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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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라는 생각을 염두에 둔 소설이란 어떤 것일까? 내 상상 속 이미지는 이렇다. 이삿짐을 하나하나 싸며 그 짐에 맞는 추억들을 떠올리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박스에 집어넣어 청테이프를 찌익 찢어 붙여 마무리하고는 허리를 펴 한숨 한 번 휴. 박스가 늘어갈수록 집에 대한 추억과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에 쟁여지고 정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독자들에게 대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자!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원래 인생이든 뭐든 마무리의 백미는 정리 아니겠나? 그래서 노문학가의 글들을 보기 전에는 늘 경건한 마음자세를 하게 된다. 어떤 정갈함. 그리고 삶의 정답을 엿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역시도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정리된 집이 아닌 모든 물건들이 그 자체로 흐드러져 있는 곳에 초대받은 느낌을 받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책표지가 아닌 작가가 제시한 어떤 미지의 통로로 연결되어 계속 덤덤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마지막임에도 마무리된 것 같지 않은 마지막. 정리하고 보기 좋게 다듬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닫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청테이프 같은 것을 거부하는 미학을 나는 이 소설집에서 읽었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의 소설을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함께. (노벨상이 땡큐다)

 

나는 서평가 크리스천 로렌첸이 먼로에 대해 “평생 같은 주제만 반복하는 ‘변주의 대가’”라고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비아냥이 아닌 텍스트의 의미 그대로다. 대가가 흘리는 변주의 선율에 취해 내뱉는 감탄 섞인 동의로서 말이다.『디어 라이프』속 열 개의 단편과 네 개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촌스럽게도 자꾸만 몇 가지 키워드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먼로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반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단편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키워드를 중심으로 생각들이 응집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안개처럼 퍼지고 번져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떠올린 키워드를 끝내 언어로 잡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또 손에 잡히지 않은 것들에 대해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파열선

 

신형철 평론가는 단편소설의 최소조건을 ‘파열선’이라고 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파열선.『디어 라이프』의 열 네 편의 소설에도 각각의 파열선들이 있다. 삶의 지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최초의 작은 선. 그 작은 선에서 촉발되는 상상은 독자의 몫이라는 게 단편소설의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먼로가 어쩜 장편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결말(아닌 결말)을 독자들에게 주었다고 생각(착각)한다.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삶은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다’이다. 이 말은 ‘끝내 극복하리라’라는 극기의 메시지가 아니다. 극복되지 않았다면 또한 그것대로 완성되는 것이 삶이라는 요상한 메시지이다.

 

 

대담한 사랑

 

소설 속에서 여러 파열선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나는 단순하게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이저벨이 말한 ‘대담한 사랑’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일별하게 된다. ‘대담한 사랑’은 사람들이 쉽게 표현하는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담한 사랑은 단순히 ‘윤리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만으로 포획되지 않는다. 물론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죄’라고 불리기도 하고, ‘불법’이라고 여겨지며 그 행위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대담한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인간 삶의 최소요건이라 할 수 있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중에 말하길 그때 어머니도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살면서 처음으로,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고.” (자갈)

 

그러므로 문학은 누군가의 삶의 이유를 단순하게 불륜이라는 시선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것을 정당화 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디어 라이프』에서 먼로가 알게 모르게 ‘대담한 사랑’에 대한 여러 변주를 했고, 불륜, 대담한 사랑, 죄 등으로 포착해낼 수 없는 잉여의 조각들을 다채롭게 펼쳤다고 생각한다.

 

 

불평할 권리

 

대담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고난의 주체가 되는 인물과 달리 그로 인해 남겨지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소설에서 불평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로서 조명된다. 그리고 대담한 사랑을 위해 떠난 이들의 인력(引力) 또는 죄로서 작용한다. 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고난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끊임없는 연쇄가 시작되는 것이다.

 

죄, 그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결연하고 탐닉적인 관심을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기울였었다. 죄. (39쪽, <일본에 가 닿기를>)

 

묘하게 표정이 없는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 그러다 아이는 자기가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한다. 그제야 아이는 자기 세상을 되찾는다. 괴로워하고 불평할 권리를 되찾는다. (37쪽, <일본에 가 닿기를>)

 

주체와 객체로서의 이분법이 아닌 누구나 주체가 되고 또 객체가 될 잠재성을 갖는다. 대담한 사랑으로 얻은 연인을 다른 대담한 사랑으로 잃는다. 또 대담한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죽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느끼는 ‘살아있음’은 다른 누군가에게 ‘절망’ 또는 ‘죽음’이 된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한 사람의 절망에 혹은 살아있음에 포커스를 맞추어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플롯

 

자발적 고난의 주체는 떠난다. 혹은 떠나진다.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아문센에서 토론토로, 시골에서 타운으로, 타운에서 시골로.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새로운 풍경, 새로운 기온에 자신을 맞춰 새로운 시간을 산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그리고 지금은 죽은 마거릿 로즈가 겁먹은 잭슨을 향해 뿔을 들이댄 우스운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그녀는 전혀 구분하지 않는 듯 했다. (248쪽, <기차>)

 

남은 자 혹은 남으려는 자들은 딱히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기억은 편년체라기보다는 기전체에 가깝다. 또는 자기중심적으로 구성하는 플롯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 레이는 리아에게 영화를 토막토막 봐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플롯이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시간을 토막 낸 단위다. 재미있게도 남은 자 레이는 리아의 삶과 그녀의 변화를 토막토막 목격하고 쉽사리 그 변화의 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설에서는 떠난 자를 모험가 혹은 변화의 주체로, 남은 자를 고립된 자 변화를 거부하는 자의 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설정한 상대방의 플롯 이면을 보지 못할 뿐이다. 각자는 각자대로 시간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때로 다시 만난다. 기차를 타고 떠난 사람은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온다. 삶을 끝낸다 해도 결국 기차 레일에서다. 떠나봤자 기차레일이 닿는 어떤 곳에서 삶은 이루어진다.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 안에서 인물들 간의 플롯은 언젠가 다시 겹쳐진다. 물질적 세계에서 겹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적 세계에서 남은 자와 떠난 자는 끝내 서로를 감당해야 할 몫으로 작용한다.

 

 

시선

 

소설 속 시대에서 여성은 사회로부터 합당하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그리고 행여 여성이 대담한 사랑이나 여타 기대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매춘부나 죄인 또는 죽어도 싼 사람이 된다. 여성을 시선으로 옥죄는 것은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종교, 사회에까지 광범위하다. 또는 돈 이모처럼 남편에게 최고의 안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만의 특별하고 독특한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과 한계는 꼭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기준에서 영웅적 인물인 <시선>의 세이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춤에 빠져들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죽는다. 어떤 이는 고정관념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힐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도덕과 규율의 한계를 넘어 주체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결과가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재밌는 것은 그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었고, 더 좋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에서 어떤 종류로서의 완전함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디어 라이프』는 나로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구성의 묘미들이 있다. 반전이나 복선의 실현들이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단순히 재미에만 복무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측 못했던 결말이나 긴장이 해소되고, 뜻밖의 인물들이 만나는 사건들은 형식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반전의 결과는 인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태로 회귀할 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나빠질 수도 있다. 독자는 그 자체로 한 번 놀라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인물이 반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소설 속 대개의 인물은 큰 반전이나 변화를 겪은 후 그 현상 자체를 자체로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단순히 <자갈>에서의 닐처럼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 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지기 위해 망각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카로의 ‘첨벙’소리를 기다린다. 나는 마치 이것이 상처를 흉터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선연한 상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소설집을 통해 어설픈 행복보다는 현실 속 완전함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상태. 모든 환상이나 생각이나 꿈을 걷어낸 후 남는 선명한 현실. 그런 선명한 현실만 냉정히 인식한다면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는 말에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어떤 기만도 틈입하지 않는 삶을 추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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