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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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으로만 접하던 성석제의 소설을 드디어 읽다. 가벼운 듯 풍자의 미(美)를 솔솔 피워 올렸다가 문득 날카롭게 핵심을 향해 내달리는 통찰을 보고 있자니 절로 박민규가 연상되었다.『왕을 찾아서』가 96년에 출간되었고 성석제가 박민규에게는 까마득한 선배라지만 독자인 내가 박민규를 먼저 접했으니 이 부조리한 인과관계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대고 있다.


『왕을 찾아서』는 화자인 장원두가 친구 재천의 전화를 받고 고향을 찾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문득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의례 귀향길에 오른 누군가는 어렴풋한 상념에 젖어 습한 상태이기가 쉽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밀려드는 안개에 파묻혀 고향의 이미지를 뿜어냈다면, 장원두는 ‘마사오’라는 절대적인 힘에 짓눌려 과거의 추억을 토해낸다. 귀향길의 추억은 기분이 나쁜 것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식은 비빔밥 같은 맛이다.



마사오에 대한 추억


‘인간에게 빠르기만큼 느리기도 있고 느리기가 어떤 선물을 준다면 그 중 하나는 추억이다.’ 장원두는 늘어지는 차량행렬 속에서 마사오를 추억한다. 왜 굳이 마사오인가? 마사오라는 인물은 싫든 좋든 장원두의 유년시절을 건설한 창조주와도 같다. 대개의 창조주가 그렇듯 창조주 자체가 무슨 큰 일, 적극적인 작용을 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창조주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그 존재 자체가 유의미한 세계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비록 도시인 장원두에게 미치지 않는 영향력일지 몰라도 고향으로 내려가는 지역인 장원두에게 마사오는 일상 이면의 원초적인 무엇으로 다가옴이 분명하다. 윤희중에게 있어 무진의 안개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가 짐작했듯이『왕을 찾아서』의 왕은 ‘마사오’이다. 이 전설의 싸움꾼이자 지역의 절대 권력인 마사오라는 인물은 ‘나’ 장원두의 서술에만 의지해서는 도무지 그 정확한 특성을 포착할 수가 없다. 그가 싸움꾼에 절대 권력을 쥔 비범한 인물인지는 알겠다만, 때로는 의리와 뛰어난 판단력, 통찰력을 갖춘 직감적 인물인 것 같다가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는 그저 개망나니에 불과한 동네 건달로 묘사된다. ‘박정두’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마사오는 그 이름에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형성하는데, 믿을 수 없는 화자 장원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마사오’는 이 소설의 기준점과 같은 역할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를 중심으로 사건이 형성되고 지역권력의 대류현상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마사오의 그런 모습은 그 후 갖가지 신화를 낳기에 충분했다. 사실은 효모 들어간 밀가루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적당히 첨삭이 되고 장식이 된 다음 잘 구워진 빵과 같은 신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신화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지워질 수 없이 되풀이되고 공고하게 되었을 때에 마사오는 완전히 돌아왔다. 지역 전체의 신화와 기억이 그를 위해 미리 마련해둔 왕좌에 올라가 앉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36쪽)


화자는 마사오가 상당부분 만들어진 인물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그저 관찰자로서 마사오가 왕으로 군림하는 순서도를 자신의 내러티브에 맞게 정확하게 끼워 맞춰 정합성 있는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장원두에게 그랬듯이 마사오는 모두의 왕이었지만 모두에게 저마다 ‘다른’ 왕이었음에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나 어렸을 적에도 학교의 짱은 대개 마사오와 같은 전설 아닌 전설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학교 짱의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두 동강이 나는 건 나무젓가락 부러지는 것만큼 쉬운 일이더라’라는 초등학생들의 입을 거치면서 덧입혀진 전설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다시 그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짱에게 덤비지는 못할 것 같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짱에 대한 공포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그 이미지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재천, 언어로 쌓아올린 왕좌


생각해보면 실제 인간의 힘이란 우리의 생각보다 미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에게 아주 작은 힘만 있으면 그 힘을 증폭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육체보다는 언어가 실재에 더욱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언어가 입력되고 그 언어가 인간의 상상에 펌프질을 가할 때 객관적인 한 사람이 존경하는 인물, 매력적인 인물, 증오하는 인물로 변모하는 것이다. 마사오는 순수하게 물리적 힘만으로 단순한 삶을 살았지만 타인의 입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설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단순 언어의 힘만으로 왕의 자리를 꿰찬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재천’이다.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평범한 기질에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고 평범한 것에 만족하는 평범한 어린애였다. 비범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재천 역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평범한환경에서 자랐다. 평범한 성적을 유지하고 평범한 자질을 가진 것도 나와 같다. 다만 평범한 것에는 만족을 하지 않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었다. (144쪽)


재천은 언어를 부릴 줄 알며 낯의 근육을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배열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똥 방귀에 섞여 나오는 똥찌꺼기처럼 생겼다”라는 평가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한 아이를 울게 만들었을 만큼 화려한 언어구사자인 재천은 마사오와는 다른 방식으로 왕좌를 쌓아올렸다.



어디에나 역사는 있다


마사오는 죽었다. 그의 초상집에는 전설의 싸움꾼들과 신흥 지역권력층 그리고 소싯적 청년들의 가슴을 달달하게 만든 연정관계가 뒤섞인다. 비록 자그마한 지역으로 표현되었더라도 여기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옆 나라 대륙의 영웅호걸이 난립하던 삼국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온갖 권모술수와 무력, 또 남자들을 움직여 큰 사건을 만들어내는 팜므파탈의 등장까지 이 자그마한 지역을 소설의 배경으로 한정지었음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성석제는 자그마한 지역에서 삼국지 못지 않은 대서사시를 만들어 냈다.


장원두는 스스로 역사가를 자처한다. 대개 역사라 함은 권력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것을 말한다. 모든 역사가 그랬다. 아무리 미시역사, 민중의 역사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역사의 중심은 늘 정치사가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치사를 중심으로 문화, 예술, 경제사 등이 뒤따라 오는 것이다. 심히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운 진시황제와 비견될만한 마사오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왕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동네 건달들이 그토록 앉고 싶은 자리는 바로 이 ‘왕의 자리’이며 이 ‘왕의 자리’는 곧 ‘마사오’와 등치된다. 마사오로 인해 지역에는 역사와 계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그가 위대한 만큼, 그의 몰락도 장엄해야 했다. 죽음은 특별해야 했다. 그게 그렇지 않다면 세상 이치는 엉터리고 내가 믿는 신념과 가치와 신화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103쪽)



왕의 빈자리


마사오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더 이상 육체적 힘만으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지역의 다음 세대들은 왕의 빈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이 차지하려 하는 것은 왕이 아닌 마사오 자체였다. 조창용이 서울의 조직을 등에 업고 지역의 권력을 차지했지만 그가 지향한 것은 마사오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실패였다. 혁명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담의 왕자 재천은 그와 다른 권력을 지향했다. 재천은 ‘혀와 어휘와 문장과 상상력과 집착을 총동원해서’ 마사오 그리고 희안의 그림자를 껴안으려 애썼다. 한 마디로 기존의 모든 이미지를 통합하려 한 것이다. 마사오가 원초적인 권력이었다면 재천은 아무 연고도 공통점도 없음에도 기어코 그 이미지를 이어받으려 했다. 우리는 그것을 정통성이라 부른다. 지역이나 왕국은 그런 식으로 묶여왔고 그런 식으로만 크든 작든 지역통합이 가능했다.


‘진정 왕이 되려는 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 없고 도움이 필요 없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필요 없게 된다.’ (289쪽)



흰 팔뚝의 검고 큰 그림자


장원두는 마사오라는 지역의 왕이 군림하는 곳에서 어린 시절 자의식을 성립해갔다. 우리는 이 소설의 한 축을 자리하고 있는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뜨뜻미지근한 연애사를 발견할 수 있다. 장원두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여자는 마사오의 뒤 겨드랑이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흰 팔뚝으로 묘사되는 마사오의 여인이다. 장원두의 꿈에 나올 정도로 큰 임팩트를 준 흰 팔뚝(말 그대로 흰 팔뚝)은 장원두의 첫 성적 대상이었다. 마사오라는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에서 솟아나온 듯한 ‘흰’팔뚝은 또 한 번 장원두의 마사오 월드를 더욱 견고하게 구축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사오의 누나. ‘광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돌연히 튀어나오는 금빛 화살 같은 것이다. 광자는 바로 그런 눈길로 나를 보고 있다.’ 흰 팔뚝이 마사오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성적인 프레임 안으로 담아냈다면 광자는 포용력과 따뜻함 모성애와 같은 매력으로 장원두를 끌어들인다.


세희의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 자신을 우습게 본 남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하지만 직접 대통령이 되기보다는 영부인이 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앞세워 지역의 가장 큰 권력자의 연인이 된다.

장원두에게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장원두가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마사오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나온 흰 팔뚝은 세희가 되어 결국 잡히지 않는 권력의 손아귀에 흘러들어간다. 이것은 장원두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든 이들의 콤플렉스다.



망원경을 세우는 일


성석제식 농담에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놓치고 웃다보면 그가 하려는 이야기의 정수를 놓치기 쉽다. 장원두는 왕을 찾아 지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진정 왕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왕의 빈자리는 태풍의 눈과 같아 늘 그 주변이 복작댄다. 그것은 작은 지역뿐만 아니라 큰 지역을 한정지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아량이 헤아릴 길 없던 사단장이 결국 나중에 친구들과 짜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휘어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 왕의 자리는 아직도 비어있다. 그리고 대개 많은 이들의 삶은 그 비어있는, 실체 없는 공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게 되어 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그 빈자리를 똑바로 직시하기 위해 여러 지점에 망원경을 세워놓는 것이다.


지역은 여전히 회오리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비안개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은 눈부시도록 화창하다. (...)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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