그림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호미? 박완서 선생님의 책은 어지간한 건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제목이다. 서문을 보니 2007년에 출간된 책을 2014년에 개정판을 낸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 없던 시절에 나온 책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만 3년이 되었다. 개정판의 특징은 선생님의 맏따님이 노란 집 마당에 피는 꽃들을 그린 것을 삽화로 넣은 것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그리기 시작했다는 꽃그림은 서툰 솜씨이지만 소박하고 정감있다. 무엇보다 꽃그림을 보니 선생님의 마당에 어떤 꽃들이 피었는지 다 알겠다.

 

나는 초봄에, 아니 아직은 겨울인 2월 말쯤에 피기 시작하는 땅꽃들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다. 복수초나 노루귀,바람꽃, 샤프란등이 그들이다.  먼 산에 아직 눈이 남아 있을 때 언 땅을 뚫고 피는 이 꽃들의 특징은 말 할 수 없이 연한 꽃잎들을 가졌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호미>의 글들은 대개가 일흔 이후에 씌여졌다는데, 찐 호박잎에 어쩌다 남아 있는 잔가시 정도의 가슬함과  이른 봄의 꽃잎들 마냥 순하고 연한 글들이었다. 순하디 순한 것이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의외의 강인함은 선생님을 닮았다.

 

'호미'로 말하자면 나도 호미 매니아다. 5일장에 갈 때면 늘 대장간 앞에 머물며 호미를 구경하곤 한다. 좀 맞춤하다 싶으면 사기도 하고, 텃밭이 없는 나는 언젠가 텃밭을 가꿀 때 필요할거야 하며 호미를 산다. 돌나물, 머위잎, 참게장, 호박잎과 강된장. 선생님도 나랑 식성이 같으셨구나하며 신기해 한다.  김훈 선생님도 그렇고 일면식도 없는 이 분들이 나는 오래 정을 준 지인 같이 여겨진다. 선생님은 꽃들을 마당에 심어 가꾸셨고, 나는 산으로 꽃을 보러 돌아다녔지만, 꽃 피는 순서를 새겨 기다리며 반겼다는 점은 같다. 더구나 매화 피는 섬진강변을 좋아하셨으니, 호박잎에 강된장만 놓고 마주 앉아도 화제가 끊이지 않았을 텐데... 마치 공통점을 찾아 가는 게임처럼 발견의 기쁨을 느끼며 읽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 끝의 불안과 주저 앉힘을 당한 심술의 틈바구니에서 하루를 보내며 <호미>의 글들로 위안을 삼았다.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들려주기도 하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에 충분히 공감하였다.

 

나는 선생님의 이런 문투가 한 없이 좋다. 서문을 옮긴다.

  산문집<두부>를 낸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또 이렇게 그 후에 쓴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다. 거의가 다 일흔이 넘어 쓴 글들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한 우려가 공포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요즈음 이 나이까지 건재하다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인데 책까지 내게 되어 송구스럽다. 하지만 이 나이 이거 거저 먹은 나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 맬 터전이 있어 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내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을 무사히 다해 간다는 안도감- 나잇값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읽는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이 책을 위해 채근하고 기다려준 열림원 여러분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07년 1월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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