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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 형이상학으로부터 현실에 이르는 일관된 구조를 보여주는 개념

::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1]

 


 


이렇게 물으며 시작하고 싶다. “이 책은 읽은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나는 이에 대해 아주 우습게도, 읽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도 대답할 것이고,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도 대답할 것이다. 정치신학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최소한 내가 보기에, 소위 진보적 식자들이 들이대는 전망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에 대한 이야기, 즉 역사 더 정확히는 이념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역사적 현실에 대한 뚜렷한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은 거의 팜플릿 수준의 논박서이기 때문에 슈미트가 누구와 논쟁하고 있는지, 슈미트가 서 있는 지적인 스탠스는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하면 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슈미트가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지적 지형도[2]를 파악한 후에야 읽을만한 책이기 때문에 슈미트란 이름에 혹해서, 남들이 많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 같아서 한 번 읽어보려는 생각[3]이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책을 집어 들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왜 정치와 신학의 결합인가? 정확히 옮기자면, 정치적 신학(politische Theologie)인데, 정치적 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다. 책을 읽으면서 추측해보건데, ‘정치적 신학은 신학적 개념들이 세속화된 서양의 국가에 관한 이론과 주권이론의 역사에 대한 요약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능의 신이 만능의 입법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러 개념이 신학에서 국가론으로 옮겨 갔다는 역사적 발전을 봤을 때만이 아니라, 이들 개념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체계적 구조를 봤을 때도 그렇다.”(p. 54. 강조는 인용자) , 슈미트가 보기에 국가론에 대한 개념적 탐구의 발전사는 신학적 개념들이 세속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17세기 국가론에서는 신과 군주가 동일시 되었고, 신이 세계에 대해서 점하는 자리를 주권자가 국가에 대해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상은 홉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도입한 까닭, 다시말해 결정의 궁극적 심급에 대한 요청과 국가의 인격화는[…]방법론적이고 체계적인 필연이었다. 군주는 세속화된 신이며, 그는 어떤 결정의 궁극적 심급에 해당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세속화된 신의 자리는 군주가 아니라 인민이 차지한다. 군주가 주권자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인민이 주권자가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은 인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활용되어 오던 신의 표상을 다시 한 번 대상을 달리하여 활용한다.

 “17~18세기의 신 개념에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이 포함되어 있듯이, 국가에 대한 주권자의 초월이 국가철학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점차 모든 것에 대한 내재표상의 지배가 확장되어 간다.”(p. 69.) 프루동과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 프루동은 신 대신에 인류가 등장해야 하며 이러한 이상은 무정부주의적 자유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기의 국가론의 전개는 1) 모든 유신론적이고 초월적인 표상들이 제거되고 2) 새로운 정통성 개념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왕정복고가 끝난 뒤, 더 이상 전통적 개념들에 근거하여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왕정의 폐기는 초월적이고 유신론적 표상들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하나의 이념’(신이라는 이념)이 어떻게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또 폐기되는지를 거대한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런 탐구를 슈미트는 개념사회학이라고 부른다. 개념사회학적 탐구에 따르면, “군주제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당시 서유럽인의 총체적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적 형태화가 당대의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제가 그러한 것처럼 후대의 민주제도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형성되었다. , “특정 시대가 만들어 내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시대 정치조직의 형식과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pp. 64-65., 강조는 인용자) 가장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신학으로부터 가장 구체적인 수준의 정치조직과 법적 제도의 현실성을 일관되게 파악하는 것이야 말로 슈미트가 보여주는 탁월성이다.

이렇게 정치적-법적 제도의 현실을 가장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입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는 슈미트의 시도는 당대의 무정부주의적 이론과 권위주의적 이론 사이의 대립을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의 대립에서부터 파악한다. 슈미트는 모든 정치이념은 인간 본성에 관해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전제로 한다.”(p. 78. 강조는 인용자)고 분명히 밝히고 이를 구체적으로 당대에 대립하고 있던 이론들에 적용한다. , 무정부주의적 이론은 태생적으로 선한 인간을 전제하고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는 격언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이에 반해 권위주의적 이론은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저에는 인간 본성의 절대적 유죄성 및 극악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대립하는 두 이론들 가운데 권위주의적 이론을 지지한다. 그가 권위주의적 입장에 동조하는 이유는 바로 국가의 핵심, 즉 주권을 예외상태를 결정”(p. 16.)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그 실제 사태에 걸맞게 정의될 수 없는 상태이다. 극도로 긴급한 사례라거나 국가의 존립이 위험에 처했다는 식으로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외상태야 말로 누가 주권의 주체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도록 유도하는 상태이다.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무엇이 예외 상태에서 허용되는지, 누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하는 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주권자는 극한적 긴급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평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주권자는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 바깥에 서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속해있다.”(p. 18.)

주권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근대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는 기만적인 수사들로 가득 찬 제도에 불과하다.[4] 자유주의의 본질은 결정이라는 주권의 핵심을 회피하고 논의를 시작하려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핵심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결정을 회피하려 한다. 오히려 모든 정치적 활동은 신문이나 의회, 즉 논의에 내맡기려 한다.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세워진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는 국가의 근간으로서 결정의 권한을 도외시함으로써 실제로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기만적인 행보를 은폐한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모든 정치 문제를 일일이 토론하여 협상 자료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토론으로 해소하려 한다.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갖고 있는 협상이며 어정쩡함이다. 즉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기대를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 셈이다.”(p. 86.)

그러나 자유주의의 핵심이 어정쩡함이라면, 그것은 비난이나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왜냐하면 주권의 핵심으로서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자유와 권리의 침해의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담긴 어정쩡함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최소주의적사고에 익숙하다. 즉 최상의 결과를 얻는 선택에 모험을 걸기 보다는 최악을 상태를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슈미트의 사유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자유주의의 어정쩡함에 대한 조소나 비난이 아니다. 또한 결정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강하게 인식할수록 우리는 독재의 가능성을 허용할 수도 있고 권위주의적 정부이론에 관한 논의를 수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슈미트가 개념사회학이라고 불렀던 작업, 즉 우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최소주의적 사고와 현재의 정치적-법적 현실 사이를 꿰뚫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이 무엇인지, 그 근본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일관되게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슈미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전망으로 삼기엔 너무 무모하다. 따라서 그 방법적 도구로서 유용성은 인정하면서도 개념사회학적 작업을 통해 자유주의를 그 근본으로부터 해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해부학으로부터 질병의 처방과 건강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 전망은 요원하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슈미트가 나에게 준 교훈이다.  




[1] 칼 슈미트, 『정치신학-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김항 옮김, 그린비, 2010.

[2]이 책의 적은 구체적으로 두 사람이다. 한편에는 추상적 규범주의를 내세우는 유대인 법학자 한스 켈젠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무정부주의적인 모권제 유토피아를 설파하는 오토 그로스가 있다.”(김항, <옮긴이 해제>, p. 110.)

[3] 이러한 생각을 역자도 잘 알고 있듯이, ‘슈미트 르네상스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야말로 슈미트 르네상스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슈미트의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영미권과 일본에서도 슈미트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뜨겁다.” (p. 5.)

[4] 실제로 슈미트는 모든 근대적 법치국가의 발전 경향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주권자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p. 18.)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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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대학살에 대한 질문과 대답 -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대학살』[1]

 

2006년 가을, 강의실에 들어온 한 남자는 자신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사학을 복수전공 하기로 결심한 첫 학기였기 때문에, 사학과 과목, 그것도 4학년들이 주로 듣는다던 <서양사학사>는 꽤 부담스러운 과목이었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교수님의 강의는 늘 힘이 넘쳤다. 풍부한 지식과 적절한 유머, 교수 자신의 젊음의 에너지와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강의실에 느껴졌다. 그 교수님의 강의를 나는 좋은 강의로 기억하게 되었고 7년이 지난 그 교수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았다.



나치 대학살은 제목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이다. 나치 대학살을 빼놓고 유럽의 현대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치 대학살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소설 <소피의 선택>을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막연한 저항감만을 내 안에서 확인했다.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것은 오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해독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저자가 밝히듯,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모두 기억이라는 전장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올바로 아는 것은 기억의 전쟁의 직접적 참가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심판자의 입장에서 내가 내릴 판단에 대한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독의 의지를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에 살지도, 그 시대를 살지도 않은 나에게 나치 대학살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었는가? 사실 <소피의 선택>을 읽으면서, 그리고 몇몇 영화들 -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 을 보면서, 이 끔찍한 대학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이 대학살을 이해하고 싶었다. 누가 그랬는가? 왜 그랬는가? 죽어가는 사람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나에겐 이해가 안 가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블랙박스가 바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었다.

나치에 대한 유대인 대학살은 홀로코스트(holocaust)[2]라는 용어로 불린다. 나 스스로에게 겸연쩍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이 땅에서 벌어진 학살 노근리에서의 학살, 4.3 항쟁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 등 에 대해서 가졌던 얄팍한 관심과 달리, 홀로코스트를 하나의 대명사로 즉, The Holocaust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피해자들의 숫자가 달랐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는 다른 집단 학살과 격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해서는 신문 기사 정도를 뒤적이면서 나치 대학살에 대해서는 이토록 열중하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히 내릴 수 없을 것이다.[3]

 

이러한 겸연쩍은 마음은 그대로 남겨두면서 본격적으로 나치 대학살이라는 블랙박스를 해독하였다.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것은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가 유대인을 죽였는가?>, <쉰들러 리스트는 있었는가?>,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어떠했는가?>, <유대인들은 도살장의 양들처럼 죽어갔는가?>가 해독의 열쇠를 쥔 굵직한 질문들이다.



<누가 유대인을 죽였는가?>. 사실 이 질문이야 말로 가장 예민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가해자들은 유대인 절멸 정책의 최종 결정자인 총통 히틀러’,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지휘한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와 제국 보안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그리고 라인하르트의 오른팔 아이히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유대인 절멸정책을 입안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절멸 수용소를 만들고, 살인특무부대를 조직하여 무차별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력자들 내지는 암묵적 동조자들이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이동할 철도편을 마련한 교통부 관계자, 유태인들을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키고 통혼 금지, 여권에 유대인을 뜻하는 글자를 표기하고 평상시 뱃지를 달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킨 의회 의원들과 법률적 대안을 제시한 법무부 직원들,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한 재무부 직원 등 독일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다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학살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 역시 수용소에 공장을 세워 유대인 노동자들의 공짜 노동력을 활용하였고 이들이 더 많이 수용소에 올 수 있도록 로비를 벌였다.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 국민들은 유대인들의 최종해결(절멸), 특별대우(차별)를 허용했다. 그런 점에서 암묵적 동조자를 포함한 유대인들에 대한 가해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니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공범이다.

이들이 유대인 대학살에 동조하고 조력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유대인들을 죽였는가?> 이는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에서 그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는 예수의 죽음 이후부터 내려져 오던 배신자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라는 이질적인 전통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정의될 수 있는 중세적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경제 분야의 갈등에 근거한 근대적 반유대주의. 근대적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로 설명될 수 있는데, 먼저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노동계급을 착취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의 전형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 적대감이 유대인 일반에게 전이되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낭만주의 운동은 민족적 순수성이 간직된 황금시대를 신화적으로 그려가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이방인이나 이류 시민으로 묘사했다.” 셋째, “19세기 내내 맹위를 떨쳤던 사회적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논리는 한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들을 더욱더 변경으로 몰아갔다.” 마지막으로 과학적 인종주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고비노 백작과 같은 사람은 큰 키에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소유한 아리안 족만이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갈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속화되어 유대인은 열등한 민족이고 박멸해야 할 기생충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암묵적 증오는 과학적, 이론적 근거를 얻는 것처럼 보였고 유대인들에 대한 물리적 절멸 역시 나름의 근거를 갖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   

또한 유대인 절멸에 관한 기획에는 근대정신이 흐르고 있다. 이른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과 효율성이 유대인의 절멸에 관한 기획과 실행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독일의 젊은 관료들은 합리적 사고로 무장한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강력한 제 3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낙후되어 있는 동유럽 지역의 경제를 독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볼 때 동유럽 지역의 경제적 근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인구였다. 이들은 빈곤과 낮은 생산성, 그리고 과잉 인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민하면서 동유럽 지역의 원시적 생존경제의 근본 원인이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보았다.”[5] 이러한 관료들의 고민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게 하는 데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하였다.[6] 절멸 수용소들의 죽음 과정은 효율적인 공장을 보는 듯하다. 여러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합동 연구를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치클론 B가스를 상용화하도록 했다. 유대인 학살의 대명사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는 철로와 승강장까지 마련되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근대 세계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철도라는 이동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 내린 유대인들 가운데 노동 능력이 없다고 판정된 사람은 바로 가스실로 직행했다. 가스실에서는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규조토에서 누출되는 가스를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가스실 내부에서 사람들의 죽음이 확인되면 시체들은 거대한 화덕으로 옮겨져 불태워진다. 일종의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절멸 수용소는 거대한 죽음 공장이었다.[7]     

<유대인들은 도살장의 양들처럼 죽어갔는가?>. 사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뉘른베르크 법이 반포된 이후 유대인들의 행보이다. 자신들이 이등 시민, 열등한 민족으로 간주되고 추방당하는 동안, 더 나아가 게토로 내몰리고 절멸 수용소로 끌려가는 동안 유대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루에 9000명이 죽어나가는데 이를 지켜보기만 했는가? 이들에게 저항의식은 전혀 없었는가? 분명한 것은 나치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은 결코 심각한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살인특무부대의 집단 학살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은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지도자들은 호소와 청원의 방법을 택하고 물리적 수단과 정신적 투쟁을 동반하지 않았다. “나치스가 절멸을 위한 현대적 수단을 총동원한 반면, 유대인들의 대응 방식은 탄압 조치가 일관성 없는 불합리한 처사라고 항변하는 중세 랍비들 수준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했다.”[8] 심지어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복종한 부분도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가 학살의 각 과정마다 협력했다. 법령의 공포나 강제 이송 열차 운행, 총살과 가스사들은 나치스가 직접 담당했지만, 시체 매장이나 강제 노역, 벌금 납부, 강제 이송과 총살 대상자 선별 같은 일은 유대인들이 담당했다. “유대인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 스스로의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스의 절멸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9]

유대인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항은 물리적 투쟁이 아니라 상당히 넓은 외연을 갖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 수준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실제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기 없는 투쟁’, 즉 유대 전통을 지키고 나치를 경멸하고 나치에 부역하는 유대인들을 증오하며 보편적 도덕과 윤리 규범을 준수하려는 노력, 내면적 위엄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유대인들의 무기 없는 투쟁은 실제로 게토 내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려는 학교를 만들고, 종교적 가치를 고수하게 하고 당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법 행위였고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수용소 행이었다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장 투쟁도 병행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무기를 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약간의 무기를 구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무장 게토 봉기는 최소한 20회 이상에 이르렀다.”[10]

 

나치 대학살이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말한다면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 대학살의 근간을 이룬,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전적인 무시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한 내면 세계의 지배는 지금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역사의 반복은 한 사건의 기저를 이루는 정신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구체적 현실로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치 대학살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이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고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될 수 있다는 파괴적인 정신이 현실에 나타날 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상의 도구를 찾는 것이 합리성의 본질이라고 간주하는 정신이 현실에 나타날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파괴적인 정신을 비판하고 반성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목적에 걸맞는 수단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반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할 때에만 나치 대학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치 대학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1] 최호근,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푸른역사, 2007.

[2]영미권 학자들의 논문이나 책을 보면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거의 대부분 홀로코스트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때부터였다[…]홀로코스트란 용어의 선택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번제를 의미하는 성경의 표현이다. 홀로코스트란 말은 번제라는 우리말 번역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종교적 희생을 뜻한다. 학살 과정은 물론 그 이후에도 유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이렇게 죽어가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유대인들은 학살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의 집단적 죽음은 새로운 구속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종의 희생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pp. 395-396.)

[3] 이러한 나의 겸연쩍음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나로서는 유대인 대학살을 20세기에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수많은 집단 학살 가운데 하나로 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다른 집단 학살과 격이 다르다거나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다른 집단 학살 사건에 사용하는 것은 도둑질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일부 영향력 있는 유대인 학자들의 주장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홀로코스트란 표현을 피해야 했다.”(pp. 398-399.)

[4] 같은 책, pp. 55-56.

[5] 같은 책. P. 81.

[6] 하지만 경제 발전과 같은 사회 경제적 측면에 대한 고려 그리고 근대 정신에 입각한 효율적 수행은 그 자체로 유대인 절멸의 근본 원인이라고 불리기엔 부족하다. 왜냐하면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나치 체제하에 살던 독일인 가운데 반유대주의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정서에서는 한 소수 집단을 절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p. 88.)

[7]이러한 설비 측면만이 아니라 운용 면에서도 아우슈비츠의 모든 것은 근대화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늘어가는 처리 물량을 감당하기 위해 친위대원들은 유대인들에게 아예 옷을 다 벗고 가스실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사체에서 옷을 벗겨내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4시간 동안 최대로 가동할 경우 가스실과 화장장은 9,000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pp. 312-313.)

[8] 같은 책, p. 347.

[9] 같은 책, p. 349.

[10] 같은 책,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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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 문학과 사랑의 협주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1]을 읽고

 

 아우슈비츠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악의 한 형태였고, 인류가 저질렀던 가장 극단적인 악의 한 형태였다. 아이러니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알고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만이 남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한 철학자의 비통함은 어느 새 무감각한 지식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또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류가 가졌던 죄책감을 희석시켜주었다. 이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명사로만 받아들일 뿐, 비참함과 죄책감이 흐르는 동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이하 『선택』)은 우리를 고정된 명사의 세계로부터 동사의 세계로, 이름만이 아니라 비참함과 죄책감의 뜨거움을 느끼게 하는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스타이런은 서사 전체를 통해 보여준다. 스팅고가 소피에게 느꼈던 열정적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스팅고가 소피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진정성 있는 사랑이란 것은 지극히 진부한 말이지만, 이 진부한 것의 참된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사랑이 우리를 치유하며,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스팅고와 소피 사이에는, 진보적인 미국 남부인과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비극을 문신처럼 삶 속에 새긴 폴란드인이란 거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

 

소피의 시련이 시작되고 나서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1947년 말의 어느 날, 나는 소피가 생지옥의 문 안으로 걸어갔던 바로 그 날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기억을 뒤져보았다. 1943 4 1일 만우절은 내게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난 일인 것 같아 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을 뒤져본[…]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피가 아우슈비츠 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 오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고, 나는 거기서 미친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선택1, p. 387.)

 

 소피가 지옥의 문 안으로 걸어갔던 그 날, 스팅고는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며 미친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다. 한 사람은 선한 시간, 한 사람은 인간을 생지옥의 손아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시간을 살았다. 이렇게 명백하게 다른 시간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한 그리고 직시해야 할 사실이다. 세계에는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금 시리아에서는 화학무기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의 강남에서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사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끔찍하고 비극적이다.

 스팅고는 소피를 열렬히 사랑했다. 소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폴란드인이긴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스웨덴인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의 밝은 금발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스팅고는 소피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에게 이미 네이선이라는 건장한 남자친구, 그녀를 낯선 미국, 그것도 악마처럼 거대하게 자리잡은 뉴욕에서 살아가게 도와주고 함께 서로에게 완전히 의존하며 살아가는 남자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정열의 불을 조심스럽게 묻어두었기 때문에 그녀가 곁에 있을 때마다 내가 말 못할 허기로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소피도 네이선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1, p. 206.) 이렇게 소피에 대한 스팅고의 감정은 정열 그 자체였지만, 그것이 겉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피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심지어 남자친구인 네이선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스팅고에게 털어놓는다. 소피는 스팅고를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2]

 소피를 사랑했던 스팅고는 소피의 모든 아픈 역사를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소피가 겪었던 비극은 그녀의 가족사로부터 시작된다. 소피의 아버지는 소피는 줄곧 이를 숨겨왔지만 폴란드 내에서 가장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어렸을 적 소피는 아버지가 불러주는 반유대주의 팜플랫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소피에게 자신이 하는 일들과 관련한 업무를 돕게 하기 위해 독일어와 속기법, 타자기를 다루는 법을 소피의 아버지는 가르쳤다. 소피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각이 생길 때쯤, 아버지가 최종 해법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모든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쯤, 그리고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자신의 남편 역시 괴물이며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본격화 되었다. 폴란드는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고 소피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이 나치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치에게 소피의 아버지는 한갓 폴란드인’, 즉 유대인을 절멸시키고 난 다음 타겟이 될 열등한 민족일 뿐이었다. 소피의 아버지와 남편은 크라쿠프가 점령되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소피는 바르샤바로 거처를 옮기지만, 게슈타포들의 일제검거가 시작됨에 따라 그의 아들얀과 딸 에바와 함께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리고 소피는 자신이 해야했던 선택 중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네 아이들 중에 하나만 살려 줄 수 있다고.” 그가 다시 말했다. “다른 아이는 가야 하고. 누구를 데리고 있겠나?”

 “제가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럴 수 없어요! 선택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지른 비명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천사들도 이렇게 큰 소리로 절규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히 칸 니히트 벨렌!(저는 선택할 수 없어요그녀가 외쳤다.

 군의관은 바라지 않은 이목이 자신에게로 쏠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닥쳐!” 그가 명령했다. “지금 당장 선택해, 알았어? 안 그러면 아이들 둘 다 보내 버릴 거야. 빨리!”

 소피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들을 질식할 정도로 꽉 끌어당겨 안고 있어서 아이들의 살이 여러 겹의 옷을 뚫고 그녀의 살과 한데 뭉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제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목쉰 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러면 둘 다 보내버려.” 군의관은 부관에게 말했다. “나흐 링크스(왼쪽으로.)”

 “엄마!” 소피가 에바를 밀쳐 내고 비틀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서저 에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 댔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 소피가 외쳤다. “내 딸을 데려가요!” (『선택2, p. 424.)

 

 소피에게 이 선택은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시시때때로 그녀를 고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택의 기억을 남긴 구체적인 장본인인 군의관의 이름이다. 소피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팅고가 그에게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만트 폰 니만트(Jemand von Niemand)이다. 그 이름은 아무도 아닌 사람이자 모든 사람”(직역은 아무도 아닌 자의 모든 사람 정도가 된다)이다. 굳이 악의 평범성같은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저 군의관이 착한 사람이었건 나쁜 사람이었건 간에 선함과 악함의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었”(『선택1, p. 426.)다는 것이다.

 소피는 이 선택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폴란드의 독립과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을 거절했다는 데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불러준 말들을 그대로 타자로 치며 손수 최종 해결이라는 말을 적은 팜플랫을 가지고 나치의 관리들과 협상을 해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늘 고통 받고 있었다. 스팅고는 소피가 가진 상처로부터 그녀를 치유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인간도 소피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상처를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상처와 고통의 나눔 그리고 공유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스팅고가 소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소피라는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본 성격은 무엇에 대한 사랑이며, 그 대상으로서 무엇에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사랑을 위한 앎은 대상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가까워짐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 공유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그것을 나누려고 하며, 공유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애씀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근원적인 힘이다. ‘인간적인 시간비인간적인 시간사이의 거리를 줄여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것, 아우슈비츠의 인간이 타는 냄새와 미국의 어느 햇살 좋은 날의 바나나 냄새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 가까워지려는 애씀은 오직 스팅고의 사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스팅고가 작가를 지망한다는 점 역시 누구보다 소피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스팅고는 젊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소피와 네이선이 살고 있던 분홍궁전에 들어왔다. 스팅고는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돈이 자신의 할머니의 흑인 노예였던 아리스테를 판 돈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예민한 청년이다. 작가로서 스팅고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당분간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과거 노예제의 유산에 의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즉 자신이 과거의 유산에 의존한다는 존재의 역사성과 인간의 공속성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소피 사이의 거리를, 그 거리의 비극성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노예제와 같은 비극적 시간의 유산과 폴란드와 미국 사이의 물리적 공간에서 빚어지는 죄책감을 스팅고는 비극과 죄책감으로 이해한다. 작가는 망각하지 않는 자이다. 과거의 상처를 망각하지 않기에 기억하는 자이고 그 기억을 남겨 상처의 원인을 폭로하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드는 자이다. 또 추문으로 만드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기억하며 상처를 어루만진다.

 스팅고가 소피를 사랑한다는 점, 또 그가 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이 『소피의 선택』이 진실을 말하는 작품임을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 물론 구원은 모든 억압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나눔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본래적인 의미에서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 속에서 그/녀에게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과정이 우리 존재의 나약함을 간신히 붙잡고 한 걸음 더 살아갈 수 있게한다. 또 작가로 대표되는 문학에 의해 이 사랑의 과정을 기억하도록, 사랑의 과정에서 밝혀지는 누군가의 아픔을 보여주도록 한다. 현실 속의 구체적 감정으로서 사랑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면, 문학은 현실의 날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 보편화시키는 힘이다. 아름다운 것으로 보편화된 이야기는 현실의 날것들이 주는 피로감을 덜어주면서, 이야기 속에 담긴 상처의 기억들을 공유하도록 한다.

 『소피의 선택』은 불행의 기억, 상처와 고통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불행과 상처와 고통에 관한 보고서였다면 우리에게 단지 명사로만 남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소피의 선택』이 사랑과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불행, 상처 그리고 고통의 기억을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우리를 고통, 불행 그리고 상처로부터 구원할 수 있게 하는지 알려주고 또 고통과 불행을 살아있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사로 우리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소피의 선택』은 사랑과 문학의 협주가 보여주는, 인류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처절한 구원의 노력의 이야기다.     



[1]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1,2, 한정아 역, 민음사, 2013.

[2] 소피는 네이선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던 일들을 내게는 들려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네이선과 폭풍 같은 사랑에 빠져 있어서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과거의 일을 잊게 되었고, 또 이유 없이 고통받지 않으려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한테만큼은 자신의 치부와 끔찍이도 고통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정황과 사건들이 분명히 있었고,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가 냉담하게 거부했던 종교의 고해성사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 가까이에 있던 나, 스팅고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된 것이다.”(『선택1,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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