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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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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현대미국소설은 처음 읽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은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 성적을 잘 내고,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에 빈틈없는 토론실력까지 겸비한다면 세상은 두려울 것 없는 장소일 게 뻔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르쳐 준 것이 아닌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들은 배울 수 없는 것을 강조하는 아버지를 거부했다.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의 달콤한 불장난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서 팬티를 벗을까 말까를 고민할 때,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이 역사의 불장난에 희생되어 갔다. 같은 불장난이지만 하나는 흰색의 정액을 다른 하나는 선연한 붉은색의 피를 뿜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인식 속에서만 두려워할 일일 뿐 실재의 것으로 잡힐 리 만무하다.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


마커스는 아버지의 집착을 피해 로버트트리트 대학에서 와인스버그로 편입했다. 첫 번째 엑소더스였다. 이제 법학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 곁들여 찐한 연애를 소스삼아 뿌리면 금상첨화의 대학생활이 될 것이다. 마커스는 자신이 상정해 놓은 정형화된 대학생활을 꿈꾸며 와인스버그의 홍보책자의 모델이 입고 있는 옷을 구입해 그대로 코디했다. 매우 상식적이고 인과관계가 뚜렷하며 자신이 읽은 책에서와 같은 세상이 되어주길 바라며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가 너무나 많았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그 존재가 권위 있는 사람 즉, 나를 세상에 내놓게 한 장본인인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또래 친구들이라는 것이다. 같은 기숙사 윗 침대를 쓰는 ‘플러서’는 밤마다 베토벤을 틀거나 멕베스를 암송하면서 마커스의 잠을 방해한다. 마커스는 참다못해 그의 레코드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닭의)똥꾸멍을 베어 열고 손을 쿡 쑤셔 넣은 다음 내장을 잡아 끄집어내라. 구역질이 나올 만큼 역겨워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커스의 아버지는 유대인 정육점을 운영했다.)


두 번째 엑소더스다. 엘윈 아이어스 2세 역시 위쪽 침대의 동급생이었다. “엘윈은 완벽한 룸메이트예요. 조용하고, 사려 깊고, 깨끗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요.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요.” 마커스는 자신의 여자를 ‘씨발년’이라고 부르기 전까지 엘윈을 저런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커스는 엘윈을 피해 혼자 살기로 결심한다. 의도치 않게 마커스는 코드웰 과장의 말대로 눈앞에 장애가 있으면 그것을 피해 가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마커스는 엘윈을 이해하지 못했고, 올리비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 마지막의 큰 주제라고 말한다. 아버지, 여자, 또래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찌 한반도에 일어나는 전쟁을 이해할 수 있으랴. 전쟁은 마커스의 운명 뒤에서 커다랗고 빨간 혀를 날름 거린다. 


마커스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칠 수 있고, 맘에 들지 않는 룸메이트를 피해 방을 옮길 수 있지만 한반도의 마력에서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또 하나의 전쟁이다. 그녀는 알콜중독과 자살미수의 이력이 있는 매력적인 상류층 여성이다. 마커스는 그녀가 맘에 들어 데이트를 신청했고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그녀의 오럴섹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충격적인 과거 이력을 알자 혼란에 빠져든다. 플러서와 엘윈은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그렇지 않았다. 마커스에게 있어 그녀는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이었던 것이다. 결코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 향방을 다른 곳에 옮겨 놓을 공산이 큰 존재지만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의 것을 빨아주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전쟁이었고, 청춘이었다.


『울분』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마커스라는 한 청춘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말미 참혹한 전쟁과 와인스버그의 소요사태 일명 “와인스버그 대학의 하얀 팬티 습격 사건”으로 광포한 이미지가 구현되기 이전에 화약을 밀도감 있게 쟁여놓듯 마커스의 울분을 압축표현한다. 울분이 생겨나는 과정과 그것이 단 한순간에 파괴로 흘러가는 과정은 미학적으로 아름답다. 이것이 청춘이라는 이름의 울분이란 말인가. 이 청춘을 횡단해본 이들은 안다. 발을 헛디디면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불가항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래서 우리 독자들은 마커스와 함께 처음에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나 이후 그가 왜 그토록 미쳐가면서 까지 그토록 아들을 과보호 하려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 사람은 없다. 나의 순수, 나의 폭발, 나의 정직, 내 성인기의 진정한 첫해이자 내 생의 마지막 해의 그 극단적으로 짧았던 행복에 관해 이야기 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죽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문자,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온 문장.


“엄마! 아버지! 올리비아! 나는 당신들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아무런 응답이 없다. 아무리 애를 써서 해명하고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시도해도 아무런 응답을 끌어낼 수 없다. 내 정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신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깊디 깊은 슬픔.“


종교란 믿음마저 없는 청춘의 지독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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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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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문학은, 특히 소설은 불만의 표현이다. 주로 소설의 사회적 봉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항상 잘못 만들어져 있으며 삶은 항상 바뀌고 무언가를 바꿔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에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간만에 큰 스케일과 정교함을 두루 갖춘 소설을 읽었다. 1, 2권 합하여 총 700쪽이 넘어가는 긴 소설을 읽는 동안 사건의 긴박감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시대의 아픔이 뒤범벅된 플롯을 원심분리하듯 가슴 속에 빼곡히 쌓느라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조정래의『태백산맥』에서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정보는 쌓여가고 캐릭터는 선명해진다. 마치 전원일기 1088화를 전부 섭렵한 시청자의 마음처럼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거대한 세계가 조금씩 움작거림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24장이 가까워질수록 나른하게 응집된 폭발력이 언제쯤 터질지, 과연 나는 뼈저린 진실과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지 어느새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의 주름 사이에 맺힌 땀 때문에 책장이 축축해짐을 느낀다.


바르가스 요사의 힘이었다. 2010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인 이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시절을 온전히 복원해냈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유럽의 리얼리즘이나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 방식과는 또 다르다. 적당한 역사적 사실과 적당한 허구가 적당히 버무려져 견고한 세계관을 획득한 후 독재체제의 정수 그 굵은 뿌리에까지 날카롭게 뻗쳐나가는 서술방식은 확실히 바르가스 요사만의 독특함이었다. 특히 독재자 트루히요와 그를 살해하려는 암살자들 그리고 독재체제의 숨은 피해자 우라니아의 시선이 하나의 초점으로 차근차근 모이는 과정은 그 잔혹한 현실과는 다르게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나는 이 세 종류의 시선이 각각 어떤 개별적 의미를 갖는지 분류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우라니아는 상처를 주섬주섬 추스르고 도미니카를 떠났지만 독자인 나는 아직도 그곳에 멍하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라니아의 시선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다. 뉴스에서 보이는 이미지, 정치적 사안, 국제적 문제는 밤하늘의 잡히지 않는 별인 양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거시적 문제들은 어느 하나 소시민의 삶과 긴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정치적 외교문제가 우리의 식탁 위 먹을거리와 직결되었을 때, 그에 저항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갔을 때,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이긴 하다만)그 때는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많다. 식탁 위에 미친 소가 올라올 확률이 높아지기 이전에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했다. 깨닫기 이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마치 13살의 우라니아처럼 말이다.


미국으로 떠난 지 35년 만에 우라니아는 산토도밍고에 휴가차 방문했다. 이미 트루히요의 독재체제가 끝난 시점이었다. ‘은밀한 기억의 섬유조직을 건드리는 냄새처럼 기억을 자극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을 것임에도 그녀는 35년 간 기억 먼 곳에 봉해두었던 고향을 부러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병상을 찾았다. 작은 반응조차도 힘겨운, 심지어 들을 수 있는지조차도 불분명한 아버지에게 우라니아는 독백하듯이 35년 전 트루히요 시절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독재시절의 상원의원이자 ‘지식인’이라 불린 ‘아구스틴 카브랄’이라지만 그녀의 공격성 어투는 어쩐지 심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전에는 말이다. (이 리뷰에서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말하지 않을 테니 애초에 궁금해 하지 마시라)


13살의 우라니아에게 독재시절의 모든 환경과 그 안에서의 행동들은 그저 일상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대비마마 훌리아를 위해 학생대표로 찬양시를 읊었으며, 트루히요의 망나니 아들 람피스를 마치 아이돌스타 보듯 선망했다. 49살이 된 우라니아가 회상하는 과거의 한 축에는 그러한 천진난만한, 해석의 여지가 없는 무지의 산물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축에서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에는 단순히 고개가 갸우뚱할만한 미심쩍은 일들이 49세의 우라니아에게는 너무도 확신에 찬 일들로 다가왔던 것이다. 가령 이웃 프로일란 부인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어린 시절 목격한 장면, 즉 남편이 없는 대낮에 프로일란 부인을 방문한 독재자 트루히요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우라니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는 가엾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트루히요가 어머니와도 잠자리를 했나요?”


트루히요의 남근은 원하면 어디든지 향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독재자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남근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남성들의 남근을 작아보이게 하는 요술남근이었다.


“그런데 네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도미니카 사람들, 지식인들, 미국이나 유럽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들이나 의사들 또는 기술자들, 경험이 풍부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생각을 지닌 감성적인 교양인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뛰어난 유머 감각과 감정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날 밤 바라오나에서 프로일란 씨가 그랬듯이 어떻게 그토록 야만적으로 학대받는 것을 용인했을까 하는 사실이야.” (1권, 99쪽)


바르가스 요사가 이러한 에로티시즘적 내용을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넣은 것은 실제건 상징적이건 독재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의 남성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커다란 남근을 내세워 상징계를 증축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남성들은 거세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트루히요의 힘에 복속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오이디푸스 과정을 거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선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국가 안에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못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간신히 탈출(?)한 우라니아는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인들이 우주로 내보낸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우라니아는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미국에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소위 잘나가는 여성이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바르가스 요사의 생각 일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그녀의 성공이 결국 실패일 수밖에 없는 슬픔을 담고 있기도 하다.


우라니아, 넌 정말 얼음이니? 단지 남자들에게만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게 아니다. 너의 시선과 행동과 제스처, 그리고 말투는 위험을 예고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 그 덕분에 너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공부와 일, 그리고 독립적인 생활이다. ‘행복하게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1권, 279쪽)



우라니아는 독재치하에서 얻은 상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했거나, 그것을 직시해 아예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가 다시 한 번 상처와 직접 대면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미지의 화자가 말한 것처럼 후회로 남을 일이 될지도 모르고, 혹은 반대로 과거와의 화해가 될지도 모른다. 후회냐 화해냐의 문제. 어쨌건 그녀는 ‘마리아니타가 내게 편지를 보내면, 답장을 할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점이 중요하다.



독재자의 시선


『염소의 축제』는 독재자의 내면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여타의 소설에 비해 차별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독재나 독재자는 그 상징성만으로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기 마련인데, 트루히요는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 개인의 강인함과 나약함 그 양면을 두루 드러낸다. 독재자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 ‘수령님’이라고 불리며, 정력이 강해 잠을 자지 않으며, 땀도 흘리지 않는다는 식의 철인 이미지를 내세운다. 특히 트루히요의 눈빛은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의 내면을 깊숙이 헤집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트루히요의 강철 같은 이미지는 독재를 유지시켜주는 ‘총체’일 뿐 그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의 내면은 그저 와해되기 쉬운 연약한 한 인간의 그것일 뿐이다. 그의 이 연약한 내면은 독재자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점차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독재자의 나약함 이전에 그의 강인함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전에 나는 왜 일국의 수많은 국민들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삶을 저당 잡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독재자의 국가 운용방식이란 이런 것이구나. 일개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어떻게 집단을 장악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소설의 묘사는 무서우리만치 현실적이었다. 트루히요는 그의 능력 있는 측근들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권력 장악을 시작한다. 도미니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하나인 아구스틴 카브랄, 화려함이나 권력욕 따위는 태어났을 때부터 거세된 것 같은 잔인함의 대명사 조니아베스, 걸어 다니는 오물이라 불릴 만큼 흉물스러운 외모지만 그 누구보다 정세에 밝은 전략꾼 치리노스,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치밀한 발라게르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출중한 능력을 가졌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트루히요의 앞에만 서면 마치 발가벗은 아이처럼 독재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까뒤집어야만 한다. 트루히요의 독재는 이 능력 있는 측근들을 통해 도미니카 공화국 전체로 뻗어나갔다.


“자네가 트루히요 가족 대신 비시니 가족이나 발데스 가족 혹은 아르멘테로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떡고물을 챙겼겠지. 그 기업체가 국가의 것이라면 더 많이 훔쳤을 테고. 그랬다면 자네 주머니는 두둑했을 걸세. 이제 모든 사업체와 땅과 가축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겠나?” (1권, 206쪽)


트루히요의 치밀함에 가장 놀란 대목이다. 그는 독재가 어떤 곳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권력욕은 결국 물욕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욕심의 최종심급인지도 모르겠다. 트루히요에게 있어 사유재물이란 지극히 무의미에 가까웠다. 독재자에게 ‘권력’은 그 어떤 욕심마저도 단번에 희석시킬만한 절대제였던 것이다. 트루히요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이 근대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노력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 이외의 욕심에는 관심이 없는 것.


하지만 트루히요에게는 권력욕과 비견될만한 아니 독재를 온전히 유지시켜주는 단 하나의 욕구가 있었다. 바로 ‘성욕’이었다. 그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파생되는 모든 스트레스를 성욕으로 풀어냈다. 자신의 남근이 누군가의 쾌락을 주조해낼 수 있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트루히요는 누구보다도 남들의 찬양을 받기 좋아하는 인물이다. (독재자라는 직업은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가톨릭계의 시국선언과, 미주기구의 경제제재 등으로 사면초가에 빠지면서 독재의 끝을 바라보게 된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독재자의 상황을 전립선염으로 상징화해냈는지 모른다. 자신의 남근을 스스로의 의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독재자는 더 이상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의 남근은 이제 자신의 쾌락은 물론 다른 누구의 쾌락도 불러오지 못했다. 그 말은 곧 독재자의 영향력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윽고 독재체제가 파멸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의 시선


1961년 5월 30일 암살자들은 숨죽여 트루히요를 기다린다. 살바도르, 델라마사, 임베르트 그리고 아마디토는 저마다 독재자를 죽일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개인적인 증오로 트루히요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사는 국민 누구라도 독재자의 그늘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그게 아니라면 목숨을 내놓은 채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해외로 나가야 할 것이다. 마치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가 그랬듯이 말이다. 위의 인물을 포함한 총 7명으로 구성된 암살자들은 한번쯤 트루히요의 체제에 완벽히 동화되었으며 그의 수혜를 입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결정적으로 독재자가 주는 자선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을 겪은 후이다. 이 경험은 독재자에 대한 평가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 암살자들의 마음을 ‘증오’로 집중시켰다.


암살자들의 증오는 트루히요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기꺼이 제물로 바쳤던 사람들의 마음과는 상반된다. 결국 독재국가에 사는 모두가 한번은 체제의 공모자가 되지만 결국 부조리함을 피부로 느끼고 방향을 선회해 그것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아내를 내놓으면서까지 체제라는 허울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이다. 역사는 전자에 의해서 바뀐다.


결국 암살자들에 의해 역사는 바뀌었다.


암살자들이 하나하나 몰락해 가는 장면은 잘 만들어진 헐리웃영화를 연상케 했다. 배음이 깔리지 않았을 뿐이지 장면 묘사는 더없이 처연함을 자아냈다. 자신들이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찾아 일신을 피하려 했지만 모두들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암살자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터키인 살바도르의 아버지가 심한 고문으로 인해 모골이 송연한 아들에게 비난과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충격에 빠진 살바도르는 자신을 죽인 것은 트루히요가 아닌 바로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렇다. 독재의 책임을 그저 체제동조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이 집에서 트루히요는 수령님이시다’라는 청동 명판을 집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던 모든 이들, 또 독재가 끝나자마자 말없이 그것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웠던 모든 이들이 체제 동조자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당신이나 나나 정치에 냉소밖에 보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고 어디 자유로울 수 있으랴.



독재소설


어느 나라건 땅덩어리에 금을 그어 놓고, 여긴 내 땅 이라고 천명한 이후부터는 독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자신이 비범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마치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일반적인 법률을 넘어서는 ‘악’을 저지르고 싶어 할 것이다. 굳이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모든 이는 이 악에 노출되어 있다. 악이 국가의 수장에게 스며들기 시작할 때부터 혁명은 재빠르게 시작되고 뒤늦게 문학은 꿈틀댄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읽으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던 점은 그의 소설운용능력도 능력이거니와 독재에 대한 치밀한 통찰력이었다. 이 소설은 나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재국가였다. 나는 대개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마치 하나의 국가를 손에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분량과 관계없이 정말이지 묵직한 책이다.


염소는 ‘악마’와 ‘번식력’의 상징이라고 한다. ‘염소의 축제’는 악마 같은 염소가 벌이는 환락의 축제인가, 아니면 이 번식력 강한 동물이 서거한(?) 날을 기리기 위한 축제인가. 아마도 후자 쪽일 것이라 여겨진다. 축제는 과거를 기념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번식을 기원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염소라 할지라도 역시 유한한 생명체인지라 쪼그라든 남근만을 남긴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부터 문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새로운 번식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라틴 아메리카에는 아직도 몇몇의 독재국가가 건재하며, 세계 곳곳에는 독재와 유사한 모델의 국가가 산재해 있다. 혹은 말도 안 되게 그것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말대로 문학은 이러한 현실에 불만을 표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문학이 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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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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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든 책이든 일단 아무 사전 정보 없이 텍스트에 손을 갖다 대는 타입이다. 헤르타 뮐러의『마음짐승』은 이런 독서습관 때문에 낭패를 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책을 주문해 받아들고는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펴들었다. 책장을 열자마자 뮐러만의 독자적인 은유가(예를 들어 하얀 셔츠, 수박, 양, 손톱가위 등) 그것을 읽는 내 눈, 가슴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했다. 헌데 이상하게도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진 문자들은 딱딱한 가슴께 와서는 어느 하나도 녹아들지 못했다. 그래도 ‘이미 결혼한 판에 어쩌겠어. 끝까지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라며 자조하는 기혼자의 맘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1/3이 넘어갈 때까지 가슴에 스며들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가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악! 못 읽겠다!’라며 구석에 책을 던져버린 건 더 이상 못살겠다는 기혼자의 마음과 같았다. 책과 나는 그렇게 이혼했다.

구석에 놓여있는 책을 못내 다시 주섬주섬 주워든 건 결국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에 실패한 이의 마음이다. 헤르타 뮐러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 검색창에 처넣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살던 시대의 분위기는 어땠을지. 나는 질문을 던지며 작가 뮐러와 내가 함께 섭동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했다. 문학동네에서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라는 소책자가 비매품으로 주어졌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미리 만났더라면 좋았을걸.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빚어낸 시대상을 알고 뮐러가 그곳에서 34년 간 타협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단하고 나니 다시 책장을 펼쳐들 용기가 생겼다. 책과 나는 그렇게 재혼했다. 만약 뮐러의 책을 읽으려 하는 독자 중 나처럼 가슴이 딱딱한 사람이 있다면 그녀의 신상정보와 집안환경을 미리 검토해 볼 것을 권면한다. 분명 세상에는 그렇게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기
  

소설의 초반은 롤라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이것은 결국 롤라의 이야기고 ‘나’는 그것을 서술하는 화자일 뿐이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되려 롤라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나’의 이야기였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메마름’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이유 혹은 실존적인 문제의 메마름이다. 롤라는 자신의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은 메마름을 지우기 위해 가난한 지방에서 도시의 대학으로 왔다. 벼룩이 들끓는 몸과 고향을 정화해줄 하얀셔츠의 남자를 만나면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자칫 속물적으로 보일 수 있는 롤라에게 어느 누가 동정이나 공감의 눈짓을 보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했다면 세상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 행동만으로도 그녀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남자들의 육욕을 해갈해주는 대신 그들에게서 도축된 동물의 혓바닥과 콩팥을 받아 냉장고 안쪽에 넣어둔다. 롤라는 자신의 계획과는 달리 하얀셔츠가 없는 곳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목표지점에 가 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롤라는 소외된 이들이 으레 그렇듯 전체주의와 종교 안에 자발적으로 편입해 들어간다. 하지만 전체주의처럼 비뚤어진 괴물은 자신 안의 구성물을 할퀴며 커나가는 법. 롤라가 ‘나’의 허리띠로 자살을 한 건 그녀가 열성적인 당원이 된 그 무렵이었다.
 

‘나’가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들은 롤라를 애도하기 위해 뭉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롤라 개인이 아닌 시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라는 게 맞는 말이겠다. 전체주의에 입각해 모두가 롤라의 죽음에 박수를 칠 때, 그들만의 공간에 숨어 롤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만이 ‘나’가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가 시대와 불화하는 방식이었다. 시대와 불화함으로써 자신과 불화하지 않는 것. 레비나스에 따르면 그것은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가능하다. ‘나’가 획득한 롤라의 일기장을 되씹어가며 그들은 전체주의의 암약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바라본다. 나의 마음짐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나는 끝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이 시대를 살아나갈 수 있을지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마음짐승』은 침묵하되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쓰인 듯 문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세상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요령부득의 텍스트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언어로 재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자 언어와 세상 사이에 끼인 자들이다. 그런 와중에 헤르타 뮐러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끼인 자들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견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 플롯을 수반하지 않는 문학을 문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이 자전적 증언문학이라면 더욱 사건묘사가 불가피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이 곧 주관이고 사건이 또한 선택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지나쳐 주관의 극한인 마음짐승의 용트림에까지 가볼 필요가 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나고 똑같은 사실만을 되풀이하는 말은 역시 우스워질 수밖에 없으니 그 사이를 요령 있게 나아가지 않으면 언어와 사실에 압사당하기 십상이다. 침묵과 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뮐러의 소설을 보노라면 무작정 집어삼킬 수 없는 자두를 입에 물고 있는 위태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롤라의 문장을 입으로는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옮겨 적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말로는 해도 종이에 적을 수는 없는 꿈같은 것이었다. 롤라의 문장들은 적으려고 하면 손안에서 지워졌다. (52쪽)


‘나’,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가 비밀리에 마련해 둔 여름별장에는 이미 이 모든 일들이 적혀 있는 책들이 있었다. 독일에서 은밀히 넘어온 이 불온서적들은 역사의 증거이기도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어느 누가 그 역사를 떠안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고로 ‘나’,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가 역사를 떠안지 않은 채 여름별장의 책들을 읽는다면 그것은 ‘침묵’ 혹은 ‘말’에 그칠 것이 분명했다. 책에는 차우셰스크 독재사회와 같은 일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음에도 ‘우리가 사는 나라의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처럼 손이 까매지지 않’(65쪽)는다. 이유는 ‘주체’와 ‘행동’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와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는 죽은 롤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독일에서 건너온 여름별장의 책으로 역사를 공부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의 반복에 몸을 싣는 일이다.


운이 좋다

지독한 경감 프옐레는 ‘나 만나서 운 좋은 줄 알아’를 반복해서 말한다. 그리고 소설 첫머리에 에드가와 ‘나’는 프옐레의 말을 되받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운이 좋다’라고. 도대체 뭐가 운이 좋단 말인가. 잔혹한 시대에 프옐레의 지독한 감시와 고문을 견뎌내는 것이 뭐가 그리 좋다는 거지. 나는 한참동안 이 말을 곱씹어 봤다. 그들이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다면 독재자를 몰아냈다거나, 경감 프옐레에게 엿을 먹였다거나, 독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안전하게 피신했다는 등의 이유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운이 좋은 이유는 역사와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또 한계 속에서 자연스레 몰락해 갔다는 점에 있을 듯했다. 프옐레를 만나고 에드가와 게오르크는 멀리 지저분한 산업도시의 교사로, 쿠르크는 도축장 기술자로 ‘나’는 공장의 수압기 사용설명서 번역가로 제각기 흩어졌다.


노인들은 숲에 대고 피리를 불어 새들을 미치게 했다. 새들은 나무와 둥지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숲 밖으로 날아가면 웅덩이의 물을 구름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머리를 처박고 죽었다. 오직 한 새만이 제 삶을 살아, 라고 게오르크는 썼다. 붉은등때까치야. 그 새의 울음소리는 수많은 피리 소리 속에서도 구별이 돼. 그 울음소리가 노인들을 미치게 하지. (...) 새는 태연해.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지. (119쪽)


많은 소설가들이 붉은등때까치의 행적을 그렸다면 뮐러는 붉은등때까치가 되지 못한 이들을 그려낸다. 죽은 롤라의 밖에서라면 그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롤라의 입장이 되고, 밤마다 미친개처럼 롤라의 위에 올라탄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을 초월한 붉은등때까치가 될 수 있을까. 역사 밖에서라면 역사가 될 수 없다. 역사 안에서라야 역사의 반복에 동참할 수 있고, 이 반복을 또한 후세에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독자들은 인물들의 영웅적 면모를 확인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역사가 일제시대 우리 독립투사들을 그리듯 그들의 반항이 혁명적이고 도전적이며 파괴적이길 말이다. 물론 그들은 처절하리만큼 노력했다. 시를 지었고, 진지한 일에 마음을 썼다. 심지어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경계하기 위해 작위적인 증오를 서로에게 퍼붓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성과 달리 마음 속 짐승은 자꾸만 도망을 갔다.

마침내 롤라와 그들의 남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나’,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는 서서히 자신의 자루를 찾기 시작했다. ‘깨끗이 입고 다니면 더러운 꼴로 하늘에 가지 않아’. 더러워지기 전에 죽음으로 승리하고 싶은 마음. 마음짐승이 생쥐처럼 약해지면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심지어 배신당한 이에게까지 사랑의 흔적을 찾게 된다. 각자 알아서 극복해야 할 그 두려움. 죽음은 개별적인 실존선택이다. 침묵하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않은 그들은 실로 운이 좋았다.


동시에 아이들은...

 

롤라의 죽음 이후 ‘나’가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와 연대하여 독재에 대항해 나갈 때 중간 중간 한 가정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삽입된다. 그곳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아버지, 어머니가 있으며 아이가 있다. 총 삼대다. 그 공간의 표현은 소설의 다른 부분보다 좀더 초현실적이어서 모든 의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쨌든 무언가는 계속 자라고, 자라난 것을 자르고 혹은 아예 자라나는 원천을 잘라버리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머리카락, 손톱, 자두 등으로 표상화 된다. 
 

그렇게 금기시되는 것들을 아이로부터 원천봉쇄하려는 윗세대는 또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전체주의의 금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상처를 오롯이 뒷 세대에게 징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상처를 담아 보내는 편지에 또 할머니가 끊임없이 부르는 노래 안에 담겨 있다.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결국 실재계의 일관성을 확인시키는 것은 과연 징후였다.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이어진 전체주의의 부조리함은 롤라와 같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 냈고, ‘나’와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에 이르러서야 축적된 부조리가 폭발되었다. 쿠르트와 게오르크가 죽은 후 결국 차우셰스크는 무너진다.


두 아이는 하트 금목걸이를 걸고 방 안을 뛰어다녔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나는 크면 목에 울리지 않는 방울을 달고 세상을 돌아다닐 강아지 두 마리를 보았다. (181쪽)


‘나’, 에드가와 쿠르트, 게오르크는 역사의 부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복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과 같지 않은 역사를 안겨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역사는 ‘허리띠, 창문, 호두, 노끈이 든 자루’로 남았다.


나는 경감 프옐레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모두 들어 있는 자루를 짊어지길 원했다. 그가 이발소에 앉으면 그의 자른 머리에서 막 벌초한 무덤의 냄새가 풍기기를, 퇴근 후에 손자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면 범죄의 냄새가 풍기기를. 아이가 쿠헨을 주는 그 손가락을 혐오하기를. (308쪽)


헤르타 뮐러의 이 소설은 ‘여름별장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또한 역사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루마니아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독재의 역사를 겪었고, 다음 세대 즉, 우리에겐 비교적 민주화된 역사가 주어졌다. 하지만 역사는 또한 반복되며 지금 여기에서도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상황에 이르면 과연 우리는 어떤 포즈를 취하게 될까? 『마음짐승』은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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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01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에 다섯장 이상을 읽지 못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었습니다. 그나마 완독을 하고 나니 이해는 되지만 정리가 안되어 검색을 하다가 이 리뷰를 읽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리뷰 감사히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리뷰로 뵙기를 바랍니다.

NILNILIST 2010-10-04 10:50   좋아요 0 | URL
읽기 어려운만큼 보람된 책이죠?^^
제 리뷰가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 좋은정보 많이 나눠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4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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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로학자의 가라타니 고진 표절론과 함께 이 책은 본격적으로 한국 학계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더불어 표절론이 대두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이미 국문학 연구의 바이블이 된 상태다. 단순히 일본 문학사가 아니라 문학의 근대성의 기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고진의 이 작업은 니체, 푸코의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기원을 찾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되잡겠다는 역사적 의지에 천착하지 않는다. ‘기원’이 겉으로 드러내는 부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간과되었던 진짜 기원, 본질로서의 기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야말로 현재 일본의 문학 그리고 현대일본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을 자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론이다.



서구의 문학사가 점증적으로 또 자가적으로 발전된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근대문학은 서구의 개입과 동시에 단절 속에서 탄생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말하듯 ‘단절에의 알림’은 ‘신문’과 ‘문학’이라는 근대적 매체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연속적인 역사가 아닌 근대적 소통방식으로 단숨에 사람들의 인식방식을 바꿔 놓는 데에는 역시나 문학의 역할이 지대했다. 고로 이 책은 단순히 문학에 한정짓기 보다는 문학을 통한 근대인식의 변화를 감지한다는 데에 더 의미가 깊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찾아가는 것은 한국문학의 원초적 기원을 찾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단순히 식민지 근대화론을 빗대어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근대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의 진보이며 선이라는 관념 하에서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지만 근대는 결코 좋고 나쁨의 것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지금 여기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근대를 파헤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에 영향을 미친 일본 문학은 서양과 일본의 관계처럼 조선의 인식을 크게 바꿨을 것임이 분명하다. 고로 우리로서는 고진의 이 연구서가 성취한 업적이 그 어떤 나라보다 귀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문학이라고는 소세키의 소설 몇 편을 읽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무지랭이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사전지식이 없이 전체적인 맥락을 염두에 두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많은 집중력과 상상력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책을 완독했을 때의 성취감이 더욱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학의 기원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과 현재 내가 사유하는 방식이 맞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내가 가진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고진의 이 책은 연구서로서 뿐만 아니라 인문의 방법론을 훌륭하게 제시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몇 번 더 살펴본 후에 정리를 할 예정이다. 생각에서든 다른 글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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