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의 소설집《노랑무늬영원》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7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왜 이렇게 읽기가 힘든 걸까? 쉽게 읽히는 이야기는 단 한편도 없었다. 한 편 한 편 몇 번이고 되뇌어 읽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보다 인물들이 하는 혼잣말에, 힘들게 겨우겨우 내뱉는 듯한 읊조림을 따라서.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난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다. 평범한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누구나 겪어봤을 아픔을 따라 내 아픈 마음을 되새김질하며 읽었고, 그들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가는, 살아내는 게 비슷하구나 느꼈다. 참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우린 서로 참 많이 닿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지치지만 견디는 것뿐이군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라며 자책한 적이 있군요.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이제는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p. 164)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나도 여기서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살아있음을 느껴요. 당신도 느끼고 있나요?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 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회복하는 인간」, 20~21쪽에서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회복하는 인간」, 32쪽에서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밝아지기 전에」, 123쪽에서
“회사 그만둔 거 후회한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쉬는 날이면 온종일 남대문 시장 헤매서 예쁜 돌 사다가 이것저것 만들어 파는 일, 괜찮아. 가진 건 없지만 걱정도 안 되고, 생활이 단순하니까 마음도 편해. ...... 난 아마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십대엔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만 들어 있었거든. 직장, 저축, 집, 가족, 나이에 어울리게 가져야 하는 그런 거. 하지만 이제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왼손」, 164쪽에서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의 늘어난 인대나 금 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 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노랑무늬 영원」, 224~225쪽에서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을 가져 타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때 나에게 그 물이 약간이나마 고여 있었다면, 이제는 마른 흙바닥만 남아 있었다.
알고 있다. 거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니, 내 책임이 전부라는 것을. 사고를 당한 것은 불운이었지만, 그 후의 내 감정, 내 행동은 모두 선택된 것이었다는 것을. 삶과 나 사이의 거리가 들떴을 때, 잇몸과 이가 들뜨듯이 무엇도 씹기 어려워 괴로웠을 때, 나는 오히려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 막대한 사랑과 감사,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배를 쥐고 웃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한 일은, 모든 사랑을 잃은 뒤 다시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끌어안고 있던 짐을 물살에 떠밀리는 동안 놓쳐 버리고 만 것처럼, 매우 쉽게.
그런 나를 자책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진실이 가리키는 길로 가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볼 것이다. 뜬 눈으로 - 설령 훗날 돌이켜보아 감은 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뜬 눈으로 가볼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이 없다. 자기기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속임수 없는 희망이 아니라면 소용없다. 어떤 속임수도 나이게 먹히지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투명함이 나이게 생겼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렇게 자신을 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제는 마치 내가 한 마리 빙어가 된 것처럼,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인다. 아무것도 자신에게 속일 수가 없다.
-「노랑무늬 영원」, 255~256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