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은 [산문시대]의 동인으로 활약하던 196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문학의 현장과 역사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들을 써오면서도, 그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주목만을 받아왔던 이유에 관해서는 이미 한 비평가의 좋은 설명이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작은 마을에서>의 해설에서 김치수는 이 시인이 우리의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하림은 우리 시대의 다난한 역사의 현장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지만, 논의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할 만하다. 어느 시집에서였던가,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제목으로 묻던 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시인이 그해 5월에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꽃을 바라보며, 자신의 피부에서 창자에 이르기까지, 발끝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그 죽은 자들의 죽음을 자기 몸 안에 있다고 말하던 그 대답도 또한 기억할 것이다. 역사가 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이 겹칠 수 밖에 없는 그 비원의 자리는 그가 내내 이루려고 애써왔던 시의 자리이기도 했다. 원이 한 번 강렬하기는 쉬워도 두고두고 몽매에도 지속되기는 어렵다. 어떤 무한하고 절대적인 기억력만이 그 이을 감당 할 수 있다. 삼라만상이 그 기억력 자체가 되게 하는 일, 내가 죽음을 안고 있었던 것처럼 보고 만지는 것 모두가 나의 기억을 무한하게 펼쳐 안고 있게 하는 일, 그 일은 오직 시만이 감당할 수 있다. 시가 모든 말들에서 그 조건 반사의 습관을 지우고 그 순결한 울림만을 남겨 놓을 때, 개인적이건 역사적이건 완성되거나 완수될 수 없었던 것들의 온갖 한은 제 응어리에서 풀려나와 일체 존재의 단일 원소가 된다.

 최하림의 새 시집이 아마 이로써 설명될 수 있으리라. 일종의 비인칭의 시집, 거기에는 일거수 일투족이 투명한, 그래서 수식어 없이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한 사람이 있고, 깨끗한 말들에서 잔잔한 기운이 흐르는, 말 그대로의 시가 있다. 시를 타넘어가기 좋아하는 이런저런 해석들이 발받침으로 삼시 십상인 돌출부나 크랙 같은 것은 거기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빌미를 주는 어지러운 말본새에서도, 모범 답안을 미리 모의해둔 수수께끼 같은 것에서도 그의 시는 애초부터 멀리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 잘 젖어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정신 에너지의 주파수를 한껏 낮출 필요가 있다. 느껴야 할 것은 몸을 잘못 뒤채면 금방 끊어져버리고 마는 존재의 낮은 파동이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한 시가 이 파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든가

딱따구리 새앙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구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항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 [나무가 자라는 집] 전문

 

 이 나무가 자라는 집을 시인은 그 사진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그 집에는 사람이 없거나,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존재한다. 시인은 의식을 그렇게 비워둠으로써 숲의 파동을 온전하게 느낀다. 그 파동과 함께 그 의식 밑에 있던 것들이 의식 위로 떠올라 나무처럼 자란다. 집은 너무나 고요하여 그 벽과 지붕이 숲의 파동을 끝까지 견뎌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녀린 시인의 육체 속에서 신경은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 동박새. 딱따구리, 새앙쥐 들이 지붕과 벽에 구멍을 뚫어 그 파동이 빠져나갈 길을 마련한다. 시인은 그 감각을 다소곳이 열어 두지만 그 신경을 그렇게 이완시킴으로써 파동에의 저항을 지속하고 그 역사와  자아 기억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비음이 심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숲의 파동을 흩트리지 못하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그렇다고 시인이 세상에 그만큼 눈을 감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숲의 파동을 느끼는 특별한 시간에 그의 지각은 바깥 세상의 자극에 습관적으로 반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세상에 반응하지 않기는 세상에 근본적으로 자기를 열어놓기이여, 세상을 세상 너머로 연결시키기이다. 그런 데 '시간이/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적막과 함께 파동을 받아들이는 일도 완성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파동의 시간은 닫혔다. 단지 파동의 기억을 가룸리하는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숲의 파동을 감수하던 집은 이제 제 기억 속에 빠져 단단한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까지 시인의 감관 그 자체라고 여기던 이 집을 시인이 그 감관으로 감수하려 했던 대상으로 다시 환원하고 싶어진다. 침투할 수 없는 어떤 대상, 이를테면 이 집을 하나의 거대한 바위라고 여긴다면? 그렇다면 파동은 시인의 감각이며, 그 촉수의 면밀한 침투력이다. 파동이 섬세하고 날카로울수록 그 대상의 입자들이 지녔던 밀도는 그만큼 낮아진다. 바위는 솜사탕보다 더 엉성해지고, 출입문과 창문과 마당을 가진 공간, 곧 집이 된다. 게다가 그 집은 딱따구리의 구멍, 생쥐의 구멍,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뜷려 있고, 시인이 감각은 파동을 이루며 무시로 벼고가 지붕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렇게 투과된 대상은 바위는 시인의 언어 앞에서 무엇일까? 그것은 여전히 바위이다. 아무리 비음을 섞어도 파동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말은 시인을 끝내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벌써 그 감각의 파동을 거둔 시인에게 바위는 그 껍질 속에 딱딱하게 다시 갇힌다. 아무리 은근하게 그 껍질을 두드려도 바위는 문을 열지 않는다. 언의의 개입과 함께 시간은 벌써 닫혔다. 말이 깊은 적막에 떨어짐으로써만, 단단한 사물이 구멍 숭숭 뚫린 집이었던 추억을, 그리고 강한 파동이 되어 그 내부에 스며들어갔던 추억을 오직 간직해낼 수 있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 대하여, 한번은 그것이 시인의 지각이라고 말 하고, 한 번은 그 지각의 대상이라고 말했던 이 두 가지 해석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짐짓 모르는 체하고 넘어갔던 한 구절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근원은 물론 '처음'과 '분열되지 않음'이라는 두 개념의 복합일 텐데, 시인은 '근원 같은 곳'이라고 말하여 그 시간의 개념을 장소의 그것으로 슬쩍 바꿔놓는가 싶다가 '사라지는 듯'이라고 풀어 그 밑에 시간의 감각을 알게 모르게 깔아놓는다. 그래서 근원은 지각과 대상의 차별이 사라지려는 지금이고, 사라지고 있는 이 자리이며, 나무의 자람 그 자체로써 나무의 자람을, 언어의 욕구가 나타날 때까지, 감각하는 이 체험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학자이기도 한 이 시인이 그의 여러 미술 비평에서 스스로 사물 속에 틈입하면서 동시에 사물을 자기 안에 사무치게 하던 방식은 자아와 세상이 단일한 파동으로 환원되는 이 체험 속에서도 여일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면, 이 체험은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신비 사상가가 모든 개념의 일체성에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 둘은 물론 같은 것이 아니다. 저 수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불변하는 일체의 존재의 깨달음이지만, 최하림에게 중요한 것은 개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에 깨달음의 장애일 뿐인 말들이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될 때까지 그 의미의 사변을 저며내는 미학적 실천이다. 지각과 사물이, 그리고 그 기억이 파동을 통해 하나가 되도록 말들은 이렇게 그 파동을 낮춘다.

  최하림의 한 시가 [나는 너무 멀리 있다]고 말할 때, 그 먼 거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물론 늘 사라질 듯하면서도 엉ㅁ연히 남아 있는 이 말들이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디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전문

 

시인은 저녁에 집 안에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날이 흐리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다시 말해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시인은 자신의 감각을 왜곡하거나, 특별한 미학적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다. 그의 감각이 도시적 경계심을 풀고 유연성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바람은 이 풍경의 선을 흩트려 경계 없는 회색 농담 속에 사물들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통합된 사물들을 아직도 외부에서 바라볼 뿐 이다. 친화성의 바람이 말을 전달하는데 그에게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주체적, 이성적인 말이,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분별심이, 바람의 타자적 본래적인 말을 여전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멀리 있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우선 그것은 저 창밖에서 하나가 되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통합되어야 할,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만 통합되는 또 다른 나로부터일 것이다. 마침내 어둠이 창밖에서 사물의 경계를 완전하게 지웠을 때 비로소 풍경과 자아는 하나가 되어 '유령처럼 내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이 짧은 순간에 주체의 말도 타자의 말과 하나로 겹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유령처럼'이라는 비유법이 지각과 그 표현을 갈라놓는다. 게다가 시인은 떠오르고 '있다'고 말하여 그 통합의 유예를 여전히 분별한다. 그 '있다'의 자리에 주체의 말이 주저하며 남아 '있다' 주체의 말은 사라진다기보다 차라리 저 바람의 친화성을 획득하여 그 말을 번역하려 할 뿐이다. 번역에는 항상 앞선 텍스트가 있으며, 시인의 시는 그 텍스트의 주체를 바람에게, 창밖의 어둠에게, 멀리 있는 나에게 넘겨주고, 번역자로서만 그 주체의 언어를 간직하면서 끝난다. 그래서 최하림이 수식어 없는 시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 그것을 읽고 해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내면을 공적 자아의 자리로 만들어, 타자의 언어를 그 자리에 불러들이기에 성공했다는 뜻이 된다..

 시인이 주체를 비워 세상을 안아들이고, 주체의 말이 타자의 말에 대한 좋은 번역어가 되기 위해서는, 말들에게도 어떤 종류의 시련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은 주체를 파수해주는 대가로 개처럼 부양받는 안온한 삶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성채인 것처럼]에서 '우리의 성채인 말들'이 바로 자기 단련을 위해 모험을 찾아 떠난 말들이다. '집을 나가 객지를 떠돌고' 있는 이 말들에게는 ' 딱딱한 침상도' 삼류 여인숙에서 등을/돌리고 누울 시간도' 없으며, '우유'도 없다. 이 말들은 교과서나 논문 속에 자리 잡고 위엄을 부리는 말들이 아니며, 정치가의 연설이나 베스트 셀러의 첫 문단처럼 잘나가는 말들이 아니다.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철한 신문 기사나 노동 운동가의 성명서에 들어 있는 말들조차도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는 그런 말들은 벌써 집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 진정으로 적과 우리를 구분해줄 수 있기에 우리의 성채가 되는 말들은 자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처지에서 아직은 '희미한/ 미소와 손짓과/공복의 이미지들'로만 존재하지만, 그러나 벌써 '저문 강에 말뚝을/박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직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존재의 다른 언덕을 향해 밤을 도와 벌써 다리를 놓고 있다.

 

  등뼈가 휘도록 추운 길로 여인들이 가고

  있습니다 붉은 소방차가 가고 있습니다

  꽁꽁 언 말들을 위해 기도해주소서

 

 이 추위와 공복감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별한 은총이다. 세상의 춥고 배고픔과 나의 춥고 배고픔이, 그리고 내 말들의 춥고 배고픔이 경계를 지우는 곳에서 나의 자아는 타자가 되고 공적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시학일 수도 있는 이 시가 나병 환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록도 시편'들과 시인 자신의 병상 체험을 이야기하는 시편들 사이에 놓여 있지만, 그 위치가 기여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록도에서는 '남쪽 길을 걸어가면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

([소록도 시편 2])가 있다. 나환자들의 몸을 빌려 울던 세상의 신음 소리가, 그들이 하나둘 저 세상으로 떠난 지금, 솔바람 소리 속에 흩어져 있다. [병상 일기]에서는 휘파람새들이 아프다.

 

  그러나 아내는

  밤이면 새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

  베드에서 잠 잔다

  나도 베드에서 잔다

  어쩌다 베드에 똥을 누기도 한다

  똥누는 일은 홀로 한다 모두 홀로 한다 다친 영혼이 몸을 떨며

  창가에서, 휘파람새들이 기웃거린다

  휘파람새들이 지금은 아프다.

 

 세계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에는 병듦의 테마가 있고, 그래서 지금 휘파람새는 아픈데, 정작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은 지금 세상의 한 불행한 테마를 실현하는 대응 능력일 뿐이다. 세계 속에 하숙을 찾고 있는 나병을 위해 나환자들이 제 몸을 빌려주었듯이. 물론 이 [병상 일기]에는 은밀한 아이러니의 어조가 있다. 그러나 이 아이러니는 시인 개인의 원망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의지를 한순간에 비참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이 병듦 앞에서 한 시인이 그 시로써 지켜내는 인간의 위의 이며, 그 지켜내기의 힘겨움이다.

  아이러니는 언제나 가장 무심한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고통스러운 목소리이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움은 사실상 시집 전체를 관통하여 내내 억제되어 있는 그 파동이 낮은 어조의 진정한 비밀이기도 할 것이다. [아내가 없는 날]을 읽는다.

 

 아내가 없는 날, 빈 마루에 서서 나는 창밖의 세상을 한동안 본다 아카시아숲을 돌아 한길에서는 빨갛고 파란 차들이 달리는 소리 숨결처럼 들리고 길 건너 보도에서는 할머니들이 좌판에 배추 상추 다랭이 동부 들을 늘어놓고 흥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해는 할머니들의 머리 위에 있다 머플러를 쓴 할머니도 있다 시간이 머플러를 날리며 간다 (아아 우리는 모두 시간의 강물에 젖어 있구나 우리는 이웃이구나) 멀리 산밑 동네에서는 쓰레기 태우는 연기 오르고 몇몇 남은 잎들이 떨어질 순간을 준비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지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린다 아이의 손목 잡고 젊은 여인이 길을 건너고 있다 나는 마루를 왔다갔다 한다 나는 아내가 언제 올지 모른다 아내의 초인종 소리는 울리지 않으나 아내는 지금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시인은 단지 창박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풍경을 기술하는 글에 어떤 감정이 묻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모두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과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웃이라는 생각정도인데, 그런 감정조차도 거기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듯 괄호 속에 묶여 있다. 풍경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판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폭이 매우 미미해서 그것이 시인의 진술을 더욱 겸손하게 만들 뿐이다.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는 정도가 풍경의 소묘에 시인이 덧붙이는 주관인데, 이 정도의 개입도 없었더라면 시인의 필치는 오히려 더 강경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심한 시인은 '마루를 왔따 갔다'하고 있다. 그는 초조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언제 올지 모르는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창밖을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은 그 마음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힘과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이 자기가 상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자기가 없어질 때만, '아내가 없는 시간'이 '아내가 오고 있는 시간'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금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이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욕망과 슬픔이, 그 원망이 사라진 곳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다.

  젊은 시절, 목포와 광주 사이의 밤이면 캄캄할 뿐인 국도에 그 생생한 꿈을 묻어 두었던 아름다운 청년 최하림은 지금 늙어가고 있다. 누구의 희망도 진정으로 채워주지 못한 굴곡 많고 험한 시대를 그는 신병으로 오래 시달리며 체험했다. 그 재주와 열정을 다 실현시킨 것도 아니다. 세상은 더욱 소란스러워지고 있을 뿐인데,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낮게 말한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진 모든 자아들이 그 뿐리에서 만나는 공화국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또한 가슴 속의 외로운 공화국이다. 이 외로움이 아름답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젊은 날의 희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는 이 고결한 외로움은 세상에 아직 새로운 말이 남아 있다면 오직 거기서만 탄생하게 될 마지막 기지이기 때문이다.

 

(두 분께 존경을 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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