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대학살에 대한 질문과 대답 -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대학살』
2006년 가을, 강의실에 들어온 한 남자는 자신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사학을 복수전공 하기로 결심한 첫 학기였기 때문에, 사학과 과목, 그것도 4학년들이
주로 듣는다던 <서양사학사>는 꽤 부담스러운 과목이었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교수님의 강의는 늘 힘이 넘쳤다.
풍부한 지식과 적절한 유머, 교수 자신의 젊음의 에너지와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강의실에
느껴졌다. 그 교수님의 강의를 나는 ‘좋은 강의’로 기억하게 되었고 7년이 지난 그 교수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았다.
나치 대학살은 제목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이다. 나치
대학살을 빼놓고 유럽의 현대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치 대학살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소설 <소피의 선택>을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막연한 저항감만을 내 안에서 확인했다.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것은 오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해독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저자가 밝히듯,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모두 ‘기억’이라는 전장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올바로 아는 것은 ‘기억의 전쟁’의 직접적 참가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심판자의 입장에서 내가 내릴 판단에 대한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독의 의지’를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에 살지도, 그
시대를 살지도 않은 나에게 나치 대학살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었는가? 사실 <소피의 선택>을 읽으면서, 그리고 몇몇 영화들 - <피아니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
- 을 보면서, 이 끔찍한 대학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몇 가지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이 대학살을 이해하고 싶었다. 누가 그랬는가? 왜 그랬는가? 죽어가는 사람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나에겐
이해가 안 가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블랙박스가 바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었다.
나치에 대한 유대인 대학살은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용어로 불린다. 나 스스로에게 겸연쩍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이 땅에서 벌어진 학살 – 노근리에서의 학살, 4.3 항쟁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 등 –에 대해서 가졌던 얄팍한 관심과 달리, 홀로코스트를 하나의 대명사로
즉, The Holocaust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 피해자들의 숫자가 달랐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는 다른 집단 학살과 격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근거리에서
벌어진 죽음에 대해서는 신문 기사 정도를 뒤적이면서 나치 대학살에 대해서는 이토록 열중하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히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겸연쩍은 마음은 그대로 남겨두면서 본격적으로 나치 대학살이라는
블랙박스를 해독하였다. 블랙박스를 해독하는 것은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가 유대인을 죽였는가?>, <쉰들러 리스트는
있었는가?>, <죽음에 이르는 길은 어떠했는가?>,
<유대인들은 도살장의 양들처럼 죽어갔는가?>가 해독의 열쇠를 쥔 굵직한 질문들이다.

<누가 유대인을
죽였는가?>. 사실 이 질문이야 말로 가장 예민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가해자들은 유대인 절멸 정책의 최종 결정자인 총통 ‘히틀러’,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지휘한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와 제국 보안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오른팔 ‘아이히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유대인 절멸정책을 입안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절멸 수용소를 만들고, 살인특무부대를 조직하여 무차별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하지만 직접적인 가해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력자들 내지는 암묵적
동조자들이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이동할 철도편을 마련한 교통부 관계자, 유태인들을 2등 시민으로 전락시키고 통혼 금지, 여권에 유대인을 뜻하는 글자를 표기하고 평상시 뱃지를 달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킨 의회 의원들과 법률적 대안을
제시한 법무부 직원들,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한 재무부 직원 등 독일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다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학살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 역시 수용소에 공장을 세워
유대인 노동자들의 공짜 노동력을 활용하였고 이들이 더 많이 수용소에 올 수 있도록 로비를 벌였다.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 국민들은 유대인들의 최종해결(절멸), 특별대우(차별)를 허용했다. 그런
점에서 암묵적 동조자를 포함한 유대인들에 대한 가해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니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공범이다.
이들이 유대인 대학살에 동조하고 조력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즉 <그들은 왜 유대인들을 죽였는가?> 이는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에서 그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는 예수의 죽음 이후부터
내려져 오던 배신자들에 대한 암묵적인 비난과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라는 이질적인 전통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정의될 수 있는 ‘중세적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경제 분야의 갈등에 근거한 ‘근대적 반유대주의’다. 근대적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로 설명될 수 있는데, 먼저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노동계급을 착취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의 전형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적 적대감이 유대인 일반에게 전이되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낭만주의 운동은 민족적 순수성이 간직된 황금시대를 신화적으로 그려가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을 이방인이나 이류 시민으로 묘사했다.” 셋째, “19세기 내내 맹위를 떨쳤던 사회적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논리는 한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들을 더욱더 변경으로 몰아갔다.” 마지막으로 과학적 인종주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고비노 백작과
같은 사람은 큰 키에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소유한 아리안 족만이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갈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속화되어 유대인은 열등한 민족이고 박멸해야 할 기생충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암묵적 증오는 과학적, 이론적 근거를 얻는
것처럼 보였고 유대인들에 대한 물리적 절멸 역시 나름의 근거를 갖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유대인 절멸에 관한 기획에는 근대정신이 흐르고 있다. 이른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과 효율성이 유대인의 절멸에 관한 기획과 실행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독일의 젊은 관료들은 합리적 사고로 무장한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강력한 제 3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낙후되어 있는 동유럽 지역의 경제를 독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볼 때 동유럽 지역의 경제적 근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많은 인구였다. 이들은 빈곤과 낮은 생산성,
그리고 과잉 인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민하면서 동유럽 지역의 원시적 생존경제의 근본 원인이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료들의 고민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게 하는 데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하였다. 절멸
수용소들의 죽음 과정은 효율적인 공장을 보는 듯하다. 여러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합동 연구를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치클론 B가스를 상용화하도록 했다.
유대인 학살의 대명사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는 철로와 승강장까지 마련되었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근대 세계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철도라는 이동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 내린 유대인들 가운데 노동 능력이 없다고 판정된 사람은 바로 가스실로 직행했다. 가스실에서는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규조토에서 누출되는 가스를 통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가스실 내부에서 사람들의 죽음이 확인되면 시체들은 거대한 화덕으로 옮겨져 불태워진다. 일종의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절멸 수용소는
거대한 죽음 공장이었다.
<유대인들은
도살장의 양들처럼 죽어갔는가?>. 사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뉘른베르크 법이 반포된 이후
유대인들의 행보이다. 자신들이 이등 시민, 열등한 민족으로
간주되고 추방당하는 동안, 더 나아가 게토로 내몰리고 절멸 수용소로 끌려가는 동안 유대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루에 9000명이 죽어나가는데 이를 지켜보기만
했는가? 이들에게 저항의식은 전혀 없었는가? 분명한 것은
나치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은 결코 심각한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살인특무부대의 집단 학살 가운데서도
유대인들은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지도자들은 호소와 청원의 방법을 택하고 물리적 수단과
정신적 투쟁을 동반하지 않았다. “나치스가 절멸을 위한 현대적 수단을 총동원한 반면, 유대인들의 대응 방식은 탄압 조치가 일관성 없는 불합리한 처사라고 항변하는 중세 랍비들 수준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복종한 부분도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가 학살의 각 과정마다 협력했다. 법령의 공포나 강제 이송 열차 운행, 총살과 가스사들은 나치스가
직접 담당했지만, 시체 매장이나 강제 노역, 벌금 납부, 강제 이송과 총살 대상자 선별 같은 일은 유대인들이 담당했다. “유대인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 스스로의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스의 절멸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저항은 물리적 투쟁이 아니라 상당히 넓은 외연을 갖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 수준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실제로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기 없는 투쟁’, 즉 유대 전통을 지키고 나치를 경멸하고 나치에 부역하는 유대인들을 증오하며 보편적 도덕과 윤리 규범을 준수하려는
노력, 내면적 위엄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유대인들의
‘무기 없는 투쟁’은 실제로 게토 내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려는
학교를 만들고, 종교적 가치를 고수하게 하고 – 당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법 행위였고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수용소 행이었다 –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장 투쟁도 병행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무기를 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약간의 무기를 구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무장 게토 봉기는 최소한 20회 이상에 이르렀다.”
나치 대학살이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말한다면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치 대학살의 근간을 이룬,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전적인 무시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한 내면 세계의 지배는 지금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역사의 반복은 한 사건의 기저를 이루는 ‘정신’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구체적 현실로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치 대학살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이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고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될 수 있다는 파괴적인 정신이 현실에 나타날 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상의 도구를 찾는 것이 ‘합리성’의 본질이라고 간주하는 정신이 현실에 나타날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파괴적인 ‘정신’을 비판하고 반성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목적에 걸맞는 수단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반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할 때에만 나치 대학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치 대학살은 여전히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