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
형이상학으로부터 현실에 이르는 일관된 구조를 보여주는 개념
::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이렇게 물으며
시작하고 싶다. “이 책은 읽은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나는
이에 대해 아주 우습게도, 읽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도 대답할 것이고,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도 대답할 것이다. 『정치신학』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최소한 내가 보기에, 소위 진보적 식자들이
들이대는 ‘전망’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에 대한 이야기, 즉 역사 더 정확히는 이념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역사적 현실에 대한 뚜렷한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은 거의 팜플릿 수준의 논박서이기 때문에 슈미트가 누구와 논쟁하고 있는지, 슈미트가 서
있는 지적인 스탠스는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하면 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슈미트가 논쟁을
벌이고자 하는 지적 지형도를
파악한 후에야 읽을만한 책이기 때문에 ‘슈미트’란 이름에
혹해서, 남들이 많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 같아서 한 번 읽어보려는 생각이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책을 집어 들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왜 정치와 신학의 결합인가? 정확히 옮기자면, 정치적 신학(politische
Theologie)인데, 정치적 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다. 책을 읽으면서 추측해보건데, ‘정치적
신학’은 신학적 개념들이 세속화된 서양의 국가에 관한 이론과 주권이론의 역사에 대한 요약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능의 신이 만능의 입법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러
개념이 신학에서 국가론으로 옮겨 갔다는 역사적 발전을 봤을 때만이 아니라, 이들 개념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체계적 구조를 봤을 때도 그렇다.”(p. 54. 강조는 인용자) 즉, 슈미트가 보기에 국가론에 대한 개념적 탐구의 발전사는 신학적
개념들이 세속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17세기
국가론에서는 신과 군주가 동일시 되었고, 신이 세계에 대해서 점하는 자리를 주권자가 국가에 대해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표상은 홉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도입한 까닭, 다시말해 “결정의 궁극적 심급에
대한 요청과 국가의 인격화는[…]방법론적이고 체계적인 필연”이었다. 군주는 세속화된 신이며, 그는 어떤 결정의 궁극적 심급에 해당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세속화된 신의 자리는 군주가
아니라 인민이 차지한다. 군주가 주권자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인민이 주권자가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은 “인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활용되어 오던 신의 표상을 다시 한 번 대상을
달리하여 활용한다.
“17~18세기의
신 개념에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이 포함되어 있듯이, 국가에 대한 주권자의 초월이 국가철학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점차 모든 것에 대한 내재표상의
지배가 확장되어 간다.”(p. 69.) 프루동과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 프루동은 신 대신에 인류가 등장해야 하며 이러한 이상은 무정부주의적 자유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기의 국가론의 전개는 1) 모든 유신론적이고 초월적인 표상들이
제거되고 2) 새로운 정통성 개념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왕정복고가
끝난 뒤, 더 이상 전통적 개념들에 근거하여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왕정의 폐기는 초월적이고 유신론적 표상들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하나의 ‘이념’(신이라는 이념)이 어떻게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또 폐기되는지를 거대한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런 탐구를 슈미트는 ‘개념사회학’이라고
부른다. 개념사회학적 탐구에 따르면, “군주제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당시 서유럽인의 총체적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적 형태화가 당대의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제가 그러한 것처럼 후대의 민주제도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형성되었다. 즉, “특정 시대가 만들어 내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시대 정치조직의 형식과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pp. 64-65., 강조는 인용자) 가장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신학으로부터 가장 구체적인 수준의 정치조직과 법적 제도의 현실성을 일관되게 파악하는 것이야 말로 슈미트가
보여주는 탁월성이다.
이렇게 정치적-법적 제도의 현실을 가장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입장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는 슈미트의 시도는
당대의 무정부주의적 이론과 권위주의적 이론 사이의 대립을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의 대립에서부터 파악한다. 슈미트는
“모든 정치이념은 인간 본성에
관해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며,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전제로 한다.”(p. 78. 강조는 인용자)고 분명히 밝히고 이를 구체적으로 당대에
대립하고 있던 이론들에 적용한다. 즉, 무정부주의적 이론은
‘태생적으로 선한 인간’을 전제하고 “인민은 옳고, 정부는 썩었다”는
격언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이에 반해 권위주의적 이론은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저에는 “인간 본성의 절대적 유죄성 및 극악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대립하는
두 이론들 가운데 권위주의적 이론을 지지한다. 그가 권위주의적 입장에 동조하는 이유는 바로 국가의 핵심, 즉 주권을 “예외상태를 결정”(p.
16.)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그 실제 사태에 걸맞게 정의될 수 없는
상태이다. 극도로 긴급한 사례라거나 국가의 존립이 위험에 처했다는 식으로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예외상태’야
말로 누가 주권의 주체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도록 유도하는 상태이다.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무엇이 예외 상태에서 허용되는지, 누가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하는 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주권자는 극한적 긴급상황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평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주권자는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
바깥에 서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속해있다.”(p. 18.)
주권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근대의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는 기만적인 수사들로 가득 찬 제도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결정’이라는 주권의 핵심을 회피하고 ‘논의’를 시작하려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핵심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결정을 회피하려 한다. 오히려
모든 정치적 활동은 신문이나 의회, 즉 논의에 내맡기려 한다.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세워진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는 국가의 근간으로서 ‘결정’의
권한을 도외시함으로써 실제로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기만적인 행보를 은폐한다. 자유주의적 국가는 “모든 정치 문제를 일일이 토론하여 협상 자료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토론으로 해소하려 한다.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갖고 있는 협상이며 어정쩡함이다. 즉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기대를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 셈이다.”(p. 86.)
그러나 자유주의의
핵심이 ‘어정쩡함’이라면,
그것은 비난이나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왜냐하면 주권의 핵심으로서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자유와 권리의 침해의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담긴 ‘어정쩡함’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최소주의적’ 사고에
익숙하다. 즉 최상의 결과를 얻는 선택에 모험을 걸기 보다는 최악을 상태를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슈미트의 사유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자유주의의 ‘어정쩡함’에 대한 조소나 비난이 아니다. 또한 ‘결정’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강하게 인식할수록 우리는 ‘독재’의 가능성을 허용할 수도 있고 권위주의적 정부이론에 관한 논의를 수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슈미트가 ‘개념사회학’이라고
불렀던 작업, 즉 우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최소주의적
사고’와 현재의 정치적-법적 현실 사이를 꿰뚫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이 무엇인지, 그 근본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일관되게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슈미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전망으로 삼기엔 너무 무모하다. 따라서 그 방법적 도구로서 유용성은
인정하면서도 ‘개념사회학’적 작업을 통해 자유주의를 그 근본으로부터
해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해부학으로부터 질병의 처방과 건강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 전망은 요원하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슈미트가 나에게 준 교훈이다.
실제로 슈미트는 “모든 근대적 법치국가의 발전 경향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주권자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p. 18.)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