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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남한 사람으로 생을 마감한 '묵할머니'와 그녀의 부고 인터뷰를 담당한 '나'의 이야기.
황혼요양원에서 근무하는 '나'는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치매 병동에 머무는 '묵할머니'는 자기 인생을 세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들다며 들려준 일곱 단어가 바로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다. 성씨도 독특한 '묵할머니'의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격동의 시대, 묵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위안부가 되었고, 해방 후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지내다 북으로 간다. 그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살며 잠시 여인이 되고 엄마가 되었다가 스파이로 산다. 그리고 변절자가 되어 남쪽 황혼요양원에서 끝을 맞이 한다.
묵할머니가 겪은 생의 파노라마는 단편 소설 《수난이대》의 플롯에 비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같지만 수난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중을 두어 구분할 수 없기에, 수난이대 속 부자가 떠올랐다.
실존 인물이었을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존 인물의 이야기였음 좋겠다는 바람마저 생기는 스토리였다.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묵할머니가 영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경과 고난을 버티고 이겨 낸 영웅말이다. 시대적 아픔을 견디고 살아낸 분들은 치를 떨 순간들이었을텐데 흥미진진한 모험을 대하는 유치한 독자의 태도인 것 같지만 그만큼 몰입하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묵할머니의 어머니는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진 분이었고, 묵할머니 역시 엄마의 그런 점을 닮았다.
“ 말이란 건 그냥 말이 아니란다, 아가. 말은 우리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 이상이야.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절대 일방통행이 아니야.
말을 부드러운 무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아가. 네가 아버지가 모르는 말을 썼을 때 아버지가 왜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니? 알겠니?”
사용하는 어휘가 다양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었고 이런 점이 묵할머니의 아버지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로 인해 묵할머니의 남다른 인생은 시작됐다.
위안소에서 만난 유난히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용말의 개인사는 묵할머니의 새로운 인생이 되었고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만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배운 영어는 묵할머니의 인생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
묵할머니의 인생 자체가 전해주는 흥미진진함과 처열함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언어 사용의 힘과 글쓰기의 힘을 일깨우는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뛰어난 언어 감각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힘은 묵할머니를 남다른 스파이를 만들어 냈다.