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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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멘토를 찾고 싶어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이가 멘토를 자처하며 삶의 이정표와 매뉴얼을 고급레스토랑의 코스요리처럼 포장해 내놓는 상황에서 나는 왜 더이상 마음을 잡아끄는 메뉴를 고르지 못할까? 가까이는 좋은 세계를 짓는 예술가부터 멀리는 좋은 회사를 경영하는 CEO까지. 각종 '좋음'이 제작되기 위해 어떤 방법과 노력이 투입되었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삶의 동력을 얻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계기, 어느 지점이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삶에 표류하게 됐을 때, 누군가를 찾거나 어떤 책을 뒤적거려도 그간의 방식으로는 '삶 에너지'가 차오르지 않음을 느꼈다. 휴대폰 배터리는 바닥을 보이는데 충전기를 꽂을 데가 없는 사람처럼 나는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멘토없이 길고 힘든 방황을 마친 후 나는 더 이상 멘토를 찾지 않아도 좋았다. 왜였을까? 굳이 알지 않아도 좋았던 이유,  <데미안>을 읽고 나니 이제야 겨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도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것이다." (8쪽)


 

세계들...
 
<데미안>에는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세계들은 공존하되 주인공 싱클레어가 경험하기 좋은형태로 분절되어 있다. 싱클레어는 이 세계들을 횡단하며, 종국에는 자신만의 통합된 감성을 완성하고자 한다. 싱클레어의 모든 세계-내-존재-되기는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 두려운 프란츠 크로머와의 이질성을 없애기 위해 그가 포함되어 있는 '어두운 세계'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되었듯 말이다. 또한 각각의 세계는 헤세의 낭만끼 가득한 단어들로 표상된다. '밝은 세계'가 성경, 거울, 용서, 사랑, 존경 등으로 표현되며 모든 불순물을 깎아 투명함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처럼, '어두운 세계'는 사납고, 잔인한, 자살, 부랑, 노파, 젊은 아가씨등으로 모든 정수를 걷어간 후 남은 건더기들만이 간단없이 흩어져있는 느낌이다. 싱클레어는 각 세계를 대표하는 언어들을 타고 세계를 부유하며 체험하지만 언어의 양탄자 아래. 본질로는 쉬이 침잠하지는 못한다. 방황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으로 가득 찬 두려워하는 영혼이 팔랑거렸다." (90쪽)


 

해석만이 내 세상

 

아마 데미안은 멘토계의 최연소 전설로 남을 것이다. 또래집단의 구성원임에도 그에게 풍기는 아우라는 어른의 그것이다. 그러나 이후 싱클레어도 깨달았겠지만 데미안의 '자신만의 공기'는 보편 어른의 본질은 아니다. 데미안은 그저 자신이 해석한 세계 즉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카인'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해석한다. 신성성을 찌르고 그 피로 새로운 관점을 써내려간다. 믿음을 제 1전제로 삼는 성서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명한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 이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세상구도에 얽매이지 않은채 '카인의 표'를 얻는 방법이다. '다른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이 유일한 표식은 면밀한 관찰과 사색 그리고 해석의 담금질을 거친 후 '개성'이라는 실체로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 무엇도 영원히 '금지된' 것은 없어" (77쪽)


 

무의식, 나보다 더 '나' 인...

 

쉽게 해석되지 않는 것이 있다. '무의식'이다. 꿈을 꾸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무의식에는 선도 악도 도덕도 없다. 세상의 질서를 한꺼풀 벗겨내고 날비린내 나는 욕망만이 에너지형태로 잔존하는 것, 프로이트는 이를 '무의식'이라 불렀다. 베아트리체를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문장을 삼킨 새가 내 안에서 나를 쪼아먹는 꿈, 어머니이자 애인이며 창녀, 갈보인 그것, 그것은 싱클레어 '자신'이었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인 '아프락사스'는 해석의 대상이 아닌 듯 하다. 그저 제단을 쌓아 질문하고 비난하며 애무하고 기도해야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 숭배는 감각적이거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새가 알을 깨듯 제단은 끊임없이 깨어져야 한다. 그것은 숙명이다. 운명의 생김새를 한 에바부인이 "그 어떤 꿈도 꼭 붙잡으려 해서는 안 돼요."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무의식이 패거리에 집착할 때, 거대한 나르시시즘이 형성될 때, 세계의 종말은 다가온다.

 

"꿈이 나타나기 전까진 어려웠죠." (171쪽)


 

모든 멘토를 죽이고...

 

"지독히 고리타분해요!"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에게 한 말이다. 피스토리우스는 '한 인간이 하늘과 지옥을 흔들어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영혼의 목소리가 옳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게 하는'음악으로 싱클레어를 '내면 세계'로 인도했다. 이는 ''어두운 세계'를 열어주는 프란츠의 휘파람 소리, 비판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미안의 눈길과도 같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어떤 신호나 문장만으로 다른 차원으로 바꿔주는 것. 멘토에게는 그런 주술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멘토의 역할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도록 돕는 일'까지다. 멘토는 신전 앞에서 아프락사스의 일갈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그 이후에는 모두 혼자다. 고독. "난 못해. 그러면 난 벌벌 떨려. 나는 그렇게 완전히 벌거벗고 고독하게 서 있을 수가 없다네." 이후에는 '우리 모두의 돼지'로 돌아가든지 '깨어난 인간'이 되든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분명 '깨어난 인간'은 아니지만 멘토와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신전 앞에서는 멘토를 죽이거나, 그가 깨어난 자라면 꿈 속의 새처럼 그를 안에서부터 쪼아먹어 그가 되어야 한다. 깨어난 사람들은 깨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나는 깨어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인상깊었던 데미안이 자신에게 침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진짜 데미안은 지금의 모습, 돌로 된, 태고를 간직한, 짐승과 같은, 돌과 같은, 아름답고 차가운,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본 적 없는 생명으로 은밀히 가득 차 있는 저런 모습이었다. 그를 에워싼 이 고요한 공허, 이런 에테르와 별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 (80쪽)

 

그리고 싱클레어

 

"데미안에게 그랬듯이 나는 그가 없어도 그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었다. 그냥 그를 강력하게 상상하면서 내 질문이 집약적인 생각의 형태로 그를 향하게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질문 안에 담긴 온갖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다만 그럴 때 내가 상상하는 것은 피스토리우스나 막스 데미안 개인이 아니라 꿈에 나타나는, 내가 그림으로 그린 모습이었다."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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