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 문학과 사랑의 협주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읽고
아우슈비츠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악의 한 형태였고, 인류가 저질렀던 가장 극단적인 악의 한 형태였다. 아이러니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알고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만이 남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한 철학자의 비통함은 어느 새 무감각한 지식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또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인류가 가졌던 죄책감을 희석시켜주었다. 이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명사’로만 받아들일 뿐, 비참함과 죄책감이 흐르는 ‘동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이하 『선택』)은 우리를 고정된 ‘명사’의 세계로부터 ‘동사’의 세계로, 이름만이 아니라 비참함과 죄책감의 뜨거움을 느끼게 하는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스타이런은 서사 전체를
통해 보여준다. 스팅고가 소피에게 느꼈던 열정적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스팅고가 소피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진정성 있는 사랑’이란
것은 지극히 진부한 말이지만, 이 진부한 것의 참된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사랑이 우리를 치유하며,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스팅고와
소피 사이에는, 진보적인 미국 남부인과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비극을 문신처럼 삶 속에
새긴 폴란드인이란 거리가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
“소피의 시련이
시작되고 나서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1947년 말의 어느 날, 나는
소피가 생지옥의 문 안으로 걸어갔던 바로 그 날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기억을 뒤져보았다.
1943년 4월 1일 만우절은 내게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난 일인 것 같아 아버지가 보낸 편지들을 뒤져본[…]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피가 아우슈비츠 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 오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는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고, 나는 거기서 미친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선택1』, p. 387.)
소피가 지옥의
문 안으로 걸어갔던 그 날, 스팅고는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며 미친듯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다. 한 사람은 ‘선한 시간’을, 한 사람은
인간을 생지옥의 손아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시간’을 살았다. 이렇게 명백하게 다른 시간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분명한
그리고 직시해야 할 사실이다. 세계에는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금 시리아에서는 화학무기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의 강남에서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사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끔찍하고 비극적이다.
스팅고는
소피를 열렬히 사랑했다. 소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폴란드인이긴
하지만 수용소에서도 스웨덴인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의 밝은 금발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스팅고는 소피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에게
이미 네이선이라는 건장한 남자친구, 그녀를 낯선 미국, 그것도
악마처럼 거대하게 자리잡은 뉴욕에서 살아가게 도와주고 함께 서로에게 완전히 의존하며 살아가는 남자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한 정열의 불을 조심스럽게 묻어두었기 때문에 그녀가 곁에 있을 때마다 내가 말 못할 허기로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소피도 네이선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선택1』, p. 206.) 이렇게 소피에 대한 스팅고의 감정은 정열 그 자체였지만, 그것이
겉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피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 심지어 남자친구인 네이선에게도
하지 못했던 – 이야기를 스팅고에게 털어놓는다. 소피는 스팅고를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피를 사랑했던
스팅고는 소피의 모든 아픈 역사를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소피가 겪었던 비극은 그녀의 가족사로부터 시작된다. 소피의 아버지는 – 소피는 줄곧 이를 숨겨왔지만 – 폴란드 내에서 가장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어렸을 적 소피는 아버지가
불러주는 반유대주의 팜플랫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소피에게 자신이 하는 일들과 관련한 업무를 돕게 하기
위해 독일어와 속기법, 타자기를 다루는 법을 소피의 아버지는 가르쳤다.
소피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각이 생길 때쯤, 아버지가 ‘최종 해법’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모든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쯤, 그리고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자신의 남편 역시 괴물이며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본격화 되었다. 폴란드는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고 소피의 아버지는 자신의 사상이 나치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치에게 소피의 아버지는 한갓 ‘폴란드인’, 즉 유대인을 절멸시키고 난 다음 타겟이 될 열등한 민족일 뿐이었다. 소피의
아버지와 남편은 크라쿠프가 점령되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소피는
바르샤바로 거처를 옮기지만, 게슈타포들의 일제검거가 시작됨에 따라 그의 아들얀과 딸 에바와 함께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그리고 소피는 자신이 해야했던 선택 중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네 아이들
중에 하나만 살려 줄 수 있다고.” 그가 다시 말했다. “다른
아이는 가야 하고. 누구를 데리고 있겠나?”
“제가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럴 수 없어요! 선택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지른 비명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천사들도 이렇게 큰 소리로 절규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히 칸 니히트 벨렌!(저는 선택할 수
없어요”그녀가 외쳤다.
군의관은 바라지 않은 이목이 자신에게로 쏠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닥쳐!” 그가 명령했다. “지금
당장 선택해, 알았어? 안 그러면 아이들 둘 다 보내 버릴
거야. 빨리!”
소피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들을 질식할 정도로 꽉 끌어당겨 안고 있어서 아이들의 살이
여러 겹의 옷을 뚫고 그녀의 살과 한데 뭉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제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목쉰 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러면 둘 다 보내버려.” 군의관은
부관에게 말했다. “나흐 링크스(왼쪽으로.)”
“엄마!” 소피가 에바를
밀쳐 내고 비틀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서저 에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 댔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 소피가 외쳤다. “내 딸을 데려가요!” (『선택2』, p. 424.)
소피에게
이 선택은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시시때때로 그녀를 고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선택의 기억을 남긴
구체적인 장본인인 군의관의 이름이다. 소피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팅고가 그에게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예만트
폰 니만트(Jemand von Niemand)이다. 그 이름은
“아무도 아닌 사람이자 모든 사람”(직역은 아무도 아닌 자의
모든 사람 정도가 된다)이다. 굳이 ‘악의 평범성’ 같은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저 군의관이 “착한 사람이었건 나쁜 사람이었건 간에 선함과 악함의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었”(『선택1』, p. 426.)다는 것이다.
소피는 이
선택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폴란드의 독립과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을 거절했다는 데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불러준 말들을 그대로 타자로 치며 손수 ‘최종
해결’이라는 말을 적은 팜플랫을 가지고 나치의 관리들과 협상을 해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늘 고통 받고
있었다. 스팅고는 소피가 가진 상처로부터 그녀를 치유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인간도 소피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상처를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상처와 고통의
나눔 그리고 공유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스팅고가 소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소피라는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본 성격은 무엇에 대한 사랑이며, 그 대상으로서
무엇에 가까워지려는 것이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사랑을
위한 앎은 대상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가까워짐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 공유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그것을 나누려고 하며, 공유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애씀’이야말로 인류가 가진 근원적인 힘이다. ‘인간적인 시간’과 ‘비인간적인 시간’ 사이의
거리를 줄여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것, 아우슈비츠의 인간이 타는 냄새와 미국의 어느 햇살 좋은 날의 바나나
냄새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 가까워지려는 애씀은 오직 스팅고의 ‘사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스팅고가
작가를 지망한다는 점 역시 누구보다 소피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스팅고는 젊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소피와 네이선이 살고 있던 분홍궁전에 들어왔다. 스팅고는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돈이 자신의 할머니의 흑인 노예였던 아리스테를 판 돈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예민한 청년이다. 작가로서 스팅고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당분간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과거 노예제의 유산에 의해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즉 자신이 과거의 유산에 의존한다는 존재의 역사성과 인간의 공속성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소피 사이의 거리를, 그
거리의 비극성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노예제와 같은 비극적 시간의 유산과 폴란드와
미국 사이의 물리적 공간에서 빚어지는 죄책감을 스팅고는 비극과 죄책감으로 이해한다. 작가는 망각하지
않는 자이다. 과거의 상처를 망각하지 않기에 기억하는 자이고 그 기억을 남겨 상처의 원인을 폭로하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드는 자이다. 또 추문으로 만드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기억하며 상처를 어루만진다.
스팅고가
소피를 사랑한다는 점, 또 그가 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이 『소피의 선택』이 진실을 말하는 작품임을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 물론 구원은 모든 억압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고통과 상처의
나눔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본래적인 의미에서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 속에서 그/녀에게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과정이 우리 존재의 나약함을 간신히 붙잡고 한 걸음 더 살아갈 수 있게한다. 또 작가로 대표되는 문학에 의해 이 사랑의 과정을 기억하도록, 사랑의
과정에서 밝혀지는 누군가의 아픔을 보여주도록 한다. 현실 속의 구체적 감정으로서 사랑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면, 문학은 현실의 날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 보편화시키는 힘이다. 아름다운 것으로 보편화된 이야기는 현실의 날것들이 주는 피로감을 덜어주면서,
이야기 속에 담긴 상처의 기억들을 공유하도록 한다.
『소피의
선택』은 불행의 기억, 상처와 고통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불행과 상처와 고통에 관한 보고서였다면 우리에게 단지 ‘명사’로만 남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소피의 선택』이 사랑과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불행, 상처 그리고 고통의 기억을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우리를 고통, 불행 그리고 상처로부터 구원할 수 있게 하는지 알려주고 또 고통과 불행을
살아있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사’로 우리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소피의 선택』은 사랑과 문학의 협주가 보여주는, 인류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처절한 구원의 노력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