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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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집집이 여행 관련 책은 꼭 있는 것 같다. 여행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설레니까. 나 또한 책만큼 여행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 서점 갈 때마다 꼭 들리는 곳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도 여행 책 판매대다. 구매로까지 이어지지 않아 가지고 있는 여행 책은 몇 권에 지나지 않지만 이병률은 예외다. 이병률이란 이름에 책장을 열기 전부터 설레니까. 


"멀리 떠나서야 겨우 마음이 편하니 이상한 사람. 바람이 많은 날이면 펄철 더 자유로울 수 있으니 다행인 사람. 걷기, 콜롬비아 커피, 눈, 피나 바우쉬, 찬 소주와 나무 탁자, 그리고 삿포로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넘치는 사람. 아무 정한 것도 없으며, 정할 것 또한 없으니 모자란 사람." (프로필에서)


그래. 이병률은 이런 사람이다. 그래서 좋다. 


"질기고 강령하여 무쇠 같은 슬픔의 유전자를 가져서 모든 사물을 슬프게 읽고 슬프게 받아들이며 겨우겨우 아슬하게나마 슬픔으로 쌓아올린 몇평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대부분이다. 그 슬픔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그 슬픔을 받아들인 적 없는데 어느새 스며든 그 슬픔이 한 사람을 정복하고 있는 것뿐. 슬픔이 있어서 나는 곤하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고 유랑할 수 있었다." (본문 「29#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달라고」에서)  


그래서 좋다. 슬픔의 유전자를 가지고, 스며든 그 슬픔으로 외롭지 않게 유랑하며 쓴 글이라서,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감수성으로 쓴 글이라서. 나도 그렇다. 멀리 떠나야 마음이 편해지고, 바람 많은 날, 걷기, 커피, 피나 바우쉬, 나무탁자를 좋아한다. 나도 그처럼 나만의 감수성으로 쓴 글과 사진을 담은 이런 책을 갖고 싶다. 


하지만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글은 재주가 없어 잘 써지지 않는다. 사진 또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많이 찍기도 하지만 아예 찍지 않는 날도 많다. 대신 책은 꾸준히 읽는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쓴 책을,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고른다. 따뜻한 커피 한잔 옆에 두고 푹신한 의자에 무겁게 가라앉은 몸의 무게를 내려놓으며 책을 펼쳐드는 순간이 참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 속에 빠져 내 일상의 어지러운 속도와 번잡스러운 일 따윈 나와 상관없는 먼 세상의 이야기가 된다. 얹힌 기분들도 정리되고 무거운 기분도 가벼워진다. 요즘처럼 캐고 캐는 마음살이에 지쳐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혼자 둥둥 떠 있는 섬 같이 외로울 때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집어 든다. 나의 기분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내가 듣고픈 이야기를 해줘서. 책이 있어 덜 외롭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감상도 남긴다.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 중 하나를 지우기 위해.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뭔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본문 「30# 내가 세상에 달라붙어 있는 이유」중에서) 


그의 말처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길 바라면서. 

 


「21# 평범식당」에서



「32# 인연이네요」에서  

"별 기억이 아닌데도 한 사람의 기억으로 웃음이 날 때가 있다. 돌아보면 그렇게 웃을 일도 아닌데도 배를 잡고 뒹굴면서 웃게 되는 적이. 하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그 웃음의 근원과 크기가 아니라, 그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아직까지 차곡차곡 남아 주변을 깊이 채우고 있는 그 평화롭고 화사한 기운이다. 인연의 성분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것으로 묶여 있다."


「39# 당신한테 나는」에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47# 사랑도 여행이다」에서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53#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에서


"나이를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이 오만을 허락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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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5-0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병률 작가님 에세이집 새로 나온다고 들었어요. :)

게으른독서가 2015-05-03 04:5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사고 싶은 책들 목록만 계속 늘어가네요. :)

프레이야 2015-05-03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병률의 끌림,도 그렇고 이책도 그렇고 표지만 접할 기회가 있었고 내용은 스쳤네요. 잊고있었는데 님의 리뷰 보니 다시 인연이 될까 싶어요. ^^

게으른독서가 2015-05-03 22:43   좋아요 0 | URL
<끌림>도 이 책도 언제든 아무곳이나 펼쳐서 읽을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