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캐롤 오츠 : 작가의 신념 - 삶, 기술, 예술 위대한 생각 시리즈 8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송경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잠이 일찍 깨어 머리맡에 있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삶,기술,예술>을 집어 들었다. 두시간쯤 고요 속에서 책을 읽었다. 중간에 청어 굽고 시금치 나물 무쳐 아침 먹여 아이 학원도 보냈다. 그리고 계속 읽으니 오전 안에 마무리가 되었다. 분량 자체가 워낙 부담이 없는 데다 짧은 산문들이라 막힘 없이 읽혔다. 읽다가 독서라는 것은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나'가 '내게 읽어주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만 읽으면 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눈으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귀로 마음에서 읽는 소리가 들리는 경험. (잠깐 이런게 정신분열인가?) 역시 독서란 온 몸과 온 힘을 다하여 '하는' 행위예술이다. 책 속에 책도 많이 나와서 뭐부터 읽어야 하나 기분 좋은 부담감도 느낀다. 이렇게 적당한 부담감을 주는 책이 좋은 책인 것 같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설들은 읽어 본 바 없어 검색을 했더니 꽤나 많은 책이 나와 있다. 이렇게 화려한 작가였구나 한다. 특이한 점은 청소년 소설들이 비룡소와 창비에서 꽤 여러 권이 나왔는데, 내가 다니는 도서관 세 군데에는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이다. 리뷰를 보니 꽤 흥미진진한 소설들일 것 같은데. <좀비>,<소녀 수집하는 노인>정도만 있고 <작가의 신념>에 언급 된 <블론드>는 도서관에는 아예 없다. 새 해엔 부지런히 희망도서 신청을 해야 할 듯하다. 어쩌다 보니 <작가의 신념>이 2015년 첫 책이 되었다. 첫 책으로 괜찮았다. 밑줄 긋기 하고 싶은 문맥들이 많았는데, 다 하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실 선천적으로 고독하다. 만약 끈기있게 노력하고 기술적으로 낙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간, 공간, 언어, 민족 정체성이라는 인공적인 경계선을 초월하는 문학이라는 신비로운 대체 세계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술 활동은 개인의 고독으로부터 홀연히 나타나서 다채로워지며 끝없이 매혹적이고 언제나 진화한다. 12

나는 누렇게 빛바래고 모서리가 접힌 책장에 곱게 인쇄도니 문장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신기한 경험에 완전히 매료되어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나는 오르기 어려운 나무(예를 들어, 배나무)와 씨름하듯이 이런 책들과 씨름했다. 25

결코 당신의 주제와 그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당신의 `금지된`열정은 글쓰기의 연료와 같다.43

이해 받지 못할 이런 충동이 없다면 당신은 겉보기에는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공동체와 더 밀접한 관련을 맺는 시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은 전혀 창조해내지 못할 것이다. 44

이상주의자가 되거나,낭만에 차서 `열망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마라. 만약 당신이 느끼는 흥미에 보답하지 않을 사람들을 열망하고 있다면, 보답이 없는 한,당신이 그들을 열망한다는 사실이 아마도 그들에게서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47

이야기들은 정밀한 구현체를 요구하는 유령처럼 나타난다. 관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는 내가 쓰는 것을 영화나 꿈처럼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는 확장 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나는 타자기 앞에서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을 회상한다.58

꿈이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신경생리학의 어떤 법칙에 따라 우리를 실제 광기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광기를 향한 일시적 비행일지도 모른다.따라서 달리기/글쓰기라는 활동 한 쌍은 작가를 이성적으로 건전하도록 해주고,(아무리 환상적이고 일시적인 제어일지라도) 제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하게 해준다. 58

평생 동안 나는 인간 개성의 신비에 매혹 되어 있었다. 이토록 다양하지만 그 다양성 아래 이렇게 닮아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여기는 과연 어디인가? 61

아, 당황하고 좌절하고 대지에 무릎 꿇은 채
감히 입을 열었던 나 자신에 풀 죽어
이제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모든 지껄임의 한복판에서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안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가 쓴 모든 오만한 시 앞에 진짜 나는 손상되지 않고 언급되지 않고 전혀 손이 닿지 않은 채 서 있다.
멀리 물러나, 자축하는 몸짓과 인사로 나를 놀리며
내가 쓴 모든 단어에 빈정대는 어렴풋한 웃음의 울림과 함께
침묵 속에서 그 노래들을, 그리고 그 아래의 모래를 가리킨다.
-월트 휘트먼.
`내가 생명의 바다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에서
83

왜 어떤 사람들은 구조와 언어의 견지에서 경험을 해석하는 일에 일생을 바칠까 하는 의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님은 물론이고 삶에 대한 대안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이다. 그러나 마치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 시제 속에서 살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처럼, 특이한 종류의 광채가 씌워진 삶이다. 85

읽기의 예술은 쓰기의 예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공감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비밀인 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분명한 이유 없이 어떤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86

개인적이고 속박받지 않는 이런 감정의 몰아침 없이 독창성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감과 에너지, 심지어 천재성도 `예술`을 낳기에 충분할 경우란 거의 없다. 산문 소설이란 기술이기도 하고, 기술은 우연으로건 의도적으로건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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