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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일반적으로 문학은, 특히 소설은 불만의 표현이다. 주로 소설의 사회적 봉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항상 잘못 만들어져 있으며 삶은 항상 바뀌고 무언가를 바꿔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에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간만에 큰 스케일과 정교함을 두루 갖춘 소설을 읽었다. 1, 2권 합하여 총 700쪽이 넘어가는 긴 소설을 읽는 동안 사건의 긴박감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 뒤범벅된 플롯을 원심분리하듯 가슴 속에 빼곡히 쌓느라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조정래의『태백산맥』에서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정보는 쌓여가고 캐릭터는 선명해진다. 마치 전원일기 1088화를 전부 섭렵한 시청자의 마음처럼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거대한 세계가 조금씩 움작거림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24장이 가까워질수록 나른하게 응집된 폭발력이 언제쯤 터질지, 과연 나는 뼈저린 진실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지 어느새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의 주름 사이에 맺힌 땀 때문에 책장이 축축해짐을 느낀다.
바르가스 요사의 힘이었다. 2010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인 이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시절을 온전히 복원해냈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유럽의 리얼리즘이나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방식과는 또 다르다. 적당한 역사적 사실과 적당한 허구가 적당히 버무려져 견고한 세계관을 획득한 후 독재체제의 정수 그 굵은 뿌리에까지 날카롭게 뻗쳐나가는 서술방식은 확실히 바르가스 요사만의 독특함이었다. 특히 독재자 트루히요와 그를 살해하려는 암살자들 그리고 독재체제의 숨은 피해자 우라니아의 시선이 하나의 초점으로 차근차근 모이는 과정은 그 잔혹한 현실과는 다르게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나는 이 세 종류의 시선이 각각 어떤 개별적 의미를 갖는지 분류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우라니아는 상처를 주섬주섬 추스르고 도미니카를 떠났지만 독자인 나는 아직도 그곳에 멍하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라니아의 시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다. 뉴스에서 보이는 이미지, 정치적 사안, 국제적 문제는 밤하늘의 잡히지 않는 별인 양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거시적 문제들은 어느 하나 소시민의 삶과 긴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정치적 외교문제가 우리의 식탁 위 먹을거리와 직결되었을 때, 그에 저항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갔을 때,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긴 하다만)그 때는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많다. 식탁 위에 미친 소가 올라올 확률이 높아지기 이전에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했다. 깨닫기 이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마치 13살의 우라니아처럼 말이다.
미국으로 떠난 지 35년 만에 우라니아는 산토도밍고에 휴가차 방문했다. 이미 트루히요의 독재체제가 끝난 시점이었다. ‘은밀한 기억의 섬유조직을 건드리는 냄새처럼 기억을 자극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을 것임에도 그녀는 35년 간 기억 먼 곳에 봉해두었던 고향을 부러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병상을 찾았다. 작은 반응조차도 힘겨운, 심지어 들을 수 있는지조차도 불분명한 아버지에게 우라니아는 독백하듯이 35년 전 트루히요 시절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독재시절의 상원의원이자 ‘지식인’이라 불린 ‘아구스틴 카브랄’이라지만 그녀의 공격성 어투는 어쩐지 심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전에는 말이다. (이 리뷰에서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말하지 않을 테니 애초에 궁금해 하지 마시라)
13살의 우라니아에게 독재시절의 모든 환경과 그 안에서의 행동들은 그저 일상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대비마마 훌리아를 위해 학생대표로 찬양시를 읊었으며, 트루히요의 망나니 아들 람피스를 마치 아이돌스타 보듯 선망했다. 49살이 된 우라니아가 회상하는 과거의 한 축에는 그러한 천진난만한, 해석의 여지가 없는 무지의 산물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축에서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에는 단순히 고개가 갸우뚱할만한 미심쩍은 일들이 49세의 우라니아에게는 너무도 확신에 찬 일들로 다가왔던 것이다. 가령 이웃 프로일란 부인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어린 시절 목격한 장면, 즉 남편이 없는 대낮에 프로일란 부인을 방문한 독재자 트루히요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우라니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는 가엾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트루히요가 어머니와도 잠자리를 했나요?”
트루히요의 남근은 원하면 어디든지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독재자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남근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남성들의 남근을 작아보이게 하는 요술남근이었다.
“그런데 네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도미니카 사람들, 지식인들, 미국이나 유럽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들이나 의사들 또는 기술자들, 경험이 풍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생각을 지닌 감성적인 교양인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뛰어난 유머 감각과 감정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날 밤 바라오나에서 프로일란 씨가 그랬듯이 어떻게 그토록 야만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용인했을까 하는 사실이야.” (1권, 99쪽)
바르가스 요사가 이러한 에로티시즘적 내용을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넣은 것은 실제건 상징적이건 독재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의 남성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커다란 남근을 내세워 상징계를 증축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남성들은 거세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트루히요의 힘에 복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이디푸스 과정을 거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선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국가 안에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못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간신히 탈출(?)한 우라니아는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인들이 우주로 내보낸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우라니아는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소위 잘나가는 여성이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바르가스 요사의 생각 일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그녀의 성공이 결국 실패일 수밖에 없는 슬픔을 담고 있기도 하다.
우라니아, 넌 정말 얼음이니? 단지 남자들에게만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게 아니다. 너의 시선과 행동과 제스처, 그리고 말투는 위험을 예고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 그 덕분에 너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공부와 일, 그리고 독립적인 생활이다. ‘행복하게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1권, 279쪽)
우라니아는 독재치하에서 얻은 상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했거나, 그것을 직시해 아예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가 다시 한 번 상처와 직접 대면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미지의 화자가 말한 것처럼 후회로 남을 일이 될지도 모르고, 혹은 반대로 과거와의 화해가 될지도 모른다. 후회냐 화해냐의 문제. 어쨌건 그녀는 ‘마리아니타가 내게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할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점이 중요하다.
독재자의 시선
『염소의 축제』는 독재자의 내면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여타의 소설에 비해 차별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독재나 독재자는 그 상징성만으로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기 마련인데, 트루히요는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 개인의 강인함과 나약함 그 양면을 두루 드러낸다. 독재자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수령님’이라고 불리며, 정력이 강해 잠을 자지 않으며, 땀도 흘리지 않는다는 식의 철인 이미지를 내세운다. 특히 트루히요의 눈빛은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의 내면을 깊숙이 헤집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트루히요의 강철 같은 이미지는 독재를 유지시켜주는 ‘총체’일 뿐 그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의 내면은 그저 와해되기 쉬운 연약한 한 인간의 그것일 뿐이다. 그의 이 연약한 내면은 독재자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점차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독재자의 나약함 이전에 그의 강인함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전에 나는 왜 일국의 수많은 국민들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삶을 저당 잡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독재자의 국가 운용방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일개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어떻게 집단을 장악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소설의 묘사는 무서우리만치 현실적이었다. 트루히요는 그의 능력 있는 측근들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권력 장악을 시작한다. 도미니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하나인 아구스틴 카브랄, 화려함이나 권력욕 따위는 태어났을 때부터 거세된 것 같은 잔인함의 대명사 조니아베스, 걸어 다니는 오물이라 불릴 만큼 흉물스러운 외모지만 그 누구보다 정세에 밝은 전략꾼 치리노스,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치밀한 발라게르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출중한 능력을 가졌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트루히요의 앞에만 서면 마치 발가벗은 아이처럼 독재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까뒤집어야만 한다. 트루히요의 독재는 이 능력 있는 측근들을 통해 도미니카 공화국 전체로 뻗어나갔다.
“자네가 트루히요 가족 대신 비시니 가족이나 발데스 가족 혹은 아르멘테로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떡고물을 챙겼겠지. 그 기업체가 국가의 것이라면 더 많이 훔쳤을 테고. 그랬다면 자네 주머니는 두둑했을 걸세. 이제 모든 사업체와 땅과 가축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겠나?” (1권, 206쪽)
트루히요의 치밀함에 가장 놀란 대목이다. 그는 독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권력욕은 결국 물욕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욕심의 최종심급인지도 모르겠다. 트루히요에게 있어 사유재물이란 지극히 무의미에 가까웠다. 독재자에게 ‘권력’은 그 어떤 욕심마저도 단번에 희석시킬만한 절대제였던 것이다. 트루히요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이 근대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노력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 이외의 욕심에는 관심이 없는 것.
하지만 트루히요에게는 권력욕과 비견될만한 아니 독재를 온전히 유지시켜주는 단 하나의 욕구가 있었다. 바로 ‘성욕’이었다. 그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파생되는 모든 스트레스를 성욕으로 풀어냈다. 자신의 남근이 누군가의 쾌락을 주조해낼 수 있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트루히요는 누구보다도 남들의 찬양을 받기 좋아하는 인물이다. (독재자라는 직업은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가톨릭계의 시국선언과, 미주기구의 경제제재 등으로 사면초가에 빠지면서 독재의 끝을 바라보게 된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독재자의 상황을 전립선염으로 상징화해냈는지 모른다. 자신의 남근을 스스로의 의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독재자는 더 이상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의 남근은 이제 자신의 쾌락은 물론 다른 누구의 쾌락도 불러오지 못했다. 그 말은 곧 독재자의 영향력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윽고 독재체제가 파멸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의 시선
1961년 5월 30일 암살자들은 숨죽여 트루히요를 기다린다. 살바도르, 델라마사, 임베르트 그리고 아마디토는 저마다 독재자를 죽일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개인적인 증오로 트루히요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사는 국민 누구라도 독재자의 그늘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그게 아니라면 목숨을 내놓은 채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해외로 나가야 할 것이다. 마치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가 그랬듯이 말이다. 위의 인물을 포함한 총 7명으로 구성된 암살자들은 한번쯤 트루히요의 체제에 완벽히 동화되었으며 그의 수혜를 입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결정적으로 독재자가 주는 자선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을 겪은 후이다. 이 경험은 독재자에 대한 평가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암살자들의 마음을 ‘증오’로 집중시켰다.
암살자들의 증오는 트루히요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기꺼이 제물로 바쳤던 사람들의 마음과는 상반된다. 결국 독재국가에 사는 모두가 한번은 체제의 공모자가 되지만 결국 부조리함을 피부로 느끼고 방향을 선회해 그것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아내를 내놓으면서까지 체제라는 허울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이다. 역사는 전자에 의해서 바뀐다.
결국 암살자들에 의해 역사는 바뀌었다.
암살자들이 하나하나 몰락해 가는 장면은 잘 만들어진 헐리웃영화를 연상케 했다. 배음이 깔리지 않았을 뿐이지 장면 묘사는 더없이 처연함을 자아냈다. 자신들이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찾아 일신을 피하려 했지만 모두들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암살자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터키인 살바도르의 아버지가 심한 고문으로 인해 모골이 송연한 아들에게 비난과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살바도르는 자신을 죽인 것은 트루히요가 아닌 바로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렇다. 독재의 책임을 그저 체제동조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이 집에서 트루히요는 수령님이시다’라는 청동 명판을 집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던 모든 이들, 또 독재가 끝나자마자 말없이 그것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웠던 모든 이들이 체제 동조자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당신이나 나나 정치에 냉소밖에 보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어디 자유로울 수 있으랴.
독재소설
어느 나라건 땅덩어리에 금을 그어 놓고, 여긴 내 땅 이라고 천명한 이후부터는 독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자신이 비범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마치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일반적인 법률을 넘어서는 ‘악’을 저지르고 싶어 할 것이다. 굳이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모든 이는 이 악에 노출되어 있다. 악이 국가의 수장에게 스며들기 시작할 때부터 혁명은 재빠르게 시작되고 뒤늦게 문학은 꿈틀댄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읽으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던 점은 그의 소설운용능력도 능력이거니와 독재에 대한 치밀한 통찰력이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재국가였다. 나는 대개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마치 하나의 국가를 손에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분량과 관계없이 정말이지 묵직한 책이다.
염소는 ‘악마’와 ‘번식력’의 상징이라고 한다. ‘염소의 축제’는 악마 같은 염소가 벌이는 환락의 축제인가, 아니면 이 번식력 강한 동물이 서거한(?) 날을 기리기 위한 축제인가. 아마도 후자 쪽일 것이라 여겨진다. 축제는 과거를 기념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번식을 기원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염소라 할지라도 역시 유한한 생명체인지라 쪼그라든 남근만을 남긴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부터 문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새로운 번식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아직도 몇몇의 독재국가가 건재하며, 세계 곳곳에는 독재와 유사한 모델의 국가가 산재해 있다. 혹은 말도 안 되게 그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말대로 문학은 이러한 현실에 불만을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문학이 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