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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비밀은 있다 SE (dts, 2disc 디지팩) - 할인행사
장현수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나 비밀은 있다>
비연대기적 시간과 시점의 변화
이데산의 양치기 파리스는 에리스의 황금사과를 누구에게 바치는가.
이미 대부분의 관객들은 각종 매스컴을 통해 영화 스토리를 절반 이상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영화관을 찾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으리라. 권선징악의 이분법을 절실히 숭배하는 아주머니들은 엽기적인 애정행각을 벌인 카사노바가 어떤 벌을 받게 될지 궁금했을 것이고, 노란머리 빨간머리 팬티보이는 우중충한 골반바지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면 '뷔페(?)'를 먹을 수 있는지, 실제 작전을 짜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관객층인 여성들, 특히 아직까지 낭만소녀의 틀을 벗지 못한 노처녀들은 희대의 바람둥이가 세자매 중 누구를 선택하는지, 즉 수현(이병현)은 진영(추상미), 선영(최지우), 미영(김효진) 중 누구와 해티엔딩을 맛보는지 그 결과가 궁금했을 것이다.
사랑은 좋은 물건을 고르는 쇼핑과 같은 것. 섹스하고 싶은 남자는 내가 고른다.
딸 셋 있는 집은 보통 이렇게 이름을 짓는지. 주인공 진영, 선영, 미영은 미스 코리아 뽑듯이 진선미에다 '영' 돌림자를 붙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들은 이름과 정반대로 행동하여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막내 미영은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이어야 함에도, 도리어 미(美)를 무기로 여럿 남자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바람둥이(팜므파탈에 가깝다.)이며, 둘째 선영은 착하고 순수한 인물이었지만, 수현을 만나면서 동생 남자를 가로채는 야비한 인물로, 선(善)함과는 전혀 관련을 지을 수 없으며, 또 첫째 진영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로서 진(眞)실을 지키지 못하고 동생의 남자와 불륜에 빠져버리는 등. 그야말로 이름 값 잘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물론 물 흐르듯이 이 여자 저 여자 옮겨 다니는 수현의 출현이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지만.

여자의 첫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남자의 마지막 사랑뿐이다. -발자크-
사랑은 벼락처럼 다가와 안개처럼 사라진다. -도플러-
오, 자유! 그대의 이름으로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나니. - 로망 롤랑-
플룻 중간에 뛰어드는 이러한 글귀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 쓰인 것일까. 장면을 매끈하게 전환시키지 못해 고민하고 있던 감독이 최후로 생각해낸 어설픈 CG인가. 아니면 원작자의 유아기적인 상상력에서 발동된 유치한 장난일까. (원작이 이라는 아일랜드 블랙 코미디라고 하니 전자에 해당되겠다.) 연대기적 시간(Discourse-Time) 구조를 따르고 있는 보통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시점의 변화로 인한 비연대기적 전개가 시도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부터 진행되어 오던 미영의 이야기는 선영의 시점으로, 다시 진영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과거 연대기적 서사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형식주의자(또는 구조주의자)들은 '인물'이라는 담화의 기본 요소를 플롯의 하위개념으로 분류해 버렸다. 스토리를 좌지우지하는 플롯의 지배 속에 인물은 기생적인 상태로 플롯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독립적 형성이 불가피한 경우가 많은 최근의 현대적 서사물에서는 인물이 우월한 위치에 있어 플롯이 부차적으로 파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네러티브에 있어서 스토리가 사건 차원의 시간과, 존재 차원의 공간과 결부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영화에서 인물의 시점은 시간성을 앞지르고 있으며, 인물의 존재성은 공간과 함께 스토리 전체에 중요한 역을 담당하고 있다. 첫째 딸, 가정주부 진영의 공간은 가정과 백화점 등이며 둘째 딸 대학원생 선영의 공간은 도서관, 서재 등이고, 셋째 딸 재즈싱어 미영의 공간은 라이브 카페, 무대이다. 이들이 활동하는 공간만으로 인물의 성격이 형성되며, (또는 인물의 성격화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각자의 공간들은 인물 간의 갈등까지 유발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비밀을 가지고 있다. 비밀의 크기만큼 행복해진다.
양치기 파리스는 예쁜 마누라를 준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바치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는 아무런 결론도 없이, 유혹을 했던 남자는 무죄요, 유혹을 당했던 여자들은 '비밀'이라는 아주 훌륭한(?) 면죄부를 선사 받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